[GSRC] 세 번째 시간 - 망명과 자긍심 2부 후기

시윤
2020-08-12 18:53
388

“도둑들이 만들어내는 것들, 즉 외부의 인식, 고정관념, 거짓말, 잘못된 이미지, 억압은 확실히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우리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우리의 젠더화된 자아를 정의하고 창조한다.

…학대, 비장애 중심주의, 트랜스 혐오, 동성애 혐오가 내 몸을 도둑질하고, 내 욕망을 부숴버리고, 내 피부에 닿은 따뜻한 돌과 썩은 통나무에서 자라는 이끼의 축축한 폭신폭신함과 바위에서 똑똑 떨어지는 샘물의 맛에서 내가 느끼던 기쁨으로부터 나를 갈라놓았다고 말하는 건 차라리 쉽다. 부숴진 게 어떻게 치유되는지 이야기하기는 훨씬 어렵다.“

 

 책은 우리의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우리 그대로일 수 있는, 집으로서의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시에 책은 도둑맞은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우리 그대로일 수 없는 이유, 사회가 함부로 규정짓고 조각낸 몸에 대해 말한다.

남성, 백인, 시스 젠더,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심주의 안에서 우리 몸이 결코 온전할 수 없음은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기본값’을 벗어난 몸은 곧 이상하거나 무섭고 웃긴 것이 되었고, 곧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존재했다. 이런 낙인과 관음이 항상 불편했던 나조차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내 몸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억지로 수긍하려 했음을 깨달았다.

 

 한때 나는 ‘불구자’, ‘퀴어’, ‘프릭’ 등이 스스로 지칭하기에 불필요한 수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는 것에 오글거린다며 거부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누구인지도 모를 ‘정상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결코 정상일 수 없는 나를 소개할 ‘긍정적인’ 언어를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빼앗긴 몸을, 조각난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도둑맞은 몸을 부정하자 그 자체인 몸마저 존재할 곳이 사라졌다.

 정상성이 견고히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몸을 가진 이라도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고, ‘정상’의 상태와 나 사이를 의식하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다른 몸을 타자화하며 ‘나’의 비정상성에 대한 불안함을 잠재우려는 가운데 자신을 ‘불구자’로 칭하거나 ‘퀴어’하다고 말하는 것은 따라서 유의미하다.

 

 세미나를 통해 이 사실을 체감했다고 해서 내 것인/내 것이 아닌 몸을 잘 인식하고 설명하게 되었다는 후기는 쓰지 않겠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세미나에 참여하는 동안 불완전한 내 몸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거쳐 불완전한 그대로의 (나조차도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상태의) 내가 쌓이고 쌓인다면, 앞서 언급한 본문처럼 부숴졌으나 치유된, 여전히 집이지만 집이 아닌 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다.

댓글 2
  • 2020-08-13 12:34

    특정한 호칭이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통감할수록, 호칭 그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도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런 면에서 <망명과 자긍심>은 저한테도 새로웠던 것 같아요.
    호칭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내는 저자의 고집이 왠지 마음을 울렸습니다.

    몸을 잘 인지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윤님을 비롯한 여럿의 몸에 관한 고민에 저도 크게 동감했답니다.
    저에게도 풀고 싶은 큰 숙제입니다..!

  • 2020-08-30 21:05

    '다만 세미나에 참여하는 동안 불완전한 내 몸은 안전할 수 있었다.' 는 말에 위로 받아요.
    저도 그런 시간과 공간, 주변의 사람들과의 소통과 시간이 쌓이면 언젠가는 더 안전하게 나를 받아들이고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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