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터의 two픽>(콩땅 편) : 아스케시스 --- 정신 줄 놓지마!

문탁
2020-06-21 10:33
460

 

 

아스케시스 --- 정신 줄 놓지마!

 

 

콩땅

 

1. 냄비 속 개구리의 자기포기

 

넷플릭스 4부작 미니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뉴욕 브루클린의 하시디즘 공동체를 탈출한 실재 여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다. 영화는 철저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어떠한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 하시디즘 공동체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없고, 탈무드를 읽을 수도 없으며, 오직 결혼을 통해 출산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하시디즘 공동체의 외양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남자들은 옆머리를 길게 길러 눈썹 옆으로 늘어뜨린다. 예배나 모임에서는 커다란 마시멜로 같은 검은 털모자를 쓴다. 결혼한 여자들은 모두 삭발해 항상 스카프나 가발을 쓰고 있다. 살갗을 감추기 위해 긴 옷을 입는다. 전통과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삶은 부정당하고 억압당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불편하고, 답답하고, 찜찜한 감정이 들었다. 억압에서 탈출하여 해방이 된 주인공 에스티를 보며 기뻐해야하는데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왜 이런 더러운 기분이 드는 걸까? 며칠 전 새털샘 책(영혼과 정치와 윤리와 좋은 삶)을 다시 뒤적거리다가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눈이 잘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작은 글씨가 아니라 큰 글씨로 쓰인 글을 읽게 하면 이해가 더 잘된다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였다. 시력이 나쁜 나에게 영상의 메시지를 던져 주며, 푸코가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다. 별 억압을 못 느끼며 살고 있다고? 자유롭다고 느끼고 있다고? 쯧쯧,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를 고민해 봐!

 

예전 대학에서 가정폭력 강의를 들을 때, 나의 질문은 ‘왜 이런 폭력을 견디며 살지? 도망가면 될 것을 왜 저러고 사는 건지였다. 강사로부터 들은 답변은 찬물을 담은 냄비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끓이면,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냄비에 가만히 있다가 점프해 나가야하는 시점을 놓쳐서 포기하고 죽는다고 한다. 오랜 폭력을 견디며 폭력에 길들여진 신체는 자신의 현재 상태도 인식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자기포기로 인해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하시디즘 공동체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면 부러워할 만한 질서와 번영이 있다.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난제는 권위 있는 랍비가 탈무드에 따라 해결해주고, 결혼, 출산, 장례처럼 크고 버거운 일들은 공동체가 나서서 도와주고, 경제적으로도 강력히 연계되어 모든 구성원이 평균 이상의 안정적 생활을 누린다. 요컨대 다소 기괴한 습속과 규율을 따르면 공동체에서의 삶은 안락하고 온정이 넘친다. 스피노자~ 왜 대중은 자신들의 안전만큼이나 예속을 위해 장렬히 싸우냐고? 질 들뢰즈~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냐고? 예속이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 같으니깐. 더 중요한건 자신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무엇에, 어떻게 예속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지 않을까.

 

 

2. 푸코, 일타강사로서 권력에 대해 알려주다.

 

푸코는 권력의 철학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떤 현상을 분석하든 권력의 문제로 순환하는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푸코의 독특한 권력 개념은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푸코는 권력을 권력관계, 메커니즘, 또는 장치라는 단어로 이야기한다. 왜 메커니즘 혹은 장치라고 했을까? 역할, 기능을 부과하는 총체적인 메카니즘의 일종이 바로 권력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권력자체에 복종하기보다는 그가 서있는 강단의 높이, 그가 선생이 되도록 부여한 사회제도, 학교라는 공간 등 어떠한 메커니즘 안에서 선생님에게 복종했다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 메커니즘을 푸코는 세 가지로 구분한다. 사법메커니즘, 규율메커니즘, 안전메커니즘이다. 이 세 가지 메커니즘은 서로 깊숙하게 공유하고 들러붙은 채로 사회의 영역에 분포되어 있는 권력관계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푸코 자신조차 내키지 않지만 시대적 구분에 따라 이 메커니즘을 이해한다.

 

첫 번째로 사법메커니즘이 있다. 사법메커니즘에서는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어지는 자에 대한 처벌을 확정하는 법적체계다. 허가/금지라는 이항분할에 근거하고 있다. 이 메커니즘은 명확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상정하는 것으로서 가장 익숙한 권력의 형태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규율메커니즘이 있다. 여기서는 이항분할 외에 제3의 영역이 등장한다. 바로 범죄인이라는 영역이다. 사법행위를 보조하는 경찰, 의학, 심리학과 같은 기술들의 발전으로 인해 개개인은 ‘해야 하는 것’을 스스로 내면화한다. 정상인의 범주가 정해지고 정상적인 행동이 정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푸코의 미시권력이 이 규율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간수들의 감시를 내면화하듯이 개개인은 사회에 넓게 퍼진 규율메커니즘 안에서 권력의 눈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특정 개인에 대한 생산”은 인간의 신체를 측정, 검증이 가능한 요소로 규정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공간의 구획정리다. 벤담의 판옵티콘이 그러하듯 규율메커니즘에서는 공간의 성질을 명확하게 규정하여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권력과 그 권력의 내면화를 극대화시킨다.

 

 

 

 

권력의 눈을 내면화하는 규율을 읽을 때마다 <반지의 제왕>속 사우론의 눈이 생각난다. 불화산위의 사우론의 눈은 모든 것을 감시한다. 그러나 사우론의 눈은 정확히 무력이 아니다. 그의 능력은 머리와 변장술, 조정술에 능한 지략가 스타일이다. 권력은 실체가 아닌 권력관계에 내재한다. 부정적 무력 보다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한다(『감시와 처벌』, p.302)

 

 

3. <반지의 제왕> 사우론과 <알리타>의 세계, 생명조절권력

 

세 번째는 안전메커니즘인데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년에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한 것인 생명조절권력이다. 안전메커니즘에서 권력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권력은 허가/금지가 아닌 ‘평균치’에 대한 계산을 실시한다. 그리고 역치 즉 용인할 수 있는 한계치를 정한다. 이것은 인구집단으로서 인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통계학, 정치경제학과 같은 기술적 지원을 전제로 한다. 발병률, 사망률, 치사율 등을 계산하고 그것이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 적절한 일련의 조치와 함께 전염경로와 인구이동, 순환의 문제를 점검하는 등의 관리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안전메커니즘은 완벽하게 억제하기 힘들지만 어느 정도는 조절할 수 있는 종류의 위험을 확률로서 다룬다.

 

통계학은 권력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예를 들면, 스웨덴의 코로나 대응방법 같은 것일까? 집단면역이라는 대응으로 전체 인구 60%이상 항체가 생기길 기다리다가 스웨덴 요양병원 노인들 수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코로나 사망자 대부분은 노인 요양원 아니면 정신병원 아니면 장애인 시설에서였다. 살 사람은 살게 하지만, 죽을 자는 죽음으로 몰아가는 생명조절권력의 모습이 보여 섬뜩하다.

 

“이 권력은 주권의 영역에서 죽음의 효력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가치유용성의 영역에 배치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인명을......규정짓고 측정하고 평가하고 위계화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규범을 중심으로 배치를 실행한다.” (『성의역사』 1권, p.164)

 

인간이라는 종이 통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신체의 조정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생명조절권력은 17세기부터 두 가지 주요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두 가지 극에 위치한 권력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하나는 인체 규율(개별화)이고, 다른 하나는 인구의 조절(전체화)이다. 이는 해부학적이고 생물학적이며, 개별화하고 명시하며, 육체의 수행능력 쪽으로 향하고 생명의 과정 쪽으로 눈을 돌리는 광범위한 기술이다.

 

 

 

 

 

영화 <알리타>는 모두가 욕망하는 부의 상징인 공중도시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고철도시로 나누어진 세상이다. 영화 속에는 몸이 기계화된 부분이 아예 없는 인간과, 부분적으로 기계화된 인간, 그리고 뇌를 제외한 모든 장기가 기계화된 사이보그가 등장한다.

 

“신체의 조련, 신체적 적성의 최대화, 신체적 힘의 착취, 신체적 유용성과 순응성의 동시적 증대,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통제체제로의 신체의 통합................증식,.......건강수준, 수명, 장수와 더불어 변화시킬 수 있는”신체 (『성의 역사 1』, p.150)

 

아들놈이 “엄마 내가 죽을 때 까지 엄마도 계속 살아 있어야해~” 하길래, “그래, 그러지 뭐. 알리타의 사이보그처럼 로봇 팔, 로봇 다리, 눈알도 로봇을 장착하면서 오래 살도록 노력해 볼게.” 했더니, “엄마, 그냥 자연적으로 죽는 것이 아름다울 것 같애.”란다.

 

‘인체의 해부정치’와 ‘인구의 생명정치’의 끝은 혹시 사이보그인가? 요즘 의료과학의 발달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한 인간의 생애가 인구라는 체계적, 과학적 지식의 대상이 됨으로서 통치성이라는 사유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과학의 산물로서, 어떻게 인간 주체가 말하고, 일하고, 살아가는 개인으로 규정당하는 지를 보여주려 한다. 통치성은 생명조절권력이다.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 절차, 분석, 고찰, 계측, 전술의 총체이다." (『안전, 영토, 인구』, p.163)

 

 

4. 반항 말고 저항

 

사춘기 때 반항을 심하게 했다. 중학생 때 슈퍼에 파는 양주 시바스 리갈을 아주 가끔 사서 마셨다. 단지 술이름이 욕같아 마음에 들었다. 집도 답답하고, 학교도 답답하여 자신을 어떻게 주체를 하지 못했다. 놀부처럼 사방에 심술 부렸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짤짤이’(동전으로 홀짝 맞추기 해서 돈 따먹기) 하고, 집에 가면 가방던지기, 고스톱치기 등. 이렇게 해야 자유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반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다. 반항은 윤리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하다. 그저 “NO”라고 부정만 할 뿐, 다른 고민은 당연히 없었다.

 

 

 

 

 

푸코는 통치성과 관련된 저항을 사고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이 지속적으로 제기됨을 말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그리고 만약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통치화하는 이러한 활동을 역사 속에 집어넣어 그에 합당한 범위를 부여한다면, 대략적으로 비판적 태도라 불릴 만한 것을 거기에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비판이란 무엇인가?」, p.44)

 

너무 멋있는 말이다. 권력관계로부터 지배 상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지배 상태에 있는 자기에 대해 사유하고 이 관계 속에서 자기를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속 에스티는 부조리한 현실에 의문을 품고, 지배 상태에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으며, 진실을 말하고, 미지의 세상인 울타리 밖으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자유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관계로 뛰어든 것이기도 하다. 자기 배려가 의미하는 것은 권력관계에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기의 힘을 조절하는 실천이며, 자기의 존재방식과 행동방식의 지속적 비판과 문제화이다.

 

에스티는 잘 살아 가고 있는 것 같고, 문제는 나와의 관계이다. 요즘 문득 문득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가를 질문한다. 맞다.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괜찮지 않다는 것이다. 괜찮지 않기에 에스티를 보면서 불안이 엄습했다. 다급한 마음에 호수공원을 매일 걸으며 칸트 흉내도 내봤다가, 아침에 찬물샤워로 하루를 시작한다든지, 뭔가 통제하고 조절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의식이 필요하다고 느끼며 루틴 의식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의식을 통해 내가 어떤 일상을 꾸리고 있으며, 어떤 규칙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내 삶을 어떻게 구성하고 싶은지에 대해 사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최소한 정신줄이라도 놓지 않도록 유지하자. 제발........

 

“노예에게는 윤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유 그 자체가 정치적입니다......자유롭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또는 자기의 욕망에 노예가 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관계 즉 원(原) 권력, 권위라고 불리우는 것의 확립을 가정하는 것입니다.”(「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권력, 자아, 윤리」, p.107)

 

댓글 2
  • 2020-06-21 15:59

    10대에 벌써 시바스 리갈을 삼키며 바닥까지 디뎌보셨군요? 존경스럽습니다. 괜히 돌아가는 세상에 맞추려고 권력을 내면화 하다하다 결국 40대에 번아웃 ㅠㅠ 반항이 아닌 저항의 길, 자기 양생과 배려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선 결국 자기라는 주체를 향한 끝없는 문제 의식 즉 질문을 던지는 거겠죠?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사이사이 들어온 영화들도 보고 싶네요.

  • 2020-06-23 09:41

    콩땅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잘은 몰라도 대강은 알고 있어요.
    한문강독세미나의 떠오르는 샛별 콩땅, 최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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