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켜기 캠페인> 먹물의 말년은 쓸쓸하다

동천동 해리슨
2010-09-13 21:26
3652




 

만  년  필 ..................  송 찬 호 시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1. 정신노동의 비극성


 펜대를 쥐고 궁리질 하는 일을 하십니까.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면서 노동하나요. 삽자루 곡괭이자루 칼자루 자동드라이버 스패너 전자계산기 마이크 붓 그릇 운전대 줄자, 우리는 이중의 하나를 손에 쥐고 생업에 종사합니다.

 

  봉건시대엔 태어난 조건이 운명을 가릅니다. 왕후장상의 자제든 종일 논밭을 부쳐야 하는 농노든 비천한 노비의 고된 삶이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계급의 숙명을 따라야 합니다.

 

 자본이 산업으로 들떠 일어서는 시대. 생산수단을 가진 소수와 못 가진 대다수 무산자로 삶의 입장이 대척점에 섭니다. 자본재생산 장치인 생산수단이 없는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합니다. 

 

 정신적 노동. 육체적 노동과 구별되는 노동의 한 축입니다. 현대엔 딱 부러지게 나눠지지 않습니다.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의 처지로선 육체적 노동자와 동일하지만 사물과 현상을 조망하며 기획창작력을 문자로 구사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종종 정신노동은 육체노동을 비웃으며 자신을 차별화시킵니다. 때론 뛰어난 재능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마치 생산수단을 가진 고용주인 냥 화려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본질은 노동력만 갖춘 채 늘 노동매매시장 주변을 서성거려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 쇠잔하는 노동력을 가여워하며 회한을 내뿜는 시 한편이 가슴을 찌릅니다. 송찬호 시인의 ‘만년필’. 시인 평론가 162명이 '2005년 가장 좋은 詩’로 선정한 바 있습니다.

 

 대부분 시인은 가난한 미학주의자입니다. 존재의 시원(始原)를 탐구하면서 늘 근원적인 어떤 것을 묻고 대답하려 합니다. 시적 직관과 시적 에스프리를 갈고 닦습니다. 시원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며 그 여정을 문자로 표현합니다. 문자로서 문자 너머의 것들을 노크하고 발견하려 합니다. 


 

 

  

2. 먹물의 쓸쓸한 조락


 송찬호시인의 ‘만년필’에는 ‘먹물의 한 평생’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만년필로 상징되는 인텔리겐차. 그 세속적 삶의 구도가 참담하면서도 빛나는 은유의 고리를 이루며 미학적 관조를 드러냅니다. 지식인이란 미명이 짠해지고 좁아지는 그의 어깨가 안쓰럽습니다.  

 

 만년필도 한 자루의 작은 삽이지요. 이 만년필로 ‘삽질’하며 하루에 하루를 퍼 올리며 뭔가에 종사합니다. 저 창공에 옷걸이를 만들어 때론 호기부리며 술 취한 넥타이를 걸어두었습니다. 청운의 꿈은 언젠가 꼭 이루어진다고 믿었죠. 하얀 벽에 머리를 짓이기며 불면의 밤을 보낸 것은 차라리 감미로움. 호기로운 청춘은 어느덧 명멸하고 낮 시간의 생계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습니다.  

 

 권력자인 장군이 타던 죽은 적토마 말대가리에 눈 화장을 해주곤 했습니다. 장군의 초상화를 덕성 깊게 그려 주거나 그가 대중 앞에서 씨부렁거릴 언사들을 미리 모아 글 다발 글 줄기로 꿰어주기도 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만년필도 핏빛 잉크를 담아 문자香을 내뿜었던 그런 시절을 잊어만 갑니다. 헐거워진 기계 톱니바퀴처럼 뭉툭하며 밋밋해졌습니다.  

 

 순수한 노동이 있겠는지요. 순결하고 순정한 노동의 기쁨이 따로 있겠는지요. 노동이 교환가치를 만들어내려면 누군가에게 매매되어야 하기에 이미 그 순간, 순수와 순결은 휘발되고 맙니다. 오직 냉혹한 상대평가와 유통가격과 시장의 논리만이 횡행합니다.  

 

 한때 만년필이 부유한 앵무새의 부리 노릇한 것을 탓할 수만 있을까. 기력이 쇠해 공원묘지의 대서사(代書士)로 몸을 기탁하고 있지만 후회의 글을 쓰건 회한의 곡을 토하건 오롯이 그의 몫입니다. 볕을 쬐며 해바라기 씨를 입에 오물거리는 늙은 만년필, 반짝거렸던 '크리스탈의 시대'를 떠올리며 탁주 한 사발에 추억 한 편을 무용담처럼 중얼거리며 저문 하루를 여밉니다.

 

 바로 이때 송시인은 무서운 한 문장을 휘날립니다. 나 만년필은 잊혀진 필기구로 사라지지만 글의 절벽 위로 글로 만든 바위덩이를 굴리며 등정하는 문객(文客)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 한, 저 거품 부글거리는 코발트빛 잉크의 늪에는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고.  

 

 

 harrison 

댓글 3
  • 2010-09-14 11:10

    아! 감동입니다..

    코발트빛 잉크의 늪에 사는 푸른악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돌아보니 살면서 만년필 한자루 가져 본 적 없네요.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그런 이름은 아니어도

    만년필 하나 구해서 푸른 잉크 가득채워

    스르륵 스르륵 공책 위에 글을 써보고 싶어집니다. 

     

  • 2010-09-14 11:33

    한때 만년필이 귀한 선물이었는데...주로 대학교 입학하면 사주고...정말 만년필 써본지 오래되었네요. 중학교때는 잉크병 들고다니며 펜에 잉크 묻혀서 글씨 썼더랬는데...

  • 2010-09-17 16:53

    20년 전쯤에 한 학생이 졸업하면서 제게 선물한 만년필이 있어요.

    아끼다가 묵혀버린 그 만년필을 꺼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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