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가름침, 악한 권력을 증오하라 (불밝히려고 퍼온글^^)

아톰
2010-08-22 17:17
2964
» 공자(왼쪽)와 맹자의 초상. 유교사상에서 정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권력에 대한 증오심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은 짐승이다. 남의 살을 먹어야 살고, 새끼를 낳으려는 욕망을 타고났다. 인간의 생존 본능과 성욕은 사자나 매, 연어나 다슬기와 다를 바 없다. 맹자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요소는 너무나 미약하다”라고 한탄한다. 광고 문안을 빌리면, 인류에게 사람다움은 고작 2%에 불과하다. 맹자는 그 2%를 인의(仁義)라고 이름 붙인다. 이토록 미약한 ‘인과 의’를 보존할 때라야만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또 문명사회를 이룬다.

 

‘의’의 본래 뜻, 고르게 나눠 먹기

개개인의 사주팔자나 운세를 살피는 ‘동양철학’의 대명사가 명리학이다. 명리학은 길흉(吉凶)과 화복(禍福)을 잣대로 사람을 본다. 여기에는 부귀영화를 욕망하는 것이 사람이요, 흉과 화를 두려워하고 회피하려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람은 고작 짐승에 불과하다는 ‘리얼리즘’이 명리학의 기초인 셈이다.

이 ‘철학’으로 보자면 근세 최고의 인생을 산 사람은 이완용일 것이다. 그는 칠십 평생을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제 명을 다하고 죽었을 때조차 ‘국장’을 넘어 제국장(帝國葬)의 예우를 받았다. 반면 안중근은 명리학의 관점에서는 최악의 인생이리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30살의 젊은 나이로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육신은 어디로 흩어졌는지 묘조차 없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요,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이 안중근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완용이란 이름은 곧 ‘매국노’라는 뜻이 되었고, 안중근이라는 이름 뒤에는 의사(義士)라는 칭호가 붙었다. 인간을 구성하는 98%의 동물적 요소에 충실하면 이완용이 나오고, 고작 2%의 미약한 사람다움을 좇으면 안중근이 나온다. 여기 안중근이란 이름 뒤에 따라붙은 ‘의사’라는 말 속에 유교의 정의관이 깃들어 있다.

의(義)자의 글꼴은 양(羊)과 아(我)자 모양의 창칼로 이뤄졌다. 원시 공동체에서 먹을거리를 정확하게 갈라 균등하게 나누는 데서 생겨난 자형인 듯하다. 먹어야 살지만, 고르게 나눠 먹기, 이것이 ‘의’라는 글자의 밑바탕인 셈이다. 점차 ‘의’자는 분배의 균등함, 업무의 합리성, 공동체에의 헌신 같은 뜻으로 확산됐다.

‘의’자에는 부족한 것을 의식적으로 보충한다는 뜻도 있다. 예를 들어 눈이 하나 없을 때 따로 끼운 눈을 ‘의안’(義眼)이라 하고, 다리가 하나 없을 때 끼우는 기구를 ‘의족’(義足)이라고 한다. 또 남들 다 있는 형제가 없어 친구를 형이나 아우로 삼을 때 ‘의형제’(義兄弟)라고 이르고, 낯모르는 타인의 불행에 재물을 기부하는 ‘의연금’(義捐金)이라는 말에도 그런 뜻이 담겼다. 그러니까 부족하거나 불행한 것을 사람의 힘으로 메우려는 노력이 ‘정의’의 사회적·실천적 의미를 구성한다.

정의감은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수치심과 증오심으로 이뤄진다. 수치심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는 양심이다. 새벽녘에 잠이 깨어 어제 한 일을 헤아려볼 때, 문득 목줄기에서 발갛게 타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이 부끄러움이다. 이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이요, 이것이 없으면 사람 탈을 쓴 짐승에 불과하다. 이를 두고 맹자는 “부끄러움이야말로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다”(恥之於人, 大矣!)라고 지적한다. 사람과 짐승을 구별짓는 경계선에 수치심이 자리한다.

 

증오는 사랑의 뒷면

한편 증오심은 부끄러움을 공동체에 미뤄 적용할 때 생기는 ‘공적 수치심’이다. 즉 수치심이 개인적 덕성이라면, 증오심은 공적 덕목이다. 제 몫은 꼭 챙기면서 남의 사정은 거들떠보지 않는 동료에 대한 미움, 제가 저지른 불법을 합법화하는 권력자에 대한 분노,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또 죽이는 짓에 대한 증오심이 정의감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증오심의 바탕에는 수치심이 깔려야 하고, 수치심은 증오심으로 밀고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안팎으로 정의가 선다.

주의할 것은 증오의 속살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아니, 증오는 오로지 사랑에서 빚어질 뿐이다. 전우익의 말을 빌리자면 “난장판 같은 세상에서 속 빈 강정같이 사랑, 사랑 하는데 참된 삶이란 사랑과 증오로 이뤄집니다. 증오도 사랑과 존경 못지않게 소중합니다. 사랑의 배경은 증오고 미움의 배경은 사랑이나 존경입니다. 배경 없는 사진이 어디 있어요?”(<사람이 뭔데> 중에서)

실은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일 테다. 증오는 사랑의 뒷면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어가 ‘사랑’을 뜻하는 인(仁)임은 잘 알려졌는데, 또 막상 ‘인’을 주로 다루는 <논어> ‘이인’편에 증오(惡)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까닭이 이 때문이지 싶다. 좋은 말로 사랑하기를 격려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부정한 자를 철저하게 미워하는 것이 ‘인’을 실현하는 한 방법이라는 매서운 뜻이 그 속에 들어차 있다. 함께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선, 구성원들의 분노심과 증오심이 필수적 요소임을 알겠다.

‘논개’의 시인 변영로가 ‘거룩한 분노’란 “강낭꽃보다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마음”이 흐르는 것으로, 즉 서로 상반된 색이 한데 어울리는 경지로 묘사한 까닭도 다르지 않다. 맹자가 사랑을 뜻하는 ‘인’과, 그에 상반되게 증오를 뜻하는 ‘의’를 아울러 ‘인의’로서 사람다움의 핵심으로 삼은 까닭도 같다. 한마디로 정의는 인간의 조건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군자는 정의에 밝고, 소인은 이끗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말이다. 군자란 사람다움을 내내 성찰하며 사는 사람을 이름이요, 소인은 제 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인 것이다.

 

공동체 해치는 군주라면 혁명 일으켜야

정의가 정치적으로 인식되는 순간은 이런 소인배들이 공직에 취임해, 공적 지위를 사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데서부터다. 부끄러움을 잊은 소인배들의 이끗 추구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들의 대응 방법은 증오심을 바탕으로 한 저항이다. 이것은 유교가 제시하는 합당하고 올바른 길이다. 타고난 군주일지라도 제 생각에만 빠져 공동체를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 즉 ‘홑사내’에 불과하므로 혁명을 당연한 일로 여겼던 터다. 그러니 혈연과 학연, 지연을 기화로 패거리를 이뤄 공무를 이용해 사익을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최근 권력층의 악폐를 심드렁하게 ‘유교 문화’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외려 행방불명으로 군대를 면제받은 자가, 여당 대표 자리를 취할 욕심으로 늙은 어미의 무식(無識)에 탓을 돌리는 무치(無恥)야말로 유교에서 용납하지 못하는 바다. 권력을 위해 천륜을 배신하는 자야말로 유교가 가장 증오한 자다. 이런 자들이 어울려서 빚어내는 만화경 같은 세태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것이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펴냄)라는 책인가 보다(이 책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라니 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바,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라는 데 유교는 찬동한다. 나아가 “시장은 생산 활동을 조직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지만, 오늘날 이익의 추구에만 몰두하는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공론에 부칠 필요가 있다”라는 그의 제안에도 긍정한다. 다만 이 책의 결론인,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라는 화두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공자와 맹자가 누누이 그 뜻을 밝힌 바 있음을 밝혀둔다.(한겨레21)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댓글 1
  • 2010-08-28 08:43

    학자 5명이 꼽은 논어주석서 중,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사계절, 배병삼 교수)도 있네요.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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