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장자 두 번째 시간 후기

오영
2019-06-22 14:22
471

지난 주 <제물론>의 첫 시간에는 장자와 노자의 저작들이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 등장했는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공자 사상이 주()나라로 상징되는 천명적인 질서의 붕괴에서 비롯되었듯이 장자 역시 그가 대결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여 名家라고 불리는 변자(辨者), 즉 혜시와 공손량과 같은 궤변론자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이 목도한 그 시대의 형이상학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방편으로 합리주의의 극단까지 자신의 논리를 밀고나갔습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장자가 장자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이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논리적 분별을 정교화하는 방식으로 시비를 넘어서고자 했지만 장자는 그들의 논리가 시비에 또 다른 시비가 맞서고, 개념이 더 많은 개념들을 낳으며 오히려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명가들의 방식으로는 형이상학적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더욱 부추기는 결과만 가져온다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이어 <제물론><대종사>까지 읽으면서 장자가 넘어서려고 한 명가들의 주장과 장자의 논지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때 중요한 개념들이 양행, 인시, 이명, 도추, 보광, 대각, 물화 등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 개념들이 전제로 하는 것은 혜시와 공손량의 상대주의입니다.

제가 어렵다는 느낀 것은 언뜻 보기에는 장자와 그가 대결하는 그들의 주장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명가의 논리를 그들의 방식대로 논리에 대한 논리의 반박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따라서 명확히 반박하는 지점이 잘 보이지 않고 일견 딴 소리를 하듯 빗겨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나름의 논리로 무장하고 한바탕 쏘아붙이려고 하는 찰나에 상대방이 엉뚱한 말로 상황을 전환시켜버림으로써 맥이 풀려 하려던 말은 한 마디도 못 꺼내고 머쓱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장자>라는 텍스트가 지닌 난해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엄은 이러한 면모를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길항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그렇다고 해서 장자가 시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장자는 도가의 주장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저 너머의 초월적인 세상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명가들이 만들어 놓은 논리의 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문탁샘은 과연 진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유가에서는 을 통해 윤리적 주체로의 변형에 대해 말했다면 장자의 진인은, 그리고 그가 말한 좌망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관념적인 것인가, 혹은 실천을 염두에 둔 것일까 질문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저는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적 주체로서의 실천이 떠올랐어요. 언뜻 보기에 1,2,3 종 인식을 강조하는 스피노자를 관념적이거나 이상적인 철학자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분명 있거든요. 어쩌면 장자 역시 심재’, ‘오상아’, ‘좌망과 같은 개념들이 추상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라고 오해될 여지가 있지만 과연 그러한가 생각할 볼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경험을 넘어선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조금 더 텍스트를 세밀하게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포정해우, 여우가 가르치는 득도의 단계, 그리고 물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  장자와 나비이야기도 기존에 알고 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어떤 존재로도 변형 가능한 근거로로서의 만물제동의 원리도 인상 깊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존재들이 있고 그 형태는 모두 달라도 그들 사이에 경중, 미추, 대소의 차이, 구분 없이 절대적으로 평등하다고 말하는 만물제동.

이 개념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내재성의 원리와 같은 것으로 모든 존재들이 있게 한 하나의 원동력이 그 존재들 내부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힘에 의해,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맷돌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맷돌의 추처럼 그 무엇이든 다음 순간 다른 존재로 변형될 수 있는 역량을 가진다고, 그것이 즉 물화라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의 저자가 2부에서 말하고자 한 바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자도 곽상의 해석을 근거로 장자 철학의 핵심을 만물제동과 물화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암튼 이번 시간 만물제동물화’, 그리고 진인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개념들이 허황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재적인 개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에티카 5부를 읽었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땐 5부가 엄청 뜬금없고 황당하게 여겨져서 도대체 스피노자는 5부를 왜 쓴 것일까 의아해했었죠. 근데 문득 어쩌면 장자에게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뜬금없이.... 

장자의 윤리학과 스피노자의 윤리학,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에티카 5부에서 말하는 3종 인식, 신의 사랑을, 장자와 더불어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네요. 

점점 장자가 재미있어지는 시점에아쉽게도 다음 시간 결석합니다.  하여 저는 부득이하게 장자 마지막 시간을 여러분들의 메모와 후기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으윽, 에세이데이 때 뵙겠네요~ ㅜ.ㅜ.

댓글 8
  • 2019-06-23 10:24

    만물제동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편 개념을 통한 존재론적 동일성이 아닌 '도추로부터 비롯하는 자화자생, 끊임없는 변화라는 점에서의 존재론적 동일'. '변화라는 ACT로서의 존재-실존'. 이런 점에서 만물은 모두 같으며, 나비와 장주 역시도 동일하다....여기까지는 들뢰즈를 빌어 어렴풋이 이해가 갈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물제동에 기반하여, 우리가 다 같은 존재이더라도 내가 장자일 때는 장자로서 최선을 다하여 살고 나비일 때는 나비로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고 하였을 때(잘 산다고 하는 것) 이 '어떤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은 무엇인가가 여전히 의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을 장자가 말해온 '양생'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가 어렵습니다....유가가 말하는 '답게' 살기와는 무엇이 다른 것인가. 이것은 다시 들뢰즈의 '-되기', 즉 여성이라도 실천해야 하는 '여성-되기', 흑인이라도 실천해야 하는 '흑인-되기'로 풀어낼 수 있을까요?

  • 2019-06-23 16:42

    제물론을 읽고 나니...

    장자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감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의 지배적인 시대정신인 유가, 묵가, 법가의 윤리학과 정치학의 한계와 혜시와 공손룡의 언어와 논리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 경험에 근거해 그 모든 것들의 전제, 존재(혹은 소리)의 근거들에 대해 탐구합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이므로 시비의 분별은 의미 없다는 혜자의 상대주의를 넘어, 도추(道樞)를 등장시켜 허무와 냉소에 빠지기 쉬운 상대주의를 넘어 섭니다. 그래서 시비(是非)를 넘어서는 더 큰 긍정(因是)을 제시합니다. 장자에게 도추라는 개념은 초월적인 도()와는 다른 내재적 도의 근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도추의 개념을 근거로 모든 사물은 고르게 균등해(齊同) 집니다. 이러한 만물제동을 근거로 물화(物化)도 가능해 지겠구나? 했는데... 문탁샘 말씀으로는 물화가 전제되었기에 제동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물화라는 것이 여러 에피소드에 나오는 장인, 진인, 신인들이 수행과정을 통해 도달하는 상태라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수행/수련/훈련을 통해 물화가 가능해 지는 것이고, 물화를 통해 제동을 경험적, 신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장자>는 정말 신체적이고 경험적인 텍스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장자는 <무엇><어떻게> 보다는 어떤 <삶의 방식/태도>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어떻게>는 그 삶의 방식과 태도가 정리된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일 겁니다. 

    그야말로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처럼...


    그런데 저는 도추(道樞)가 논리적 언어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듯한데... 신체적 경험적으로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네요.^^

  • 2019-06-23 21:39

    이번주 결석을 하게 되어 후기와 댓글을 읽으며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나 흘깃 엿보기만 합니다.

    라라샘 댓글보고 만물제동과 물화의 개념이 연결될 수 있구나 하는 감만 잡고 갑니다.^^

    명식샘 말대로 진정한(?) 되기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문탁샘께서 에세이로 한 선생님께 '엄마라는 얼굴'에 대해 써보라고 했을때 잘 연결이 안됐었는데 어쩌면 이 '되기'와 '얼굴'에 대해 연관지어 볼 수 있을 듯 합나다.

  • 2019-06-23 22:30

    나카지마 책을 읽고 장자의 철학이 더욱 심오하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장자의 무 사상은 특별합니다. 그에 의하면,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는 초월적 존재이며, 존재론적 근원자라고 합니다..  반면,  장자의 무는 근원자가 없고 이 무로부터 사물이 생겨 날 수 없다고 합니다. 모든 사물은 자생독화, 자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장자의 철학이 좀 더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 2019-06-23 23:08

    일요일에 댓글 숙제라니ㅠㅠ 힘들군요


    음~ 저는 이번 시간을 통해 '물화'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장자는 사물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사람의 생사나 화복禍福, 꿈과 생시가 모두 변화 속에 있으며 변화는 그치지 않고 

    변화의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식은 불가능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을 기뻐한다는 것이 미혹이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난 채 돌아갈 길을 잃은 자가 아닌지를 내 어찌 알겠소? 여희는 애라는 곳의 국경지기 딸인데, 진나라가 처음 그 여희를 가졌을 때는 너무 슬프게 울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실 정도였으나, 왕의 궁전에 이르러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소 돼지고기 등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처음 울고불고 한 짓을 후회했다 하오. (이와 마찬가지로) 저 이미 죽은 사람들도 처음에 삶을 바랐던 일을 후회하지 않는지를 내 어찌 알겠소?”


    꿈속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던 자가 아침이 되면 불행한 현실에 슬피 울고, 꿈속에서 울던 자가 아침이 되면 즐겁게 사냥을 떠나오.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꿈속에서 또한 그 꿈을 점치기도 하다가 깨어나서야 꿈이었음을 아오. 참된 깨어남이 있고 나서라야 이 인생이 커다란 한 바탕의 꿈인 줄을 아는 거요.”(p80~81)


    죽음의 경지는 체험할 수 없고 禍福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으며 꿈과 생시의 

    구별은 판단하기 어려우니 生死, 禍福, 不知에 관한 인간의 인식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장주가 나비 꿈을 꾸는 寓言에서는 사람과 나비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는데오히려 누가 깨어있고 누가 


    꿈을 꾸는지 분명치 않으니 그 원인을 따져보면 物化에 있다고 한다

    물화는 만물의 변화이다자는 꿈과 생시의 문제와 물화를 연관시킨다.


    대종사그저 변화를 따라 무엇이든 되고, 그리하여 (앞으로 닥쳐 올) 미지의 변화를 기다릴 뿐이다. 일단 변해 버리면 변하기 전의 일을 대체 어찌 알겠으며, 아직 변하지 않았으면 변한 뒤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 나와 너만이 (그 변화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자가 아닐까...... 또 자네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에 이르기도 하고, 꿈에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겠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어 있으며 그러는 건지, 꿈꾸며 그러는 건지를 알 수가 없지 않느냐“(p209~211)


    物化는 알기 어렵고 그래서 꿈과 생시도 분별하기 어렵다.


    모든 사물은 변화하는 과정에 있고 변화의 결과는 전혀 인식할 수 없다


    꿈과 생시도 물화이기 때문에 꿈과 생시의 구분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모든 사물이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긍정하는 이 물화의 관점으로 제물을 논증한다

  • 2019-06-23 23:16

    '제물론'과 '대종사'를 통해 장자에게 좀 더 다가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탁샘의 강의를 들을 때는 '음 ..이런 말이군' 하며 이해되는 듯 하지만,

    아직 장자의 개념들이 제 언어로 꿰어지지는 않네요.

    아마 물화가 아직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주에 '소요유'와 '응제왕'까지 읽어보고,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의 2부를 읽으면

    조금은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

  • 2019-06-25 17:44

    <장자> 원문의 진도가 말도 못하게 빨라서... 손을 대지도 안대지도 못하고 아주 어정쩡한 상태로 수업을 따라가고 있어서 매우매우 찝찝해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글만 보면 감이 잘 안잡히고, 그렇다고 한자를 보기엔 시간이 턱도 없이 부족하고..ㅜㅜ 이 속도로 제가 공부하는 방식으로 <장자>를 읽는 건 어려운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많습니다..

    이번에 읽었던<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에서 제가 저번시간에 고민했던 '선택'에 대한 힌트를 조금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 좌망을 지원은 "잊음으로써 열리는 자유"라고 표현했습니다. 선택하지 않기란 선택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에는 잘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이 끊없는 선택의 연속이 아니라, 연습과 경험을 통해 선택지를 하나하나 줄여가는 것이라고 봐도 좋을까요? 

    또 이 선택의 기로에서 자꾸 선택을 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에 발생하는 의미생성과 주체화가, 물과 같이 유연하지 못하고 도리어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의미생성과 주체화에 경직이라는 이미지를 붙이고 나니 더 잘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대부분의 순간에 경직되어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몸이 유연해지려면 호흡을 통해 조절하거나, 피치못하게 아파서 힘이 빠지거나.. 이번에 아파서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나니 온 몸에 경직되는 곳이 하나도 없어, 아무리 좋지 않은 자세로 있어도 근육이 긴장하지 않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더라구요. 

    그러나 아플 때의 유연함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반응할 수 없어서, 유연해졌음에도 계속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진정 유연하려면 세상의 풍파 앞에서도 그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유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글로 써봤는데 잘 표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 2019-06-25 19:19

    1교시 세미나 시간에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메모에 쓴 메론이 이야기를 읽지 못했습니다. 제가 메론이 이야기를 넣었던 이유는 오영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장자 철학의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을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 세미나를 하며 3종 인식에 대한 토론을 할 때에도 저는 늘 일종의 아쉬움? 불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이 일종의 단계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우리같은 보통의 인간은 도달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카히로의 해석처럼, 오히려 장자는 논리와 현실의 분리를 말하기보다, 계속해서 논리를 현실과 포개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언어가 가진 그 속성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 없이 우리는 한치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것을 '온갖 수단으로 삼아' 말하기에 장자 철학은 결코 회의주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완전히 동의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론이 이야기가 적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를 통해 우노 구니이치가 들뢰즈의 난해한 개념에 대해 말하듯 무엇보다 현실 그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시간엔 비유테의 비유와 '좌망', '잊음'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들뢰즈로 치면 <얼굴성>에서 '식별불가능함'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차적으로 이것은 기존의 편견들, 의식들, 관념들을 잊음일 것입니다. 이러한 잊음은 나아가 마른 나무처럼 되어 자기를 잊게 하고, 세상과 자기 사이의 경계를 흐트러트릴 겁니다. 마침내 나비와 장자는 차이가 없어지겠죠. 그러나 이것은 몽상이 아니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때 잊음은 갑자기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구분하고 판단하기를 멈추며 새로운 방식으로 질문하고 생각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비와 구별이 있다는 문장이 들어간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마른 나무처럼 되었던 스승에게 제자가 말을 걸면, 마른나무처럼 되었던 상태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걸까요?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가 꿈에서 깨면 장자로 '돌아오는'걸까요? 그게 아니라 마른 나무 같은 상태의 스승으로서, 나비와 하나됨을 아는 장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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