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주역> 57 중풍손 重風巽 - 바보야 바람 속에 답이 있어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영감
2019-09-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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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바람 속에 답이 있어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청량리역전 대왕코너 다방에서 '블러위닌더 윈드Blowing in the wind'가 매가리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렴구 '바람 속에 답이 있다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는 빵꾸난 교양 필수 철학개론 강의보다 내게 더 풍부한 철학적 사유를 격려해줬다. 지금 생각하니 밥 딜런도 주역을 쫌 한 것 같다. 노벨 문학상을 아무나 받나.

주역의 57번째 중풍손重風巽 괘의 물상物像은 바람이다. 그 바람이 위아래로 불고 있다. 바람을 피우다, 바람을 잡다 따위의 관용구는 사람들의 경박한 처신을 바람에 빗대고 있는데 바람이 알면 섭섭할 노릇이다. 손 괘는 가볍고 부드럽지만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바람을 하늘의 섭리에 비유하고 있다. 괘 됨을 보아도 하나의 음陰 효가 위에 있는 두 개의 양陽 효를 따르며 유순柔順함과 공손함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고전에서 겸손謙遜은 주요 도덕적 가치다. 주역에서도 지산겸地山謙 괘, 중풍손 괘 등 두 괘가 겸손을 주제로 다루었다. 지산겸 괘가 자기를 낮추는, 사람에 대한 겸손인 반면 손괘는 하늘의 섭리에 따라 뜻을 행하는, 하늘에 대한 겸손으로 대비된다. 그렇지만 천지인天地人 삼재才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래도 머리에 이고 있는 하늘의 명命과 리理를 감각하는 데는 내공이 필요하다. 나이 오십 지천명知天命은 공자님 당신의 경험이지 누구나 때가 되면 자동으로 알게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겪어봐서 안다.

'손순巽順함은 비록 좋은 도道이나 반드시 따를 바를 알아야 하니 대인을 따르는 것이 이롭다巽 小亨 利有攸往 利見大人’

‘거듭된 손巽으로 명령命令을 펼치니 重巽 以申命'

주역 중풍손重風巽 의 괘사와 단전彖傳은 ‘공손은 따르는 도리를 이르며, 군주는 공손하고도 또 공손하게 하늘의 명에 따라 정사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늘의 명을 따른다는 것은 부드러운 바람결에 실려오는 그 명을 '알아 모시는 것'이며, 맹목적인 ‘따름’이 아닌 ‘앎’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다. 곧 하늘의 뜻을 아는 도리가 손 괘의 핵심이 된다.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내려 놓고 간절하게  구해야 하늘의 소리가 들린다.

오래전에 참여했던 어떤 과정에서 해봤던 놀이가 있다. 실내에서 눈을 가리고 약 20-30 미터 정도의 통로를 맨발로 걸어서 통과하는 것이 주어진 미션인데, 가는 길 여기저기에 압정을 장애물처럼 뿌려 놓아서 자칫하면 찔리게 되어있었다. 관중들 중 더러는 술래가 압정을 피해 안전하게 가게끔 소리쳐서 도와주지만, 다른 이들은 일부러 술래를 장애물 쪽으로 유도해서 혼란스럽게 했다. 이 상황에서 무사히 통로를 빠져나가려면 여러 소음 중에서 오직 제대로 인도하는 소리를 선택해 듣고 따라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차분하게 눈을 감고 ( 어차피 눈을 가리니까 ) 기도하듯 집중하면, 진정으로 도와주려는 소리를 용케도 가려내서 한 걸음씩 무사히 내디딜 수 있었다. 고요한 자기 마음의 원형을 회복할 때 수많은 신호 중에서 진리를 감별해 낼 수 있다. 공손함으로써 하늘의 명을 듣는 원리도 그렇다.

옛날 옛적에 신이 행복을 사람의 마음 속에 감추어 놓았는데 그 때 하늘의 뜻도 거기 함께 묻었다고 한다.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는 말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하늘의 뜻이 있다는 얘기다. 중용中庸 첫 장에 나오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에서도 재확인하고 있다. 하늘의 명命이 자신의 본성本性이고 본성을 잘 따르는 것이 도道라고 하고 있다.

연약한 갈대를 춤추게도 하고 눕히기도 하는 바람을 하늘의 섭리로 비유한 손 괘를 읽으면서, 갈대보다 못한 인간에게 겸손은 생존의 필수 과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우주의 질서에 굴복할 때만 지속 가능하다. 깊은 겸손만이 높은 자존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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