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강학원> 5회차 - '축음기, 영화, 타자기' 후기

지원(길드다)
2020-05-01 14:22
269

 

 

지난주에는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의 마지막 파트인 ‘타자기’를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어렵고, 이해가 힘들다는 많은 분들의 텍스트에 대한 피드백에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 발제를 맡았습니다. 발제에서는 내용을 엄밀하게 풀기보다, 한 권을 끝낸 시점에 키틀러가 하고자 한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러프하게나마 정리해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한 주간 준비한 짧은 발제를 통해 그것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세미나에서 나눈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니, 다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또 좋은 질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기에서는 세미나에서 나온 몇 가지 질문들을 정리하고, 보충하려고 합니다.

 

  1. 매체가 인간에 선행한다?

 

키틀러의 강렬한 한 마디,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라는 첫 문장이, 당대의 모든 학자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처럼, 우리 세미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한 질문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뭔가 찜찜해…. 이거 맞아?” 일례로 키틀러는 타자기 파트에서, 역사 속에 여성적 주체성을 등장시키고 매체의 탈성화(脫性化)를 가능케 한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타자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펜을 독점한 문학적 권력, 남성성은 타자기와 여비서의 등장으로 위기에 처합니다. 쓰는 주체(남성)-읽는 객체(여성)의 직전 100년간 견고히 유지되어 온 도식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키틀러는 다른 텍스트에서 이러한 여·남의 이분적 구조 또한 18세기말~19세기 초 인쇄술 등 매체적 변화를 겪으면서 구성된 것으로 분석합니다). 이러한 위기는 가속화 되어 금세 ‘쓰기’ 자체가 탈성화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그렇다면 그 전부터 진행되어왔던 여성의 권리 투쟁이나, 여성적 주체성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 온 그러한 역사, 그리고 타자기 이후의 여성운동은 모두 부정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한편으로 맞고, 한편으로 틀립니다.

 

타자기와 여비서의 등장은 독립된 두 항 타자기/여비서의 동시적 등장이 아니라, 타자기-여비서인, 새로운 하나의 ‘기계’의 등장입니다. 세미나에서 명식이 잘 지적해 주었듯이 이것은 점진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우발적이고 단절적인 사건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른 수많은 사건들, 예컨대 양차 세계대전과 결합하며 또 다른 단절들을 생산합니다. 타자기는 인간과 분리되지 않은 채 여성-기계가 되고, 군인-기계가 되고, 또 어떤 때에는 평화-기계가 됩니다. 이때 순수한 인간적 의지, 혹은 인간적 주체성이라는 신화가 깨집니다. 키틀러에게는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매체로부터 독립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특정 매체(도구)를 취급하는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러한 매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이 전과 후의 ‘운동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적’ 운동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뿐입니다. 운동들은 언제나 존재했고, 다만 그 운동들의 형식과 방향이 매체가 열어놓은 ‘가능성’으로 인해 바뀐다고 키틀러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할 지점은 오히려 ‘왜 우리는 운동에서 특정한 인간의 형태만을 발견하고자 그토록 노력해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매체의 조건을 고려하며 현재적 운동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권리투쟁이 정체성 투쟁으로, 정체성 투쟁이 다시 탈-정체성 투쟁으로 변화하는 그 지점들에 어떤 주요한 매체적 변화들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확인하자면, 키틀러는 인간과 매체의 시간적 선후 관계, 우열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사건들이 이것들의 관계의 문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배치, 즉 관계를 사유해야합니다.

 

  1. 일기쓰기는 나쁜 것인가?

 

칼 슈미트의 ‘부리분켄’에 대한 이야기와, 지원씨가 느낀 일기에 대한 찝찝함 이야기는 재미있게도, “그럼 일기 쓰면 안되나…?”라는 식으로 넘어갔습니다. 칼 슈미트는 고은의 말처럼, 이 글을 통하여 매체가 달성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여전히 남성적 아카이빙의 원칙을 고수하는 이들 작가들을 과장하고, 풍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일기쓰기, 혹은 일기를 쓰듯이 글을, 게시물을, 기념비를 작성하는 우리 자신을 그가 겨냥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슈미트의 글은 한편으로 매체의 변화가 곧 한방에 모든 것을 바꾸어놓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책 전반에서 여러 번 인용되는 프리들랜더와 같이, 매체의 태동기에 이미 수십 년 뒤 도래할 미래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십 수 년 뒤,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거를 불러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키틀러가 이러한 인용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가 슈미트의 풍자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변화 이후에 일기라는 글쓰기의 형식은 이제 이전까지와 완전히 다른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매체 시대 이후의 일기쓰기는 슈미트가 쓰는 것과 같은 “역사에의 의지”가 아니라, 사소하고 매우 사적인, 대문자 역사에서는 무의미한, 돈 후안의 하인 레포렐로의 기록과 같은 무의미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적 기념비 혹은 공공의 기념비가 아닌, 개인적 기록들. 예컨대 1시에 약 챙겨먹기, 운동 30분, 나의 감정상태, 꿈…(프로이트!)과 같은 것들이 됩니다. 이는 의미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의미 있는 것에 포함 되는지, 무엇이 기록이 되는지.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일기가, 슈미트가 말하고자하는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원씨의 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오늘날 유효한 어떤 실천의 형식일 것입니다. 우리의 인스타그램 피드도, 분명히 그것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1. 인스타그램을 하는 이유?

 

제가 더 이상 인스타그램과 우리 자신을 분리하거나, 인스타그램이 일종의 선택의 문제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SNS는 그것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던지자,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저도 어떤 특별한 근거나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기보다는, 그냥 던져본 것이었는데요. 약간의 비약이 있더라도, 오늘날 우리의 물질적 조건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마트폰과 SNS가 구성하는 ‘물질성’, 그리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인식하게 하고, 실천하게 하는가를, 우리 자신을 키틀러가 언급하고 있는 20세기 초와 달리 어떤 ‘인간-기계’로 형성하고 있는가에 대해서요.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986년에 쓰여진 <축음기, 영화, 타자기>는 컴퓨터로 끝을 맺지만, 매체는 그 이후, 그 전 100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수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남은 영화와 위베르만의 텍스트를 본다면/ 전 텍스트인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이 담은 현재적 현상들을 생각해본다면, 또 달리 보이는 많은 것들이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시작된 연휴 여유롭게 즐기시고, 모레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댓글 3
  • 2020-05-01 14:31

    일기를 다시 한 번 써보겠습니다 오늘부터

    • 2020-05-01 14:59

      ㅋㅋㅋㅋ.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지.

      • 2020-05-01 18:00

        괜히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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