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이 별건가> 야행성개선프로젝트 12시엔 자기 5회

둥글레
2020-07-13 23:27
428

이전 글에서도 토로한 것 같지만... 난 꾸준하게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 아니 하기 싫어한다. 내키는 대로 하는 걸 좋아한다. 학교나 회사라는 틀 속에 있을 땐 그 틀이 요구하는 규칙 안에서 최대한 내 멋대로 살았다. 공부도 내가 잘하고 싶어서 했지 누가 시켜서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시험공부는 늘 벼락치기였다. 회사 다닐 때는 회사 일이 우선으로 배치되다 보니 일상은 점점 엉망이 되었다. 건강도 안좋아 졌다. 회사에서는 정해진 목표만 달성하면 내 일상이 엉망이든, 내 건강이 좋든 나쁘든 상관하지 않는다. 물론 학생 때도 성적이 좋아서인지 아님 문제를 안일으켜서인지 모르지만 아무도 내게 뭘 고치라 마라 간섭하지는 않았다. 난 성과로 모든 걸 무마하면서 살아왔다. 

 

지난주 함백으로 걷기 캠프를 위한 답사를 다녀왔다. 운탄고도 길을 도합 30킬로 정도를 걸었다. 반정도 걸었을 때 왼쪽 발의 네 째 발가락이 아파왔다. 오랫만에 너무 많이 걸었다. 지속적인 마찰로 겉피부가 분리되고 그 사이에 물이 차올랐다. 물집이 생겨 너무 아팠다. 결국 친구들에게 물집이 생긴 것 같다고 좀 쉬어가자고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먹기 좋은 장소를 찾아 앉아서 점심으로 싸온 주먹밥과 과일을 먹었다. 점심 후 난 아파도 참고 더 걸어갈 참이었다. 기린이 더 걷고 싶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린이 여기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속으로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런데 문제는 온 만큼 다시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간에 어디로 샐 곳이 없는 높은 산을 가로질러 닦아 놓은 길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오른 다리 오금이 아파왔고 오른 발의 발가락도 물집이 잡힌 것 같았다. 기린이 주워 준 나무 막대에 의지하며 걸었다. 우린 푸코를 공부했다고 이거야 말로 ‘아스케시스(고행, 훈련)'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도중에 기린이 새털에게 논어의 학이편을 암송하며 뜻풀이를 해주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걸 들으며 걷다보니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암송이 빛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난 주모경을 외워볼까 했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포기했다. 일본어 세미나에서 읽은 하루키 책에는, 철인경기에 참여 하는 사람들이 힘들 때마다 외우는 각자의 만트라가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힘든 순간 암송할 수 있는 구절을 준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비재 초입에 다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맨발로 좀 걷다, 기린과 새털이 차를 가지고 오기로 하고 난 주저앉아 기다렸다. 숙소에 도착해 네 발가락에 생긴 물집을 터트리고 소독하고 자운고를 발랐다. 다음 날 약국에 가서 무릎 보호대와 파스를 샀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한의원에 들어가 침도 맞았다. 이틀이 지나니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난 걸으면서 다리가 아파서 못걸었던 적은 없는데! 했지만 그건 요행이도 내 다리가 튼튼한 편이기도 했고 그땐 젊었다. 어릴 땐 성과로 몸뚱이로 뭐든 무마했지만 꾸준함이 없었던 몸은 무엇으로도 무마할 수 없었다. 매일 걸어서 문탁에 오고 일주일에 한 번 등산을 하는 기린은 끄떡도 없었다. 새털은 나와 기린의 중간 정도였다. 

 

 

 

 

학교 때 얘기로 돌아가면, 오빠와 나는 스타일에 있어서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오빠는 ‘맨투맨’이라는 10권짜리 영어책을 10번 이상 반복해서 공부했다. 나는 극도로 반복을 싫어해서 맨투맨도 봤다가 성문종합영어도 봤다가 새로운 책을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결과는 뻔했다. 오빠는 영어를 아주 잘했고 나는 잘하는 편에 들었다. 잘하는 편에 들어가는 게 나에게 좋은 게 아니었다.

 

반복이 만드는 기적을 경험한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내 생활에는 루틴이랄 게 없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은 내 필요에 의해 또는 내 기분에 따라 왔다갔다 했다. 사실 난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는 내 일상을 잘 조절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자유란 자신의 정념(기분)이나 표상에 따라 휘둘리지 않는게 자유이다. 즉 자기를 지배할 줄 아는 만큼 자유롭다. 능동성이 자유인 것. 그런데 이런 능동성은 자연의 빛인 이성에서 온다. (이성의 시작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공통관념이고 ㅋ).

 

도담샘의 <<양생과 치유의 인문의학 동의보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를 자연과 연결시키면 나의 생명은 본래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나는 자연에서 빌린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잘 써야 하고, 쓰고 나면 잘 돌려주어야 한다.” 내 몸이 내 것이라고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주체적’인 게 ‘능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가 아닐까 싶다. 좀 더 이성적이 될 때, 능동적이 될 때, 그럴 때만 주체는 잠깐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빌린 존재인 나를 잘 사용하고 잘 통치할 때 그 순간만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성과로, 젊음으로 포장된 난 더 이상 없다. 운탄고도 길을 걷고 비로소 벌거벗은 내 모습을 본 것 같다. 기본적인 자기관리 없이는 ‘양생’ 할 수 없다. 강박적이고 중독적인 의무가 아닌 자기 지배 또는 자기 수양으로서의 루틴을 내 생활에 배치해 봐야겠다. 늦어도 12시엔 잠자리에 들기 그리고 7시엔 일어나기. 다시 시작한다. 양생이 별건가? 별거 아닌거를 고치려니 별거다!!!

 

p.s. 그동안 기린샘 보고 의지적 인간이라며 뭐라뭐라 했었다. 뭘 그리 용을 쓰며 사느냐고. 운탄고도에 다녀 온 글을 쓰고 있노라니 기린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도움이 그녀의 매일 매일의 수양에서 온 것들이었다. 돌아가자고 발심하고, 나뭇가지를 주어 주고, 논어 낭송으로 내 정신을 사로잡고, 물집 땜에 고통스러워 하니 신발을 벗으라 한 것도, 소독약이랑 밴드를 사다 준 것도 모두 그녀의 공부와 일상에서 온 '힘'이 바탕이었다. 땡큐! 기린샘~   

 

댓글 4
  • 2020-07-14 07:50

    엽기 소나무에서 찍은 인문약방 생맥산 씨에프 둥글레 감독이 없었으면 못 찍었다는 거 알죠^^?
    내가 그 씨에프를 찍으며 왜 그렇게 박장대소를 했냐면...
    맨 정신으로도 그럴 수 있는 내가 너무 웃겨서 이기도 했어요.
    인문약방과 함께 하는 재밌는 친구들 덕에 나도 맨정신으로도 웃길 수 있는 경험을 한 여행이었다우^^
    웃기는 일 또 합시다~~~그려

  • 2020-07-15 12:58

    그 씨에프에 이런 기나긴 사연이 있었네요~
    새기둥 응원합니다~~!!^^
    둥글레샘의 루틴만들기도 응원해요~!^^

  • 2020-07-16 09:46

    별거 아닌걸 고치려고 하니 별거!!! 가 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루틴한 것이 한개도 없으면서
    저번주에 기린쌤의 용맹정진!이란 구호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을 ....
    반성합니다 ~~

    • 2020-07-16 18:23

      용맹정진~ㅎㅎ기린샘하고 너무 잘 어울려요~
      에세이로 인해 싱숭한 마음을~여기서 힘을 얻네요~
      용맹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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