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미니에세이① - 철학 학교 임차인에서 제자로 (정의와 미소)

문탁
2020-07-24 12:04
343

 

 

임차인은 언제쯤 삶의 주체이 될 수 있을까?

 

인문학이라는 것은 내 삶에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밖에는 내 생각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를 않았다. 남들 따라 대학을 가고 회사에 취직하여 일을 하고 회사를 옮기고, 승진을 하고, 그러다가 누구나 겪듯이 삶의 고비가 찾아왔다. 항상 매출에 스트레스를 받고,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해 본 적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나라는 존재에게 남은 것을 없는 것 같았다. 친한 동료는 우리들은 결국 단물 빠진 오렌지처럼 시들해져서 회사를 떠나게 된다면서 회사를 떠나버렸다. 그 시점에 회사에서는 당시에 사회의 인문학 열풍에 편승하여 느닷없이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여 바쁜 업무 시간에 철학 강의를 듣게 했다. 어쨌든 간에 인문학은 나를 위로함과 동시에 흔들어 결국은 회사를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주의에 상처받은 나를 치유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인문학을 밤마다 공부하러 다니는 그 시절의 나를 되돌아보니, 철학 강의가 있는 곳의 자리를 임대한 임차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저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그 사실이 내겐 중요했던 것 같다. 진실을 말하기 위한 로고스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 사실 그게 뭔지도 잘 몰랐기도 했다. 그런 임차인으로 지내다가 어느 날 내게 푸코가 찾아왔다.

 

 

 

 

인문학이 좋다고 가족들을 끌어들인 건 나인데 다시 공부라는 걸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은 우연과 필연의 연속이라더니 우연처럼 푸코가 궁금해졌고, 문탁에서 마침 양생프로젝트이라는 신박한 프로그램으로 푸코를 공부해보라는 권유에 이제야 또 시작이다. 코로나 19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는 모두에게 어려움을 주었지만 다른 곳에 관심을 둘 곳 없어 특별한 일 없이 빠지지 않고 푸코를 공부하러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것은 또한 나를 비롯하여 공동체란 어떤 의미이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만들어 주었다. 양생 프로젝트가 다루는 주제를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까지 한 걸 보면 어쩌면 철학 학교 제자가 될 수 기회를 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 배려를 아는 철학 학교 제자되기

 

주체란 무엇인가?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 주체화, 파르헤지아 ... 처음에는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많았다. 언어도 익숙하지 않았고 분명 국어인데도 이해가 안 가서 내가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나름 노력도 했지만 무엇보다 푸코가 너무 어려웠다. 공부를 해나가면서 철학 학교 임차인처럼 공부했던 시기와는 분명 다르게 공부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제자처럼 공부하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일까? 나는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어떤 실천을 통해 그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를 탐구했던 푸코의 자기 배려를 통해 철학 학교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해 보려고 한다. 우선 BC 5세기에서 AD 5세기의 그리스와 로마 시기에 약 천 년간 지속된 자기 배려, 그것은 일종의 attitude이다. 자기 배려는 사물을 고려하는 방식, 세상에서 처신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과도 같은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melete이다. 자기 배려는 자신의 시선을 변화시키는 것, 즉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하여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리의 사고 속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자기 배려는 일종의 액션이다. 자기 배려는 항시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다수의 행위를 지칭하는데 이 행동들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형하고 변모시킨다. 바로 여기로부터 일련의 실천들, 명상의 테크닉, 과거에 대한 기억술, 의식 점검의 테크닉이 기인했다.

 

이러한 자기 배려는 보편화를 통해 자기 수양이라는 문제계가 출현했고, 자기 수양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테크놀로지는 자기인식과 아스케시스가 있었다. 자기 인식은 자기를 대상으로 삼는 인식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지식이 주체 안에서, 주체의 경험 안에서 주체의 구원을 위해 일정한 영적인 형식과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하나로 자기실천인 아스케시스 askesis는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떤 한도 내에서 진실을 인식하고 말하며 실천하고 수련하는 것이 주체에게 행위하게 해줄 뿐 만 아니라 또 존재해야 하는 바대로, 또 존재하기를 원하는 바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지를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즉, 아스케시스는 진실의 실천을 통해 주체를 최종적인 목표로 구축하기였다. 이런 아스케시스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paraskue를 구축하기가 있었다. paraskue를 만드는 임무는 고행이 담당했는데 이는 기독교적인 고행과는 다른 철학적인 고행이었다. 철학적 고행, 자기 실천의 고행에서 생의 기술과 삶의 기술의 목적이자 대상인 자기와 만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우리가 아는 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우리가 듣는 참된 담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철학적 전통이 우리에게 참된 것으로 전승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즉, 참된 담론의 주체화 절차이다.

 

 

 

그 당시 참된 담론의 주체화로 이행되는 고행의 형식에는 경청, 독서, 말하기가 있는데 여기서 경청하고 적절하게 들을 줄 알기, 적절히 읽고 쓰기, 적절히 말하기 이런 참된 담론의 고행적 실천이 늘 동반해야 하는 항구적인 근간이었다. 가장 정념적이면서 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접근로인 청각의 양의성으로 인해 경청의 수동성 문제를 지녔고, 이로 인해 덕과 영혼에 대한 logos 의 작용시 일종의 자동성으로 인해 주체에게 이식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마치 양지에 앉아 있으면 피부가 갈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강의에 들어가면 철학에 젖게 되는 것처럼 나도 양생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조금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예전에는 세네카가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청각의 수동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철학 학교에서 어떤 이득도 취하진 못한 제자나 학생이 아닌 하숙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비단 그것 뿐 만은 아니었다. 자기 배려가 결여되어 있었고, 자기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자기 수양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기로의 전향이라는 테크놀로지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기 실천, 아스케시스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자기 배려를 알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나를 배려함으로써 실천해야 될 것 들이 많아졌다. 역시 철학 학교 제자가 되는 길이 고행길이 하는 생각도 함께 든다. 굳이 내가 이래야 하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같이 공부하는 동학들이 힘들어도 여전히 공부를 해나가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걸까, 그게 로고스인가 ...

하지만 그래도 자기 배려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기 위해 공부를 계속해 나가려고 다짐해 본다.

 

 

 

자신만의 삶의 테크네를 지닌 제자로 변모하기

 

푸코는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글쓰기, 독서의 기술, 자기 실천이나 사유와 표상의 점검 기술, 자기 인식의 기술 등과 같은 다수의 기술들에 의해 고안되고 구축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들을 통해 자기와의 한정된 관계가 설정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만의 어떤 삶의 테크네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글쓰기나 독서 등 테크네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철학적 고행의 실천으로는 아직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해 버렸다. 부끄러운 마음이 든 것은 바로 그런 삶의 자세 때문이었던 것이다.또한 임차인에서 제자로 변모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담론을 아는 대로 실천하기이다. 고행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철학적 고행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찐 제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는 테크네를 지닌 사람으로 말이다.

 

 

 

“자신의 삶을 테크네의 대상으로 삼는 것,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은

테크네를 사용하는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필연적으로 전제합니다.”

 

댓글 1
  • 2020-07-27 12:13

    정의와 미소님^^ 임차인에서 찐재자로 함께 가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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