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프로젝트] 소학읽고 인싸되기 ⑶ 프로 따라쟁이

고은
2019-05-14 14:38
419




* [보릿고개 프로젝트]는 춘궁기를 겪는 청년들이 길위기금에서고료를 받고 연재하는 글쓰기 프로젝트입니다

   다섯 명의 청년들이 매주 돌아가며 세 달 동안 저마다의 주제로 세 개씩의 글을 연재합니다글은 매주 화요일에 업로드됩니다!




고은의 보릿고개 프로젝트, 소학읽고 인싸되기 




프로 따라쟁이

 

 







 




  2019년 5월 2일 목요일

  길드다에 제품 진열장이 필요해서 멤버들과 함께 나무에 칠을 했다. 김목수는 얼룩덜룩 칠을 하는 우리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다가, 결국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나무에는 깔끔하게 옷이 입혀졌는데, 오히려 칠하는 김목수는 여유로워 보였다. 어설프게나마 그를 흉내 내내보았다. 붓을 가깝게 잡고 중앙에 골고루 펴 바른 뒤, 힘을 주고 모서리 쪽으로 붓을 튕기듯 물감을 밀어내고, 중간 중간 물감이 굳기 전에 전체적으로 결을 따라 길을 내준다. 그를 따라하려면 붓질 한 번에 공을 들여야만 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이러다 꽤 멋진 목수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20살이 되고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부정했던 건 선생이라는 존재였다. 학교에는 존경받는 선생님보다 존경받지 못하는 선생님이 훨씬 많았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학생들을 대했다. 물론 나는 때때로 학교 선생님이 정말로 필요해서 찾아가기도 했다.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 헷갈릴 때나, 병결 처리를 하고 싶을 때 말이다. 학창시절엔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성인이 되고 보니 선생님에게 기능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건 꽤나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교수님을 찾아가거나, 영어를 배우러 원어민 선생님을 찾아간다. 그 이상의 관계를 맺는 일은 없을뿐더러,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는 듯하다. 




 독서는 하지만 공부는 못하는 사람들 



  『小學』에는 어렸을 때 유모를 들이라는 구절이나 10살이 되면 아버지의 친구에게 찾아가 배우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를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에도 어렸을 때부터 선생에게 공부를 배웠던 듯하다. 하지만 선생에게 배우는 내용에서는 오늘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明道程先生曰 憂子弟之輕俊者 只敎以經學念書 不得令作文字 子弟凡百玩好皆奪志 … ≪二程全書≫〈遺書〉

명도선생이 말했다. “제자의 경솔하고 재주가 뛰어남을 염려한다면 단지 경서를 소리내어 읽도록 가르칠 뿐, 글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온갖 잡스런 것들을 즐기고 좋아함은 모두 학문에 대한 뜻을 빼앗는다. …”

  그 당시에도 어렸을 때엔 셈법이나 지역 이름, 음악, 시, 무예와 활쏘기를 배우고 경서를 읽었다. 만약 기술이나 경서를 익히는 것이 중요했다면 능력이 출중한 제자가 그 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을 것이다. 오늘날 언어능력을 갖춘 학생에게 영어를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명도선생은 글쓰기란 공부하는 선비들에게 가장 중요한 배움이라고 말하면서도, 능력이 너무 출중하여 경솔한 자라면 글쓰기를 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오히려 그것이 공부에 대한 뜻을 앗아갈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기술이나 경서를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小學』에 하나 나온다. 공자의 제자로 유명한 증자에겐 공명선이란 제자가 있었다. 공명선이 증자에게 공부한지 3년이 지나도록 책을 읽지 않자 증자가 물었다. “아니 너는 나의 문하에 3년이나 머물러 있었으면서, 도대체 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공명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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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대신 보드게임을 한다고 꼭 공부를 안한다고 볼 수 있을까? (→궤변)



公明宣曰 安敢不學 … 宣 見夫子之應賓客 恭儉而不懈惰 宣이說之 學而未能 … 宣 安敢不學而居夫子之門乎 ≪說苑≫〈反質〉

“어찌 감히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 저는 선생님께서 손님을 접대하실 때를 눈여겨보았는데 선생님께서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조금도 나태하거나 태만한 모습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좋아해서 배우고 있지만, 아직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 제가 어떻게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공명선은 비록 책은 읽지 않았으나 공부만큼은 열심히 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당대에 독서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에 공부한다는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느냐 하는 것이다. 공명선이 공부했던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증자가 보였던 태도였다. 공명선은 증자가 부모님 앞에 있을 때, 손님을 맞이할 때, 직장생활을 할 때(조정에 나아갈 때)의 태도에 감명 받았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였다. 공명선이 배우고자 했던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비근(卑近)한 일이다. 땅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낮고, 일상과 아주 가깝다. 그러나 때로 비근한 공부는 닿기엔 높고, 깨닫기 어렵게 멀리 있는 이치, 즉 고원(高原)한 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앞서 인용했던 명도선생은 공부하는 자들이 삶과 가까운 것을 버려두고 경솔하게 위대한 척해서, 결국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오늘날이라고 명도선생의 비판을 쉽게 피해갈 수 있을까? 자신의 일상을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면서, 철학자의 책읽기를 좋아하고 다른 대상을 분석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小學』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이들에게 공부란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어떤 자세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따라서 공부란 공명선처럼 상황에 따른, 관계에 따른 태도를 공부하는 일이다. 또 동시에 명도선생의 비판처럼 멀고 높은 곳을 향해가는 자신을 일상으로 끌어내려 바닥에 붙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공부하는 이가 많지는 않기에 독서하는 사람을 다 공부한다고 할 수 없고, 독서하지 않는 사람을 다 공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는 주제가 『논어』에서부터 오래도록 다뤄졌던 것이다.







 멋진 선생과 멋진 나 



  선생에게서 자세를, 마음가짐을 배운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자면 조금 낯설에 느껴질지도 모른다. 대개 학교나 학원에서 선생은 지식의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식 전달자와 하달자, 혹은 행정 처리를 하는 사람과 행정 처리를 요구하는 사람 이상의 관계를 맺었던 선생님이 존재할지 모른다. 나에게도 학창시절의 은사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선생님이 있다. 

  고등학교 풍물동아리의 부장이었던 나는 앞장서서 동아리를 이끌었다. 동아리는 교내에서는 최대 규모였고 외부에서는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고 있었던 터라 나는 더욱 조바심을 냈다. 동아리의 싸부님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나를 조용히 불러 말하셨다. “앞서서 끌고 나가는 게 아니라, 맨 뒤에 서서 뒤처지는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게 너의 역할이야.” 나는 싸부님을 보면서 잘하는 게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앞장서서 빛나는 것보다 뒤에 서는 것이 더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부원들에게는 긴장하지 말라며 “즐기자” 말했지만, 정작 나는 즐기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조화롭게 어울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나는 멋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어. 세상에 멋진 사람이 많지는 않잖아?” 어떤 면에서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길드다 멤버들을 오랫동안 만나왔지만, 이들을 멋지다고 생각한 시간 보다 밉다고 생각한 시간이 더 길다. 길드다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멤버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싸부님에게서도 장단점을 모두 발견할 수 있었고, 싸부님이 완벽하게 멋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은사님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건 아니었다. 멋지기만 한 사람을, 선생으로 모시고 싶을 만큼 모든 면이 뛰어난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 뛰어난 사람이나 더 부족한 사람이 있다기 보단, 누군가의 뛰어난 모습과 부족한 모습이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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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놈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선생으로 모실만큼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선생으로 모실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이다. 얼마만큼이나 누군가의 뛰어난 모습을 발견해내고 거기에서 감화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에게 달려있다. 누군가의 별로인 부분을 찾아내서 그 사람을 구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나고, 누군가의 멋진 부분을 찾아내서 그 사람을 선생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나다. 물론 쉽지는 않다. 답답하고, 이해가 안 되고, 나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도처에 널려있다. 아무리 멋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종종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선생으로 모시는 나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그래도 이왕 사는 김에 구린 사람들과 사는 것보단 선생들과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從於先生 不越路而與人言 遭先生於道 趨而進 正立拱手 ≪禮記≫〈曲禮〉 

선생을 따라 걸을 때 길을 건너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길에서 선생을 만나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바르게 서서 자신의 두 손을 포개는 공수자세를 취한다. …

  『小學』에서는 선생님을 공경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지금 보기에 조금 불편할 수 있는 이런 문장들은, 누군가를 선생으로 여기기가 쉽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남긴 나름의 노하우가 아니었을까? 공경하는 행동이, 구체적인 일상의 기술이 중요한 건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행동에 따라 마음이 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小學』에 나오는 공경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행동을 취했다가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터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역시 일상적에서 공경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충분히 상대를 선생으로 모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길드다 멤버들이 흘리고 가는 것들을 챙기고, 그들을 대신해 밥상을 차리고, 하고 있는 일이나 관심사에 대해 물어보았다. 멤버들을 공경히 대하려는 시도들은 내가 가졌던 못나고 독한 마음을 빠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음을 다르게 먹고 나면 그에게서 배울만한 점을 찾아내고 선생으로 생각하게 되는 일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 좋지 못한 감정이 생길 때면, 남몰래 그 사람을 위한 행동에 시간을 들이곤 한다.







 프로 따라쟁이 



  누군가를 선생님으로 삼고 싶다고 마음을 내더라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하면 관념으로 그치게 될 수도 있다. 『小學』에는 공부 방법도 몇 가지 소개되고 있다. 그 중 선생님에게 배우는 공부 방법은 간단하다. 선생님의 곁에서 지내는 것이다. 이는 상대에게 지식을 전달받거나, 일방적으로 수혜를 받는 방식은 아니다. 앞서 소개했던 공명선만 보더라도 어떠한 지식의 사사 없이도 증자에게서 공부를 했다고 하지 않던가? 공명선은 증자의 곁에서 그가 손님들에게 공손하고 검손한 모습, 나태하지 않은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있다(學)고 표현했는데, 공명선은 증자의 모습을 따라했을 것이다. 이때 따라한다는 것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아니다. 어설프게나마 비슷한 행동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 患隋唐以來 仕進 尙文辭而遺經業 苟趨祿利 … 信其師說 敦尙行實… ≪宋名臣言行錄≫

… (안정)선생은 수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벼슬을 하려는 사람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시부 같은 글 짓는 것만을 숭상하고 경서 공부는 버려두며, 구차하게 녹봉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근심하였다. … 그들[제자들]은 선생의 말을 믿었으며 행실을 돈독하게 닦았다.

  김목수가 나무에 페인트 칠을 하는 모습을 아무리 봐도 나는 김목수의 붓질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다. 팔 근육이 다르고, 키도 조금 다르며, 무엇보다 경험치에서 차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설프게나마 김목수와 비슷한 시도를 해보면서 나에게 맞는 붓질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느린 속도 때문에 페인트가 굳을까봐 페인트의 양을 늘리고, 부정확한 붓질 실력과 부족한 힘을 보완하기 위해 등과 배의 힘을 더해 칠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무에 페인트 칠을 할 때 ‘왜’ 집중해야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팔은 몸통을 중심으로 콤파스처럼 원을 그리며 움직이지만, 나무결은 일자로 나있다. 따라서 결에 맞춰 칠을 하는 과정은 습관적인 내 움직임에 변칙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나무의 결과 표면의 까칠함, 페인트를 먹는 정도를 확인하며 나무를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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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은 다 칠하고 난 뒤, 판자 주변부에서 붓에 힘을 주며 밀어내는 중이다.



  누군가를 따라하는 일은 ‘왜’라는 질문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나와 이질적일수록, 의아하거나 불편할수록 그 행위의 이유를 묻게 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하는 거지?”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은 선생이 내주지 않는다. 설령 누군가의 자세나 마음가짐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곧장 익힐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것을 어설프게 행하는 사람을 “~를 글로 배웠구나”하고 놀리지 않는가? 답은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다. 몸으로 익히는 일을 먼저 하고, 답은 그 과정에서 혹은 그 후에 얻을 수 있다. 오랜 시간동안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지난한 과정은 쉽게 정보를 얻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답답함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효과만큼은 확실하다. 몸에 붙어 그 감각을 한 번이라도 느끼게 된다면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즉 누군가를 선생으로 삼는다는 건 새로운 감각을 익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선생으로 삼아, 상대에겐 낯선 나의 감각을 익히게 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상대의 감각이 나에게 낯설게 다가올수록, 내가 새로운 감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수록 나의 행동을 돌아보고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익힌 것이 나에게 있고, 또 나에게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로 옮아갈 수도 있다. 더 이상 나의 행동은 나만의 행동이 아니고, 나 자신 또한 나만의 자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를 선생으로 모시는 일은, 또 누군가의 선생이 되는 일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체화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댓글 2
  • 2019-05-14 21:02

    우리 작년 함께 서당 선생했지.

    아이들을 보고 늘 웃고 있는 너를 보며 생각했지.

    처음엔 "아휴 제는  이렇게 아이들이 떠들고 있는데 왜 야단을 치지않는거야?"라고.

    그런데 아이들 한마디 한마디에 호응하고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너를 발견했지.

    그리고 는 나도 조금씩 유연해지기 시작했지.

    눈에 힘을 빼고, 선생이라는 각을 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관계를 만드는 것... ...

    고은이도 내게 좋은 선생이었어. ∧∧

  • 2019-05-15 16:49

    친구들과 어떻게 공통 감각을 만들까? 에

    '따라하기', '선생님으로 모시기'의 방법을

    <<소학>>에서 찾은 거 같구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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