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2회] 홍대에서 발견한 동굴의 비유와 서점 리스본

새털
2018-06-26 06:36
1543

[플라톤이 돌아왔다 2회]

홍대에서 발견한

 동굴의 비유서점 리스본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새털 프로필02.jpg

:  새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홍대에서 발견한 동굴의 비유

뉴스타파 김진혁피디가 2015년에 만든 미니다큐 <꼰대와 선배>에서는 엔하위키 미러를 인용해 꼰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보통 자기 세대의 가치관으로 시대가 지났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아랫세대의 문화나 행동에 태클을 걸면 꼰대질한다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 다큐를 찾아보게 된 것은 같이 일하는 젊은이에게 선생님 꼰대 같아요.”라는 말을 듣고 난 후였다. “그래 나 꼰대야. 그래도 이렇게 불성실하게 일 안하고 변명하는 건 네 잘못이야!” 라고 윽박질렀지만, 내심 놀라기는 했다. 나는 꼰대인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꼰대질인가? 지적을 세련되게 해야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인가? 문제는 시대가 지났음을 인정하지 않음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아랫세대의 문화나 행동에 있다. 나는 시대변화에 둔감해서 젊은 세대의 행동을 제대로 독해할 줄 모르는 꼰대인가?

내 주변에는 꼰대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외모에 관심이 많아진 딸들이 아무렇지 않게 머리색을 바꾸고 들어오면, “안 돼!” 남편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하지 못하면서도, 노랑머리는 안 되지만 갈색머리는 괜찮다는 근거 없는 기준을 들이대 더욱 딸들의 빈축을 샀다. 남편과 딸들의 전선에서 타협은 불가능했다. 염색은 물론 타투도 안 되고, 피어싱도 안 되고, 비혼(非婚)도 안 된다는 남편의 강경한 쇄국정책에 대해 딸들은 입씨름도 하지 않았다. 아빠의 취향을 존중하겠으니 본인들의 취향도 존중해달라는 매너 있는 무시였다. ‘갓띵작’ ‘치맥각등등 딸들과 눈높이를 맞춘 대화를 위해 급식체(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감성이나 말투)를 연습하는 남편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유행어를 학습으로 익혀야 하는 순간이 왔다면, 그건 그냥 아재개그급식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연히 들른 홍대에서 나는 나도 꼰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공연장을 찾아가던 중, 나는 홍대 뒷골목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되었다. 그곳의 지리는 낯설었고, 그곳을 오고가는 젊은이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공기도 달랐다. 도로엔 거대한 편집샵들이 포진해 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젊은이들이 사먹는 길거리표 간식조차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지갑에 카드 한 장 달랑 들어 있던 나는 버블티나 크레페 같은 것을 사먹지 못했다. 현금인출기를 찾으려면 옷, 화장품, 액세서리, 타로점 가게로 꽉 찬 골목길을 빠져나와야 했고, 내가 미로와 같은 그 길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곳곳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출입금지의 표시들이었고, 그것은 젊은이들과 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내가 옛날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나만의 동굴에 콕 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체감했다.

플라톤은 <국가> 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지식이 사실은 무지에 가까운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종종 동굴에 갇힌 자신과 만난다. 명품지갑이 멋져 보이는 이유가 디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브랜드로고 때문이고, 내 친구의 씨바와 팟캐스터 김어준의 씨바는 다른 뉘앙스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건 그냥 김어준의 있어 보이는 말빨때문이다.

    

 2회 03.jpg

 

 

 

2. 플라톤행 열차는 동굴의 비유역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연극의 무대와 같은 세트를 보여준다. 동굴이 있고 동굴의 입구엔 횃불과 물건들이 놓여있는 단상이 있다. 사람들은 동굴의 입구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결박되어 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평생 이러한 조건 속에 살고 있다면, 이들에게 그림자(가상/환상)’의 세계는 완벽한 현실세계이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세계의 진위(眞僞)를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년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꼰대일 리 없다는 콩깍지가 씌었던 나처럼, 그림자의 세계를 현실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나 진실이 아니라 가상이나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동굴의 비유를 좀 더 살펴보자.

누군가 우연히 결박이 풀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벽으로부터 몸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을 더듬어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걸어가게 된다면, 자신이 봐오던 것이 동굴 입구의 횃불과 물건들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동굴 밖에 이르게 된다면 횃불이 아니라 태양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쉽지 않고 짧은 시간에 끝나지도 않는다. 동굴 속 어둠에 익숙한 자에게 동굴 밖의 밝음은 시력을 잃게 할 수도 있다. 그가 실명하지 않고 태양의 빛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갑자기 눈을 떠서는 안 되고 천천히 태양의 밝기에 눈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이 과정을 천천히 익힌다면 태양의 빛을 똑바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방법을 설명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플라톤은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을 다시 동굴 안으로 들여보낸다. 올바른 인식의 기쁨을 느낀 자가 있다면, 그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자신의 동료들과 그 기쁨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윤리의식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스토리가 동굴의 우화 속에 겹쳐진다. 모든 스토리에 반전과 갈등이 빠질 수 없듯이, 동굴로 돌아온 자에게도 위기와 갈등이 기다리고 있다. 평생 동굴의 벽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들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동료의 말을 쉽게 믿기는 어렵다.

 

 

위쪽으로 올라가더니 눈이 상해서 돌아왔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지. 쇠사슬을 풀어주며 위쪽으로 데려가려는 자는 잡아 죽일 수 있으면 모조리 죽여야 해.”(<국가> 7517a)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되돌아온 자는 현실 속의 소크라테스를 떠오르게 한다. 대중들은 과연 철학자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철학자는 과연 현실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철학과 정치와 윤리가 분리될 수 없는 난제(難題)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굴의 비유는 <국가>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인식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해법, 그리고 현실과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철학자의 운명과 윤리적 태도까지 동굴의 비유에는 플라톤이 해결하고자 하는 철학적 난제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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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7
  • 2018-06-26 14:37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는 꼰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20대가 있듯이 새털이 다른 꼰대로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아, 리스본에 가고싶다.

  • 2018-06-26 15:49

    새털 선생님 글을 읽다보니 훌~쩍 홍대 앞에 가 있는 기분이네요.

    분명 길을 잃을텐데...

    걱정은 훌훌 털어내고 한번 가보고 싶네요~

  • 2018-06-26 17:33

    미디어가 밝혀주는 '힐링'의 동굴에서 나가겠다는 마음을 내기에는

    그 '힐링'의 힘이 너무 셀 때^^

    '플라톤이 돌아왔다'의 이 문장을 떠올렸으면 좋겠네요^^

    " 스스로가 쾌락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무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든 질문, 무지를 해결하면 정말 유혹을 물리칠 수 있나요? 새털샘? ㅋ

    • 2018-06-27 08:01

      무지의 해결에 평생이 걸립니다^^

      주자처럼 공부하세요

  • 2018-06-26 23:27

    별밤?

    그런데 저희 애들은 어렸을 때 뽀로로 밴드를 붙이기만 하면 모든 통증이 사라지던데요.;;

    (열나면 이마에 붙이던데...ㅋ)

    • 2018-06-27 08:06

      최강희의 야간비행 장윤주의 옥탑방고양이 이현우의 음악앨범 등등이요^^

  • 2018-06-27 16:55

    문탁샘께서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읽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시더라구요.

    에세이를 쓰려고 낑낑거려도 안되서 새털샘의 훌륭한 글을 읽어봅니다.

    캬~ 글 잘 쓰신다고 느끼면서....

    덤으로 플라톤의 동굴도 알게 되고

    용인 촌놈이 홍대로 나가 볼까 생각도 해봅니다^^

  • 2018-06-27 19:41

    ㅋㅋㅋ즐거운 홍대 나들이 되셨나용..~

    꼰대인정했네... 나의 공주티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놀 줄모르는사람...

    서점 리스본 너무 예뻐서 좋았는데 그전에 다시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반성하겠습니다.... 독서를... 해보겠습니다....

    그리고전새털쌤딸입니다...

    • 2018-06-28 12:18

      만화 잘 보고 있데이~

      새털은 괜찮다고 잘 안하는데 왜 새털딸은 괜찮다를 남발하고 살까?

      ㅋㅋㅋ

      궁금하신분들은 감자전 인스타로 가보시오...

  • 2018-06-27 23:18

    어렵다던 플라톤의 국가가 침 잘 읽히네요~^^

    뜬금없는 질문인데...

    장사가 이윤을 내지 못하여 가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고 신용 불량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현실적 제약 속에 있는 동굴 속 사람도 있을터인데... 그들에게 철학이 들릴까?? 의심도하며..

    문득 니체로 철학이라는 것을 접하다 든 생각입니다. 저 사람에게 그럼에도불구하고...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철학이란... 삶, 동굴로부터의.. 빛 등등 많은 것을 논하고 잇는듯 싶은데 여유로운 사람의 바탕위의 것인가?? 라는... 한정된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선생님 글을 읽으면서도 저 글귀가 와닿네요  

    • 2018-06-27 23:25

      플라톤과 니체에게 철학하기가 여유있는 생활이 바탕이 된 일이었을까요? 니체를 공부하며 짬짬이 생각해보시면 좋겠네요rabbit%20(4).gif

      • 2018-06-27 23:40

        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던졌네요 ㅎㅎ

  • 2018-06-28 12:14

    서점 리스본을 보면서 난 저런 약방을 차려봐야지 하는 생각도...ㅋㅋ

    동굴은 스스로 만드는 것 같아요. 아니면 제발로 들어가던가.

    엑소시스트는 매번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한 파이데이아, 공부인지 교육인지 단련인지 수행인지 모르겠지만 

    어렵습니다...

    • 2018-06-28 15:28

      인문학 약방 가즈아~

  • 2018-06-29 20:27

    '방금 쓴 글이에요' 보다 '방금 나온 빵이에요' 라는 말에 더 가슴 뛰는 나ᆢ 

    동굴밖 나가보기는 ᆢ ㅠ

     

  • 2018-07-02 01:02

    방금 쓴 글이예요...^^

    동굴 밖 서점 '리스본'은 무슨 사연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서점 리스본>이 나오면 .....ㅎ

  • 2018-07-02 14:12

    홍대 앞을 한 번도 안가본 나는 홍대 앞이 꼬옥 효리네 같고 윤식당 같다.

    함 가보고 환상인지 동굴이지 동굴 밖인지 생각해 볼란다.

    새털은 글을 참 잘 쓴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19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84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8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29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78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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