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첫 번째 발제

루욱
2019-09-12 21:07
191

개념 vs 무개념 , 표상 vs 비표상

 

개념이 정서로 표상이 되든 사고나 언어로 표상이 되든 그것에 맞추어서만 행위을 한다면 어떠할까? 인상주의 화가들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세상은 그들의 그림을 비난하였다. 이탈리아 조르조네의 <전원 음악회> 에서 영감은 얻어 그린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비윤리적이다? 개념이 없다? 라는 혹평을 받는다. 아카데미식 미술 교육에선 어떤 대상의 개념을 이미 정하고 그에 맞춰 그림을 그린다. 사고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은 꼭 부모가 있어야 정상적인 가정이고 편모, 편부 가정은 가정의 개념에서 벗어나 있기에 비정상적이다. 개념 안에 포함된 것은 정상성이라면 개념의 경계 밖은 비정상성으로 배척된다.

동일성을 낳기 위해선 항상 차이를 지워야 한다. 이런 차이를 억압하는 개념적 사고, 즉 표상적 사고는 개념에 사로잡힌 사고이다. 우리는 개념에 갇힌 순간 개념적 사고 밖에 못한다. 거기서는 현실의 다양함과 풍부함은 사라진다.

표상 체계는 폭력적이다. 어떤 대상을, 사건을 이미 주어진 개념 안에서만 사고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떠하겠는가? 내 눈에는 분명 달리 보이고, 내 생각에는 그 사건의 본질은 그게 아니라 이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하지 못하게 은연 중 작용하고 있다면? 헝가리 출신의 사상가, 루카치는 “근대 철학의 특징은 세계를 더 이상 인식 주체와 독립하여 성립하는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세계를 인간 자신의 산물로서만 파악하려는 것” 이라고 발했다. (p25) 데카르트도 인간의 지식(특히 기하학적 지식)이 세계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걸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데리다나 들뢰즈는 이러한 표상주의적 태도를 공격한다. 표상주의는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가장 일반적인 표상체계는 바로 언어이다. 어 언어가 다양하고 차별적인 목소리를 억압한다.

 

진부한, 너무나도 진부한 (p34~

 

들뢰즈는 ‘차이’에 주목한다. 만약 감성이 획일화된다면 세상을 보는 눈 혹은 인식도 획일화 될 것이다. 독일인들은 왜 나치들의 만행에 다른 사고를 못했을까? 나치 강제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왜 그렇게 순종적인 태도를 가졌을까? 가정 윤리를 통해서 혹은 학교 교육을 통해서,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획일화된 개념적 사고는 개인의 감성에 영향을 미치고 그가 세상을 보는 눈도 획일화 된다.

우리가 머릿속에 동그라미를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개념을 떠올려보면 그것에 해당되는 형상들이 같이 떠오른다. 그 형상이 도식인데, 이 도식은 감성의 산물이다. 칸트는 이러한 감성의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불렀다. 칸트가 말하는 상상력은 도식화의 능력이지, 창조적 공상능력은 아니다. 오리? 오리처럼 보이는 것을 그려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도식 능력은 우리 삶에서 근본적이고 중요하다

하지만 칸트가 말하는 감성적 도식 능력이 근대에 이르러 대중문화를 만났을 때 그것은 획일화 되고 왜곡, 조작된다. 주로 서부영화 같은 장르영화가 그러하다. 꼭 그런 영화뿐만 아니라 획일화된 이야기 구조 속에 빠져 길들여져 있는 것들은 모두가 반복적인 도식만을 생산한다.

들뢰즈는 이런 칸트의 도식론에 중요한 의미를 둔다. 인식 작용에서 도식은 개념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수단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상상력이 개념에서 벗어난 경우 기존의 인식활동이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도식을 만들 수 있다. 같은 사물, 같은 사건을 보는 방식이 새로워지면 그것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창조되지 않을까?

동일성의 틀을 깨고 차이 자체를 낳는 삶이어야 진부하지 않다. 들뢰즈가 보기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동일한 것은 없다. 개념에 의해 구분되어지는 순간 독특함은 사라진다. 개념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자체의 차이가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 자체>이다. 우리 또한 차이 자체를 발견할 줄 알 때 표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차이가 아닌 차연의 논리(p50~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차연defferance’은 차이와 연기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차이를 통해 어떤 것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결된 의미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만들었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이는 개념적인 차이가 아니다.

서양의 철학은 말(소리)을 숭상하며 문자를 폄하했었다. 말은 화자의 현존을 전제하고 글은 읽는 시점으로 글쓴이의 부재를 전재한다. 그래서 글은 읽는 사람의 임의 해석을 낳기 쉽고 문자가 왕의 말을 대신할 경우 위조나 남용의 문제를 우려했기에 문자를 경계해 왔다. 문자는 말의 대리 보충물 supplement에 불과했었다. 말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에 대한 문자가 갖는 대리 보충물에 대해서 데리다는 다른 해석을 갖는다. 왕의 부재시 왕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을 대신할 문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이다. 대리 보충물supplement 의 프랑스 원어인, 쉬플레망은 1)보충은 기존의 것에 더하는 것이므로 잉여와 부가의 의미로, 2) 대리는 기존의 역할을 대신함의 의미로 해석된다. 기존의 것이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잉여와 결여, 보충과 대리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데리다는 말과 문자의 전통적 위계 질서를 거부한다. difference에서 differance 로, e에서 a로 바뀐 것은 a가 거대한 묘비나 죽음에 비유된다, ‘폭군의 죽음’ 혹은 ‘음성언어의 죽음’ 을 알리는 것이다. (~p61)

사과라는 말(기호)과 실재 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서 기호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사과라는 말에 다른 기호의 의미는 공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물이나 인간을 하나의 기호로만 개념 지을 수 없다. 당신을 사과처럼 하나의 기호로만 규정짓는다면? 사물이나 인간은 공간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고 그 변혁의 과정을 통해 이해된다. 그때 그때의 차이에 의해 자신을 드러낸다. 시간 속에 시시각각 바뀌는 것.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자신의 흔적을 다양하게 드러낸다, 이것이 데리다의 기호이다. 보편적 기호가 아니다. 데리다의 기호는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흔적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을 지연하고 유보하는 차연의 표현인 것이다. (~ p67)

 

존재에 대한 진부한 시각을 거둬라

 

존재는 다양체이다. 존재는 하나의 기호로,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차이 자체’이다. 이 말은 존재 자체가 무한한 잠재성을 지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건반에서 도와 레를 눌렀을 때 이 둘은 분명 다르게 들릴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둘이 서로 다른 진동체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와 레를 포함해서 모든 음들은 무수히 많은 음(배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도 음 속에는 도와 한 옥타브 높은 도 사이의 모든 음들이 들어있다. 실험 삼아, 도의 건반을 치고 그 다음에 이것보다 살짝 약한 힘을 가해 솔을 쳐보면 이 두 음이 겹쳐지면서 같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도 음을 도 음으로만 규정하고 듣게 되다면 다양한 소리는 모두 소멸하고 만다. 이처럼 우리의 관습이나 개념의 틀에 갇혀 존재를 파악하면 그 속에 잠재된 다양성을 놓치고 말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 p72)

칸트는 개념과 이념을 구분했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갖는 개념은 그 사물의 일부만을 추상해서 만든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물을 분류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보편적 어휘들이다. 칸트는 개념은 개념일 뿐, 사물 자체는 개념과 다르다고 말한다. 사물의 본래 모습, 즉 물자체를 표현하는 용어는 개념이 아닌 이념이라고 했다. 이념은 상당히 주관적인 용어이다. 사물 본래의 모습은 우리의 지각 능력이나 사고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칸트의 이념을 들뢰즈는 ‘다양체’ 라는 용어로 받는다. 도는 무한한 음들을 지닌 다양체이다. 그러면 도가 가지는 다양한 음들을 우리가 완벽하게 지각할 수 있는가? 현실에서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도 음 자체는 분명히 실재한다. 주관적인 이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념이란 실재하지 않는 주관적인 어떤 것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실재하지만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표현이다. 무수한 음들을 포함한 도 음 자체는 잠재적이고 우리의 귀로 모두 들을 순 없지만, 즉 실현되자 않지만 분명히 실재적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잠재성과 현실성을 대비시키고 실재성과 가능성을 대비시킨다.(~p76)

베르그송의 지각이론이 인상적이다. 일반적인 지각작용은 외부의 사물에 우리의 감각기관이 더해져 이루어지는 작용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지각작용으로 얻어지는 표상들은 사물의 무수한 이미지들 중 지각하는 사람의 관심에 들지 않는 것들을 도려냄으로 얻어지는 것들, 즉 나머지 물질에 대한 이미지라고 말한다. 지각은 뺄셈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물질은 무수한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들뢰즈의 다양체가 베르그송의 물질과 상통한다. (~p80)

그렇다면 인간의 지각은 그 사람의 주관적 인식에 구속 받을 수 밖에 없다. 즉 그 뺄셈의 과정이 주관적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이런 인간의 지각을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다. 사진을 예술은 아니라고 흔히 말하지만 발터 벤야민은 생각이 다르다. 사진이 전통적인 예술에 대한 아우라(권위)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킨다고 보았다. 이제 예술은 진정으로 감각적인 표층만 표현하게 되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작가의 관심이나 의도에 따라 이미지가 자의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차단한다. 세상을 보는 자신의 관점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막는다. 사진은 찍는 사람의 의도가 배제된다.

물론 카메라도 결국 인간의 시각 구조 모델로 만들어진 모델에 불과하다. 다만 카메라는 개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엄격한 구도 속에 사물을 배치시키는 화가들과 달리 사진은 구도가 없다. 현실 자체도 구도가 없다. 사진은 구도나 배치가 결여된 현실 공간만을 드러낸다. 들뢰즈는 사진을 통한 현실의 지각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현실의 무수한 이미지들 중 어떤 부분도 도려내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 카메라라고, 그래서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 카메라에 대한 이런 신뢰는 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물론 영화가 자본주의 논리에 지배되어 천박한 도식만을 낳는다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르는 비난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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