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주역> 53. 풍산점(風山漸), 함께 사는 지혜를 배운다

기린
2019-09-03 08:55
980

 

풍산점(風山漸), 함께 사는 지혜를 배운다

 

 풍산점은 산위에 나무가 있는 상(象)이다. 산도 땅에서 보면 높은데 그 위에 나무이니 그 높음의 경지를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상을 점(漸)이라 하니 즉 나아감을 의미한다. 산에 깃드는 나무는 단번에 쑤욱 자라는 것이 아니라, 싹이 트고 시간이 흘러 차츰차츰 자란다. 아무리 까마득히 높아 보이는 경지도 차근차근 나아간 결과임을 담고 있는 괘이다. 점괘의 괘사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이 길하다.”고 풀고 있다. 자연에서 차근차근 나아간 이치가 산위의 나무를 통해 알 수 있다면, 인간사에서는 여자가 시집감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점괘 효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비유는 기러기와 관련된 내용이다. 초육은 물가에 나아간 기러기, 육이는 반석에 나아간 기러기, 구삼은 육지로 나아간 기러기, 육사는 나무로 나아간 기러기, 구오는 높은 구릉으로 나아간 기러기, 상구에서는 하늘로 나아갔다. 고대인들은 산 위의 나무와 기러기가 날아오르는 과정과 여자가 시집을 가는 모습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이미지를 포착한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기러기의 생태와도 일맥상통한다. 겨울 철새인 기러기는 가을이 되면 북반구에서 날아와 물가에 둥지를 튼다. 겨우 내내 이들을 볼 수 있다. 봄이 되면 기러기들은 다시 북반구로 날아간다. 그렇다면 기러기가 날아오는 가을이면 고대 농업 사회는 농한기에 접어든때이다. 농사일을 하러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인다. 다시 농번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의 고대 축제와 가요』에 의하면 축제가 벌어지는데 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남녀의 짝짓기이다. 서로의 짝을 찾아 노래와 춤이 곁들인 격렬한 축제가 펼쳐진다. 그렇게 결혼이 성사되고 나서 다시 기러기가 떠나는 때가오면 농번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농번기에는 남녀가 나뉘어서 각자의 일터로 흩어진다고 한다.

 

 기러기의 생태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점은 이들이 협력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하늘을 날 때도 브이자 모형을 이루어 협력을 한다. 봄이 되어 북반구로 날아갈 때도 행여 다친 동료가 있으면 무리 중에서 떨어져 나온 누군가가 꼭 그 곁을 지킨다. 설령 죽게 되더라도 그 최후를 지켜본 후 떠난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그런 기러기를 보면서 결혼생활의 이치를 터득하지 않았을까. 기러기가 물가에서 하늘을 날아오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반석이나 육지 나뭇가지 등은 결혼에서 등장하는 변수이다. 남자는 밖으로 돌면서 두 사람의 보금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며, 여자가 자손을 잉태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때 기러기의 협력을 본보기로 그런 고난에서도 서로 협력하는 지혜를 배운 것이다. 그러다보면 점점 시간이 흘러 훨훨 하늘로 오르는 기러기떼처럼 고난에서 벗어난 때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전해지면서 결혼하는 남녀에게 기러기를 본받으라는 의미로 기러기 형상을 선물하는 풍습이 생긴 것 아닐까. 실제로 고대의 결혼 풍습에 신랑이 나무로 깎은 기러기 형상을 신부 집안에 보낸다는 기록도 있다.

 

 점(漸)괘 구삼효사에서는 결혼 생활의 고난에 대해 도적을 막아야 이롭다고 풀었다. 결혼 생활의 협력을 방해하는 도적의 모습은 어떨까? 결혼이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시대이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모듬살이의 필요성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모듬살이를 방해하는 도적의 존재도 여전히 건재하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일인 가구를 겨냥한 수많은 상품들의 유혹이 일 순위 도적이다. 이 유혹의 늪에 빠져서 아무리 소비해도 헛배만 부를 뿐이다. 그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모듬살이의 장으로 들어가려고 발심했을 때 점(漸)괘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당장의 변화는 느낄 수 없더라도 점점 달라지리라는 것. 저 산 위에 자라는 나무가 그렇듯이 차츰 차츰 모듬살이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자랄 것이다. 물가에서 만난 기러기가 점점 뭍으로 올라 하늘을 훨훨 날 듯이. 마침내 날아오른 기러기가 때가 지나면 다시 또 돌아오듯이. 함께 사는 일에 능숙해지는 것 또한 점점 나아질 것을 믿어 보는 것, 점(漸)괘에서 발견한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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