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바리주역> 52. 중산간 重山艮 괘 - 멈추면서 문화가 시작되었다

영감
2019-08-26 10:26
1303

<2019 어리바리 주역>은 이문서당 학인들의 주역 괘 글쓰기 연재물의 제목입니다.

그대로 어리바리한 학인들이 어리바리한 내용으로 글쓰기를 합니다. 형식도 내용도 문체도 제 각각인 채 말입니다.

하지만 압니까? 언젠가는 <주역>, 그 심오한 우주의 비의, 그 단 한 자락이라도 훔칠 수 있을지^^ 

 

멈추면서 문화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시들 해졌지만 한때 고스톱은 국민의 놀이였다. 우연성과 약간의 기량 (운칠기삼)에 의해 승부가 갈리는 사행심 때문에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3점을 먼저 딴 사람이 이기지만 사실상 게임은 이 때부터 시작이다. 승자에게는 판을 거기서 끝내든지 아니면 계속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게임의 이름도 '고스톱'이다. 승자는 점수를 추가할 욕심에 '고'를 선언해서 판을 키우지만, 만약 점수를 더 올리지 못하면 한판에 거덜이 날 수도 있다. 따라서 승자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결단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승산이 낮은 판에서도 무리한 '고'를 선언한다. 이때 나지막하게 '못 먹어도 고’를 중얼거리며 의연함을 가장하여 다가오는 위험을 애써 축소시키기도 한다. 배짱과 도전정신으로 포장된 무모한 '고'의 결말은 대개 비참하다. 반대로 신중한 판단력과 안정된 투자 정신으로 '스톱'을 선언한 사람이 소심한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주역의 52번째 괘는 위아래에 산이 겹쳐 있는 중산간重山艮괘로서 멈춤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고전에서는 산을 그칠止의 상징으로 삼았다. 서양에선 앞에 산이 나타나면 넘어가고 극복을 했지만 동양에서는 멈추고 거기 머무른다. 멈추면서 문화가 시작되었다. 중뢰진重雷震 괘 다음에 오면서 움직임과 그침의 조화를 보여준다. 주역의 산천대축山天大畜 괘도 멈춤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이는 저지당하는 멈춤이며 간艮괘의 편안한 그침과 구별된다.

삶의 여정에서 수시로 가고 멈춤의 선택을  강요받고 그로 인해 길흉화복이 갈린다. 적은 비용으로 큰 편익을 얻고자 하는 합리적 선택이 아닌, '못 먹어도 고' 류의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멈춰야 할 때 가다가 낭패하는 것을 흔히 본다. 이렇듯 멈추고 그침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는 까닭을 주역의 중산간 괘에서는 욕심으로 보고 있다. '그 등에 그치면 몸을 보지 못하며 뜰에 가면서도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으리라. 艮其背 不獲其身며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정이천의 해석에 의하면 욕심이 앞에서 이끌면 그침을 구할 수 없는 바 욕심이 앞을 볼 수 없는 등 뒤에서 오히려 그침이 쉽다고 한다. 고스톱에서 ‘고’와 ‘스톱’을 결정하는 과정에 면밀한 위험의 계산보다 성공시에 거머쥐는 점수에 욕심이 앞서면 무리한 '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어려운 건 역설적이다. 

중산간 괘의 각 효爻에서는 그침의 실천을 설명하고 있다.'初六은 발꿈치에 멈춤이다. 허물이 없으니, 永貞함이 이롭다.初六 艮其趾 无咎 利永貞.' 이 효를 정이천은 '일을 초기에 멈추면 正道를 잃음에 이르지 않는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바르지 못한 길엔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건데 지당한 말씀이지만 길을 가기 전에 바른지 아닌지를 어떻게 미리 아나? 그래서 주역을 읽는건지 모르겠다.

두 번째 효에서는 그침의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장딴지에 멈추니 구원하지 못하고 따른다. 그리하여 마음이 불쾌하도다. 六二 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 주위의 영향력 있는 사람의 의도나 판단에 의해 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경우다. 움직이는 에너지는 장딴지에서 나오는데 장딴지는 정강이 가는 대로 피동적으로 따라갈 뿐이어서 억울하다. 어떤 이들은 중요한 결정을 독자적으로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외로워하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타인의 개입을 반기기도 한다. 우유부단한 '결정 장애인'들이 의외로 많다. 이렇듯 인생사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건 당사자뿐 아니라 부모, 배우자, 상사, 친구 등 다양하다.   

그 다음, 구삼九三효는 限界에 멈춤이다. '등뼈를 벌려 놓음이니, 위태로움이 마음을 태우도다.艮其限 列其夤 厲薰心.' 박약한 자신의 의지를 신뢰하지 못하고 강제하는 장치를 설정해서 멈춤을 실현하기도 한다. 도박을 끊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는 끔찍한 얘기가 사실이라면 여기에 속한다. 어쨌거나 스스로 설계한 조건이므로 외적으로 억제당해서 그치는 산천대축 괘와는 다르다. 편안하지 않은 그침이며 실패할 확률도 크다. 사실 결단력 있는 자는 담배 끊는다고 멀쩡한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등 요란 떨지 않는다.

육사효에 올라와서는 '몸에 멈춤이니, 허물이 없다.艮其身 无咎'.고 한다. 모두 멈춰야 할 곳에서 겨우 자기 개인만 통제하고 마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정이천은 설명한다. 사회 지도자가 리더십이 부족해서 대중을 설득하지 못했을 뿐 혼자만 살려고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니므로 큰 허물은 아니지만  길吉하지도 않다.  

군주의 입장인 육오효는 ‘말에 질서가 있으니 뉘우침이 없어지리라.六五 艮其輔 言有序 悔亡.’ 로 사람이 마땅히 삼가고 그쳐야 할 것은 오직 말과 행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천하를 다스리는 위정자로서 그치고 자제해야 할 것 중에 으뜸이 말임은 당연하다.

중산간 괘의 효를 마감하는 상구上九 효는 ‘멈춤에 독실함이니 길하다敦艮 吉’로 나온다. 지나치지 않고 멈추는 지극한 그침의 도를 설명했다. 모든 동물의 보편적 특징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動物이다. 만물은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이 관성이며 관성에 저항하는 것은 힘이 든다. 조직에서 자신의 가치가 다했다고 판단되면 미련없이 나와야 한다. 버티고 다니다 잘리는 건 지止가 아니고  축畜이며 아름답지 못하다. 멈추는 것은 지적인 작업이다.

중산간 괘를 종합하면 그침을 가로막는 건 욕심인데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가고 그침을 결정하되, 바른 그침은 다른 이들도 동참하도록 도와주고, 큰 일을 하는 지도자일수록 언행을 자제하며, 성실하게 멈출 때를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의 3강령 중의 하나인 지어지선止於至善도 같은 맥락에서 그침의 도를 정의했다. 최선에서 그치고 유지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서 그칠 지止는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이룸이다. 어느 경지까지 도달하되 선을 넘지 말고 그 상태를 유지하라는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험한 인생 여정에서 다른 차와 충돌하지 않고 가다, 서다, 기다리다가, 양보도 좀 하며 가려면 각자 신호등 하나씩은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다 왔는데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면 최신 네비게이터라도 한 개 있어야겠지.

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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