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절 수정해석

요요
2017-11-04 19:07
197

366~367수정해석

 

푸코에게 있어서는 제3의 심급이, 한정 가능한 것과 한정,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빛의 수용성과 언어의 자발성을, 두 가지 형태의 저편 혹은 그 안쪽에서 작동하면서, 정합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르장드르에게 제3자란 몽타주를 건 역사적 도박장에서 돌연히창안되는 것이었다. 어떤 가시성과 언표와의 우연한 접점을 기초로 하여 르장드르가 무한히 넓은 의미를 부여한 텍스트를 조작하는 암중모색을 행한 끝에 돌연히그 관계는 제3=다이어그램으로서 결정된 것이다. 다이어그램이란 제3자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우연과 도박과 창조성과 역사의 요란스런 가운데에서 조용히 끓어오르는 제3자이다. 3자를 자명하다고 하든 비판하든, 귀를 막고 그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보다도 재빨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푸코가 르장드르를 비판한다? 르장드르가 들뢰즈를 비판한다? 들뢰즈는 푸코에서 멀어졌다? 이 세 사람이 라캉을 비판한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든 성가신 일이다. 그러한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확실히 그 비판을 주의 깊게 좇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모두 한 식탁에 불러 모으기 위한 준비였다. 이것이 우리의 몽타주다.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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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04 19:52

    p364 수정 해석 띠우

    다이어그램은, ‘사회에 걸쳐있는’ 것이다그것은 여러 사회 사이를 난다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따라서다이어그램은 진화론에 순종한 것은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권력이 나타난 것이다’. 푸코로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마도 그가 중계점으로 되었고 전파했던 이 표현에 대해서 그 순간의 경계를 두는 것은항상 무엇인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새로운 다이어그램의 몽타주가 형성되어진 것은 있다있는 것이 당연하다. <중세해석자혁명>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다이어그램의 창출있었던 것을누군가가 의심받을수 있겠지그러나그렇다고 해도 다른 장치다른 몽타주가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고 ‘낡게’ 되고 ‘소실하는 등은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다이어그램은 한순간에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유형에 처해지고의외로 다른 장소엉뚱한 문맥으로 돌출하는 것이고그럭저럭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적어도 ‘완전히 새로운’ 권력에 의해서 마술처럼 전부가 소실해버린 것은 아니다다이어그램이란말하자면 힘의 착종체이고때를 맞추어 시간계열에 따라서 나열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옆으로 날아간다. 그것을 없는 것으로 해버리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잔재라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에그것이 돌출해왔던 때에 ‘회귀 ‘부활이니 떠드는 것이다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떠드는 것이다너무나도 해학적인 우왕좌왕이다볼품없는 좌면우고이다거기에는 부활도 회귀도 없다어떤 다이어그램은낡고 새로움에 관계없이우연하게 그 결합관계를 ‘날조하고또 다른 결합관계의 결과인 장치나 몽타주를 전혀 관계없는 문맥으로부터 빼앗아 온 것이다예를 들어보자. ‘근대민주주의 다이어그램은 무엇에서 생긴 것일까온갖 시대착오적인 밖으로부터 빼앗아 왔던 장치의 몽타주로 생긴 것이다우선 ‘권력분립원리장치단순히 합중국 헌법이 전면 채용했다는 역사적 우연에 의해 ‘조우에 의해, ‘민주주의 다이어그램의 본질로 된 것처럼 되었고원래 이것은 중세의 ‘혼합왕정· 혼합정체 다이어그램이 가졌던 장치의 전용이다그럼 ‘대표의 원리장치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해왔던 대로애초 ‘귀족정치 다이어그램의 것이고그리스에서는 ‘그리스 민주제 다이어그램과 어떤 관계도 없다그것은 어떤 우연에 의해서 ‘민주주의 다이어그램으로 전유된 것이다그럼 ‘다수결 원리장치는 어떠한가이것은 로마 교황선거 ‘콘클라베에서 고안되었던 몽타주이고바로 ‘<살아있는 문서>의 몽타주에서 ‘민주주의 다이어그램접수되었다지리멸렬이다그리고 그것으로서 전혀 상관없다. ‘세속화 장치의 함정을 간파했던 우리가도대체 무엇을 떠들 것이 있는가그렇기는커녕이것은 무서운 것이고불온하고 폭력적인 것이지만그러나 유쾌한 일이기도 하다그렇다이상의 것이 논증하고 있는 것은우리는 새롭든 오래되었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주워왔고다이어그램을장치를몽타주를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이 다이어그램의 ‘우연성 ‘창조성’ ‘창안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 우연성의 한창에 있는 다이어그램이야말로 ‘3칸트의 상상력의 도식이란,바로 가시성과 언표의 제3의 심급이라고 전제하고서들뢰즈=푸코가 말하고 있다.

     

    854 확실히 해두자독자는 여기에서 다이어그램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루즈하게 쓰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결국 국가든 무엇이든 다이어그램이라는 것 아닌가라고그러나 다이어그램은 가시성과 언표의 우연의 조우 ‘결과이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도출했던 것이다고로어떤 광도에 있는 가시성이특정한 언표와 중첩되어 의미와 주체를 산출하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그러나그 바로 그 ‘역사적인 가시성과 언표의 중첩’ 자체에서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이 ‘이러한 주체로서 태어나 버렸다는 것은 필연이고운명이기조차 하다 ‘우연에 의한 필연에 의해서야말로 우리는 ‘이러한’ 주체이다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주체인 것에서야말로, ‘다이어그램을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대항해 싸우기의 도박장 한복판에 참여하고, ‘다른 다이어그램다른 중첩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열어간다여기에서는 통상 정태적인 것으로써 생각되어지는 제 3자를나아가서는 국가나 제도 등을 다이어그램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그것들을 ‘정태적이지 않은’ 것으로써 제시하고 있다.

  • 2017-11-04 23:33

    p 361-363  수정해석 건달바

      제103절 다이어그램, 장치, 몽타주

      들뢰즈=푸코는 이 우연성에서 출현한 가시성과 언표와의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부른다. 그때마다 그것은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우선 대표적인 것은 이미 『감시와 처벌』의 해당 부분을 인용한 ‘다이어그램’이다. ‘가시적인 것과 언표가능한 것 사이에는 어떤 틈, 어떤 분리가 있다. 그러나 이 형태간의 분리는 무형의 다이어그램이 쇄도하고, 두개의 방향으로 구체화되는 듯한 장소, 비()-장소가 된다.’ 

      다이어그램은 ‘청각적이든, 시각적이든, 이미 고문서는 아니다. 그것은 지도이고, 지도작성법이고, 사회적 영역 전체와 공통의 퍼짐새를 갖는다. 그것은 추상적인 기계인 것이다. 무형의 소재와 기능에 의해 정의되고, 내용과 표현의 사이, 담론적 형성과 비담론적 형의 사이에서 어떤 형태의 구별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것, 이야기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 자체는 거의 무언으로 맹목적 기계이다.’ 그렇다. 다이어그램이란 근본적으로 어떤 ‘가시성과 언표’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즉 우리가 본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고, 말하는 것에 관해서 보고 있다고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 효과인 것 같은 ‘비-장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계’로서, ‘장치’로서, ‘몽타주’로서. 그것은 일단 언표와 가시성을 결합시켜버린 이상, 이상한 ‘착종체’로서 출현한다. 증식하는 언표에는 가시성의 단편이 꽂히고, 가시성에는 그 관계라는 통로로부터 [나온] 다양한 언표나 언표의 집합체가 달라붙어 그것의 구체적인 배치조차 변화시켜 간다. 다이어그램, 기계, 장치, 몽타주가 말과 사물과 이미지로부터 생긴다든가, 시니피앙과 이미지와 사물의 상호침투에서 생긴다고 하는 이해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해를 여기에서 보다 정치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이어그램, 기계, 장치, 몽타주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우연의 언표와 가시성의 조우로부터 시작하여, 거기에서 출현하는 언표가 미세하게 먹어 들어간 가시성과 그 언표에 먹혀 들어간 구멍투성이가 된 가시성이 드러낸 실재화된 사물과, 그 부상한 사물이 돌발시키는 사건과, 그 불시에 일어난 사건이 순식간에 거품을 일으키는 언표와, 그 거품에서 태어난 언표가 서서히 스며서 통과해 광도를 바꾸어가는 가시성과, 그 광도가 바뀐 가시성이 또다시 ……라고 하는 제한없는 프로세스로부터, 그것들이 산출하고 직조하는 다양한 프로세스로부터 생기고 있는 것이다. 르장드르의 색다른 ‘텍스트’ 개념—어떤 역사상의 댄스의 형태, 칼리그래피의 양식, 영화, 행동거지, 이야기, 노래, 아리아, 낭송, 시, 의례, 장례, 법의 다양한 형태, 친족관계의 양태, 사회 그 자체도, 그 변전의 있는 그대로를 포함하는—도 이러한 ‘기계’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텍스트의 객관주의적 표상’ ‘정보화’를 비판하며 보여준 것은 이러한 역사상의 다양한 행동거지이고, 그 우발적인 제정과 창안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유대교의 법문에 바른 꿀을 핥아서 맛본 아이들, 이 특수한 ‘텍스트 읽는 법’이, 어떤 가시성과 언표의 우연한 ‘조우’, 즉 ‘다이어그램’에 따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이어그램이란 어떤 체제, 최소 정도의 미시적 수준에서 최고 정도로 거시적 수준까지를 포함한 어떤 체제 그 자체이고, 그 창출이다.

  • 2017-11-06 16:00

    p363 수정해석(103절).hwp

  • 2017-11-18 20:31

    전체 해석입니다.

      제103절 다이어그램, 장치, 몽타주

      들뢰즈=푸코는 이 우연성에서 출현한 가시성과 언표와의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부른다. 그때마다 그것은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우선 대표적인 것은 이미 『감시와 처벌』의 해당 부분을 인용한 ‘다이어그램’이다. “가시적인 것과 언표가능한 것 사이에는 어떤 틈, 어떤 분리가 있다. 그러나 이 형태간의 분리는 무형의 다이어그램이 쇄도하고, 두개의 방향으로 구체화되는 듯한 장소, 비()-장소가 된다.” 

      다이어그램은 “청각적이든, 시각적이든, 이미 고문서는 아니다. 그것은 지도이고, 지도작성법이고, 사회적 영역 전체와 공통의 퍼짐새를 갖는다. 그것은 추상적인 기계인 것이다. 무형의 소재와 기능에 의해 정의되고, 내용과 표현의 사이, 담론적 형성과 비담론적 형의 사이에서 어떤 형태의 구별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것, 이야기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 자체는 거의 무언으로 맹목적 기계이다”. 그렇다. 다이어그램이란 근본적으로 어떤 ‘가시성과 언표’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즉 우리가 본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고, 말하는 것에 관해서 보고 있다고 당연한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 효과인 것 같은 ‘비-장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계’로서, ‘장치’로서, ‘몽타주’로서. 그것은 일단 언표와 가시성을 결합시켜버린 이상, 이상한 ‘착종체’로서 출현한다. 증식하는 언표에는 가시성의 단편이 꽂히고, 가시성에는 그 관계라는 통로로부터 나온 다양한 언표나 언표의 집합체가 달라붙어 그것의 구체적인 배치조차 변화시켜 간다. 다이어그램, 기계, 장치, 몽타주가 말과 사물과 이미지로부터 생긴다든가, 시니피앙과 이미지와 사물의 상호침투에서 생긴다고 하는 이해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해를 여기에서 보다 정치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이어그램, 기계, 장치, 몽타주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우연의 언표와 가시성의 조우로부터 시작하여, 거기에서 출현하는 언표가 미세하게 먹어 들어간 가시성과 그 언표에 먹혀 들어간 구멍투성이가 된 가시성이 드러낸 실재화된 사물과, 그 떠오른 사물이 돌발시키는 사건과, 그 불시에 일어난 사건이 순식간에 거품을 일으켜서 나온 언표와, 그 거품에서 태어난 언표가 서서히 스며서 통과해 광도를 바꾸어가는 가시성과, 그 광도가 바뀐 가시성이 또다시 ……라고 하는 제한없는 프로세스로부터, 그것들이 산출하고 직조하는 다양한 프로세스로부터 생기고 있는 것이다. 르장드르의 색다른 ‘텍스트’ 개념—어떤 역사상의 댄스의 형태, 칼리그래피의 양식, 영화, 행동거지, 이야기, 노래, 아리아, 낭송, 시, 의례, 장례, 법의 다양한 형태, 친족관계의 양태, 사회 그 자체도, 그 변전의 있는 그대로를 포함하는—도 이러한 ‘기계’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텍스트의 객관주의적 표상’ ‘정보화’를 비판하며 보여준 것은 이러한 역사상의 다양한 행동거지이고, 그 우발적인 제정과 창안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유대교의 법문에 바른 꿀을 핥아서 맛본 아이들, 이 특수한 ‘텍스트 읽는 법’이, 어떤 가시성과 언표의 우연한 ‘조우’, 즉 ‘다이어그램’에 따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이어그램이란 어떤 체제, 최소 정도의 미시적 수준에서 최고 정도로 거시적 수준까지를 포함한 어떤 체제 그 자체이고, 그 창출이다.(주848)  

      따라서 다양한 다이어그램이, 장치가 실재한다.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몽타주가, 기계가 실재한다. 들뢰즈=푸코가 상정한 것은, ‘규율 다이어그램’이고, ‘주권 다이어그램’이고, ‘사목 다이어그램’이다. 그렇다. 물론 ‘신자유주의 다이어그램’도, ‘내치의 다이어그램’도, ‘자기에의 배려 다이어그램’도, ‘로마법 대전의 동로마 제국적 다이어그램’도, ‘나치 다이어그램’도 당연 존재할 수 있고, ‘사목 다이어그램’의 하위 다이어그램으로서 ‘수도원 다이어그램’, ‘후스파 다이어그램’(주850) 등 다양한 우발적인 다이어그램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통치성과 반-통치성이라는 다이어그램의, 장치의, 몽타주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중대한 문제가 있다. 즉 본성상, 다이어그램은 “실은 불안정이고, 유동적이고 돌연변이를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소재와 기능을 끊임없이 휘젓는다. 결국 어떤 다이어그램도, 몇 개의 사회에 걸쳐있는(inter-social), 생성 도중의 것이다. 그것은 결코 기성의 세계를 제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타입의 현실, 새로운 진리의 모델을 만들어낸다”, “예기하지 않은 결합, 있을 것 같지 않은 연속체를 구성해가면서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반복한다. 순수한 물질이나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그램이, 장치가, 기계가, 몽타주가 있고, 그것이 생산하는 ‘현실’과 ‘진리’가 실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주체화를, 어떤 장치 아래에서 생산되는 주체라는 장치를 차례차례로 제조해 갈 것이다. 장치, 기계라고 말했다고 해서 “물질적인 것”이 질문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만이 질문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기술적이기 전에 사회적이다. 혹은 오히려, 물질에 관계하는 기술이 존재하기 이전에 인간에 관계하는 기술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체화의 몽타주, 주체화의 다이어그램.

      다이어그램은, ‘인터-소셜(몇 개의 사회에 걸친 것)’이다. 그것은 여러 사회 사이를 날아다닌다.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따라서, 다이어그램은 진화론에 순종하지 않는다. “완전히 새로운 권력이 나타난 것이다”. 푸코로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마도 그가 중계점으로 되어 전파했던 이 표현에 대한 한순간의 경계를 두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 일 수있다. 당연히, 새로운 다이어그램의 몽타주가 형성되어진 것이 있다. 있는 것이 당연하다. <중세해석자혁명>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다이어그램의 창출이었던 것을, 누군가가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장치, 다른 몽타주가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고 ‘낡게’ 되고 ‘소실’된다고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이어그램은 한순간에 소멸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형에 처해지고, 의외로 다른 장소, 뜻밖의 문맥에서 돌출하는 것이고, 그럭저럭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완전히 새로운’ 권력에 의해서 요술처럼 전부가 소실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다이어그램이란, 말하자면 힘의 착종체이고, 때를 맞추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나열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옆으로 날아다닌다. 그것을 없는 것으로 해버리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잔재’라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돌출해 올 때에 ‘회귀’니 ‘부활’이니 하고 소란을 피우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설레는 것이다.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운 우왕좌왕이다. 볼품없는 좌고우면이다. 거기에는 부활도 회귀도 없다. 어떤 다이어그램은, 낡고 새로움에 관계없이, 우연하게 그 결합관계를 ‘날조’하고, 또 다른 결합관계의 결과인 장치나 몽타주를 전혀 관계없는 문맥으로부터 박탈해 온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근대민주주의 다이어그램’은 무엇에서 생긴 것일까. 온갖 시대착오적인 외부(딴 것으)로부터 박탈해 왔던 장치의 몽타주로 생긴 것이다. 우선 ‘권력분립 원리장치’는, 단순히 합중국 헌법이 전면 채용했다는 역사적 우연에 의해, 즉 ‘조우’에 의해, ‘민주주의 다이어그램’의 본질인 것처럼 되었고, 원래 이것은 중세의 ‘혼합왕정· 혼합정체 다이어그램’이 갖고 있던 장치의 전용이다. 그렇다면 ‘대표 원리장치’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던 대로, 원래 ‘귀족정치 다이어그램’의 것이고, 그리스에서는 ‘그리스민주제 다이어그램’과 어떤 관계도 없다. 그것은 어떤 우연에 의해서 ‘민주주의 다이어그램’으로 수탈된 것이다. 그럼 ‘다수결 원리장치’는 어떠한가. 이것은 로마 교황선거, 즉 ‘콘클라베’에서 고안되었던 몽타주이고, 바로 ‘<살아있는 문서>의 몽타주’에서 ‘민주주의 다이어그램’으로 접수되었다. 지리멸렬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전혀 상관없다. ‘세속화 장치’의 함정을 간파했던 우리가, 도대체 무엇에 허둥댈 것이 있겠는가. 도리어 이것은 무서운 것이고, 불온하고 폭력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유쾌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상의 것이 논증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새롭든 오래되었든 어디서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가져왔고, 다이어그램을, 장치를, 몽타주를, 기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이어그램의 ‘우연성’은 ‘창조성’ ‘창안’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 우연성 중에 있는 다이어그램이야말로 ‘제3자’다.(주854) 칸트의 상상력의 도식이란, 바로 가시성과 언표의 제3의 심급이었다고 전제하고서, 들뢰즈=푸코는 말한다.

      푸코에게는 제3의 심급(troisième instance)이, 한정 가능한 것과 한정,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 빛의 수용성과 언어의 자발성을, 두 가지 형태의 저편 혹은 그 안쪽에서 작동하면서, 정합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르장드르에게 제3자란 ‘몽타주’를 건 ‘역사적 도박장’에서 ‘돌연’히 창안되는 것이었다. 어떤 가시성과 언표와의 우연한 접점을 기초로 하여 르장드르가 무한히 넓은 의미를 부여한 ‘텍스트’를 조작하여 내기를 거는 암중모색을 행한 끝에 ‘돌연히’ 그 관계는 제3자=다이어그램으로서 ‘결정’된다. 다이어그램이란 제3자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우연과 도박과 창조성과 역사의 요란스런 가운데에서 조용히 계속해서 끓어오르는 제3자이다. 제3자를 자명하다고 하든 비판하든, 귀를 막고 그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보다도 재빨리 새로운 제3자를 만들어내면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푸코가 르장드르를 비판한다? 르장드르가 들뢰즈를 비판한다? 들뢰즈는 푸코에게서 멀어졌다? 이 세 사람이 라캉을 비판한다? ─누가 누구를 비판하든 성가신 일이다. 그러한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확실히 그 비판을 주의 깊게 좇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모두 한 식탁에 불러 모으기 위한 준비였다. 이것이 우리의 몽타주다. 계속한다.

    (주848) 예를 들어 이런 설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떤 가시성이 어떤 언표가능성과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 우연히 ‘접점’을 가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 왕복운동, 상호감입 속에서 어떤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고. 예를 들어, 어느 신화의 한 부분을 바탕으로 그것을 ‘테마’로 한 회화작품이 그려진다. 그 가시성은 갑자기 그 신화의 한 부분을 넘어서는 ‘과잉’된 부분을 포함하게 된다. 치켜 뜬 눈의 유디트, 내려 깐 눈의 비너스……. 거기에 대하여 또 주석이 쓰인다든가, 그것을 토대로 동일한 테마에 꼭 맞는 또 다른 회화가 그려진다든가, 전혀 다른 테마에 따른 회화 작품에 ‘전용’된다든가, 그 회화작품에 대한 주석의 주석이 또 써진다든가 하는 ‘증식’이 일어난다. 이런 왕복운동 속에서, 조금씩 어떤 세부는 사라지고 어떤 세부는 커져간다. ‘유디트’의 신화로부터 보티첼리, 크리나흐, 카라바조, 클림트 등의 여러 회화가 탄생하고, 그것도 다시 다른 회화나 주석을 자극하고……라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지리적으로 제한된, 그러나 원칙으로서는 무한한 ‘테마’, ‘이미지’의 증식이 출현한다. 이것은, 본래는 언표와 가시성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 것에 의해 가능하게 된, 그 우연의 접점을 ‘창출하고’ ‘다시 창출하는’ 작용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어떤 신화의 일부분을 ‘그린다’는 행위는 당연히 대부분 어떤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행위이기 때문이고, 또 어떤 그림을 말로 ‘묘사한다’는 행위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문자를 포함하여 어떤 이미지가 ‘읽힌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연의, 바꿔 말해 역사적으로 창안된 효과에 불과하고, 어떤 글귀로부터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하면, 그것 또한 똑같을 터이므로. 그리고 또 그 ‘가시성과 언표가능성’의 ‘역사적인 우연의 접점’을 ‘계승’하는 것이 ‘신화’이고, 그 ‘반복’이 의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르장드르가 신화란 세계의 설명이 아니라 그 설명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자. 분명 그 ‘우연의 접점’으로부터 ‘해석’, ‘설명’이 가능하게 되듯이 그런 특수한 ‘접점의 발생’이 있다. 블레이크, 미쇼, 아르토, 파솔리니, 뒤라스라는, 문학작품과 회화작품, 혹은 영상작품을 동시에 남긴 예술가들은 이것에 예민했던 것 아닐까. 이상은 윌리엄 블레이크 연구자 江口飛島(에구치 토비시마)씨의 구두 강연에 근거한다. 감사를 표한다.

    (주850) 가령 후스파의 교의와, 당시 최첨단 병기였던 장궁공격에 대한 저항전술로서의 후스파 군단의 ‘짐수레에 의한 가동 바리케이트 전술’ 사이에는 전혀 필연성은 없고 거기에는 우연의 관계만 있다고 말한다면 이해하기 쉬울것인가. 그러나 후스파는 이 전술을 가지고 십수배의 군세를 이끌고 원정 온 십자군에게 완승하였고 후스파의 투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주854) 확실히 해두자. 독자는 여기에서 다이어그램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루즈하게 쓰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국가든 무엇이든 다이어그램이라는 것 아닌가, 라고. 그러나 다이어그램은 가시성과 언표의 우연의 조우 ‘결과’이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논리적으로 도출한 것이다. 고로, 어떤 광도에 있는 가시성이, 어떤 언표와 중첩되어 의미와 주체를 산출하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적인 가시성과 언표의 중첩’ 자체에서, 가령 우리 자신이 ‘이러한 주체’로서 태어나 버렸다는 것은 필연이고, 운명이기조차 하다. 그 ‘우연에 의한 필연’에 의해서야말로 우리는 ‘이러한’ 주체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주체인 것에서야말로, ‘다이어그램’을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대항 싸움’의 도박장 한복판에 들어가고, ‘다른 다이어그램, 다른 중첩’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열어간다. 즉, 여기에서는 통상 정태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제3자를, 나아가서는 국가나 제도 등을 다이어그램이라고 부를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그것들을 ‘정태적이지 않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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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ぎらい』 p.181~182단어, 해석 입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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