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롱 3번째 - 암비치오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뿔옹
2017-09-26 18:50
275

스피노자는 암비치오(ambition)가 인간이 서로 공동체를 이뤄가며 살아갈 수 있는 시원적 욕망이라고,

그리고 마트롱은 암비치오를 '인간 공동체의 접합체'라고 표현했다.

홉스 역시 '야망의 추구'가 인간 상호관계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차이가 있다면 홉스에게 야망의 추구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홉스에게 야망은 권력의지로 나타나고, 인간 상호간에 나타나는 복합 정념(감정)들은 권력경쟁에서

나타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홉스에게는 공동체에서 벗어난 '분리된 인간'으로서의 개인을 넘어설 수 없다.

이에 반해서 스피노자는 '분리된 인간'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암비치오를 도출한다.

암비치오는 기본적으로 '정서 모방'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들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다는 점.

스피노자는 이 야망이 이기주의 혹은 이타주의가 아닌 그보다 더 시원적 장소에 위치해 있다고 말한다.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 기뻐하기를 원하며, 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냐고 질문하면서...

바로 여기서 지난주 논란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홉스와 스피노자 모두 동일하게 인간 상호간의 사회성의 토대로 '야망의 추구'를 보았다.

그런데 홉스는 이를 사회계약과 권력의지라는 것으로 결론지으면서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초를 놓았다.

반면 스피노자는 이미 분리된 개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모스가 <증여론>에서 보여준 것처럼

무사심하지 않으면서도 이익이 없는 방식의 공동체가 작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스피노자는 맞고 홉스는 틀린 것일까 혹은 스피노자는 선하고(비선형/복잡) 홉스는 악하다(단순/선형)고 말해야할까?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분명 인간의 자유 의지란 없다고 말했다. 만약 있다면 신적 의지만 있다고.

우리 개체들은 모두가 신적 의지의 필연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현재의 사회를 보면서 더 나은 사회를 머릿 속에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반응 아닐까.

홉스는 사회계약이 분리된 인간을 모을 수 있는 차악이라고 보았던 것이고,

스피노자 역시 의지는 없다고 말하지만, 현재의 무질서와 정념으로 요동치는 삶 속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가능함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들이 정념적 존재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정념의 모방이 인간을 

서로 필요한 존재로, 서로 함께 지낼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이것을 나는 홉스와 다른 스피노자의 의지라고 불렀다. 

동학들은  스피노자는 그 어떤 목적론적인 의도를 갖지 않으며, 자유의지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썼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의지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전제'가 다르고, 보는 관점/방향이 다른 것이다라고.

홉스와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말하는

평등을 전제로 하는 배움인가 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배움인가라는 물음을 떠오르게 한다.

랑시에르는 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배움이란 결코 '평등'을 이뤄낼 수 없다고.

평등을 전제로 했을 때, 어떤 방식의  배움과 정치가 가능한지 실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 암비치오라는 정서모방을 통해서

개인의 분리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증명 <에티카>!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한 바 역시 그렇지 않을까?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는 고정된 정치체제가 아니라 그 속에 암비치오라는 정서모방이

잘 일어날 수 있는 방식을 세밀하게 고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이는 정답에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험을 지속하는 한에 있어서 유효하다는 점.

여전히 아리송하다. 사전세미나를 하니 조금 나아지긴 하는 것 같은데.... ^^

댓글 3
  • 2017-09-26 21:30

    여전히 홉스적인 나를 이제는 놓아주자

     

    후기를 써야 하는지 알면서 며칠을 보내면서, 스피노자를 공부하는 나를 응시해본다.

    세미나가 시작한 이후 단시간동안 나는 영혼의 동요를 심하게 겪고 있다.

    네그리가 영혼의 동요를 정동의 확장이라고 보는 것에 따르면

    비록 수동적 정념에 빠져 있다하더라도 상호성에 의해 삶이 확장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파괴와 동시에 새롭게 형성되는 새로운 개체로서 나는 매순간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영혼의 동요 속에서 부정적 정념은 나를 슬픔으로 강렬하게 인도한다.

    왜일까?

     

    내가 이전보다 더 크거나 또는 더 작은 존재력이라고 말할 때나는 정신이 신체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상태와 비교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 크거나 또는 더 작은 실재성을 실제로 포함하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에티카 3부 감정의 일반적 정의중에서>

     

    영혼의 동요를 겪으면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떠오른 이 부분에서

    나는 현재의 내 완전성이 더 큰 완전성을 향해 가는 걸 수도 있겠다, 눈가리고 싶지만

    실제로 슬픔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더 큰 완전성을 향해 간다고 보는 것은 어림도 없다.

     

    오랜 사고의 습관을 허무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울까.

    여전히 체험하지 못한 관념 속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면서 발생하는 소외로 인해 나는 슬픔의 정념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인간상호적인 코나투스는 외부원인에 의해 끊임없는 간섭으로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이 코나투스를 나로 의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부적합한 관념을 갖게 되면

    그 속에서 소외는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면서도

    영혼의 동요를 느낀다는 것은 거기에 슬픔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원인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효용을 근거로 한 비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텍스트의 독해력이 떨어지는 순간에,

    또는 내적으로 내 역량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슬픔은 강하게 확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나를 소외로 인도할 뿐이다.

    지금까지 슬픔이 부정확한 관념에 의해 나를 파괴하는 쪽이었다면

    이제 사이클은 반전이 가능하다.

     

    요요님이 강조한 비교를 다시 읽으면서 깨닫는다.

    나는 정신이 신체의 현재상태를 과거와 비교하는 효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삶이 불편하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 새로운 신체로 변용하기보다는 현재를 부여잡겠다는 상상속에 있는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 질문을 만드는 일은 어렵다.

    지각장이 넓어진다는 의미는 관념이 신체활동과 맞물려 얻게 되는 비교를 통해서일 것이다

    후기를 쓰기전의 정념과 후기를 쓰는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정념을 체험한다.

    나는 매순간 파괴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중이다.


    스피노자의 기쁨이란 감정모방을 적합하게 인식하면서

    명석판명한 표상을 할 수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부디 감정모방이 인간공동체의 포괄적 코나투스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말자.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되면 더욱더 강한 사랑을 느낀다.

    나의 정념이, 주체로서 나의 정념이 아니라는 사실,

    사이에서 매순간에 새롭게 발생하는 것이 정념이라는 사실에 대해 

    인식은 못하더라도, 부디 의식이라도...

     

    • 2017-09-27 09:33

      세미나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면.. 그건 좋은 징조라 생각해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것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니까요.

      내가 알던 게 진짜 아는 거였나, 뭐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스피노자는 어려워요. 그 내용도 형식도.

      띠우님만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이건 절대 위로 아님!)

      어렵기 때문에 읽고 또 읽으면서 스피노자의 개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사키 아타루 같으면 이런 것을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스피노자적 주체가 된다고 말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슬픔이 결코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러니.. 같이 계속 읽어보자구요..^^ 

      다행히 우리에겐 스피노자 아닌 것들 중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많으니

      그것들의 도움에 의지하면서라도.ㅋ

  • 2017-09-27 13:47

    정서모방이 불러오는 권력투쟁과

    서로에 대한 적대로부터 시작되는 권력투쟁의 차이로

    스피노자 정치학의 본령을 탐구하는 게 마트롱의 작업인 듯 해요

    둘 다 전쟁이란 양상을 가져오지만 그 원인을 다르게 파악하고

    원인이 다르다는 건 결과 역시 달라지지 않을까요?

    홉스와 스피노자는 뭐가 같고 다른가 따져보는 일

    이번주에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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