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책 03 - <청춘의 커리큘럼> 시대의 끝자락에서 청춘에게 말을 걸다

차명식
2018-07-2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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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이 사랑한 책들 03  <청춘의 커리큘럼> 

시대의 끝자락에서 청춘에게 말을 걸다

 

글 : 차명식

 

 


 

 

  대체 왜, ‘커리큘럼’인가?

 

  커리큘럼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currere에서 왔다. 이 currere는 ‘달린다, 뛴다’라는 뜻으로 보통 경주장이나 경주 그 자체를 의미하며, 여기서 나아가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나 활동의 연속을 뜻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이 말을 교육 분야에서 주로 사용함으로써 학생들의 달리기, 혹은 학생들이 달리는 트랙 = ‘교육 그 자체이기도 한 교육과정’으로 쓰고 있다.

 

  여기서 트랙이라 함은 주자가 따라 달려야 하는 선을 의미한다. 주자가 직접 트랙을 긋고 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트랙은 누군가에 의해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그어진 선, 주자들에게는 ‘주어지는 선’이다. 즉 『청춘의 커리큘럼』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청춘이여, 이 선을 따라 달려라’가 된다. 그와 같은 발화는 사실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이미 청춘의 멘토로 불리는 수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있어 왔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저자는 글의 서문에서 그러한 멘토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책을 시작한다.

 

  어떤 이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면서 청년들을 위로하려 했다. 성공한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누릴 것 다 누리고 있는 예외적인 엘리트의 위로는 청년들에게 동일시의 선망을 불러일으킬지언정 그들의 고통에는 가 닿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또 어떤 이는 청년들에게 “토플책을 놓고 짱돌을 들라”고 했다. 청년들은 그런 선동에도 냉소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7쪽)

 

  힐링과 88만원 세대. 한때 청년 담론을 주름잡았던, 어쩌면 아직까지도 주름잡고 있는 키워드들이다. 한쪽은 청년 세대의 고통을 낭만적인 수사로 얼버무리고, 다른 한쪽은 사회의 부조리를 뒤엎고 일어나라 청년들에게 주문하지만 이 극과 극의 태도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청년이여, ~ 하라!” 비단 이 멘토들뿐일까? 청춘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넘쳐나며 청춘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많고도 많다. 청춘이여, 아픔을 견뎌라. 사회에 맞서라. 그러면서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고……아무튼 이 시대의 청춘은 주문받는 존재다. 그들의 달려야 할 트랙은 길고 길어서 과연 끝이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 사실을 알기에 청춘에게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냉소만이 남았다. 이계삼은 그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한다.

 

  이 사회는 청년들을 타박하고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8쪽)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청춘의 커리큘럼』이 아닌가?

  여기서 나는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살폈듯 커리큘럼은 교육의 트랙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교육이란 교사가 학생에게 무언가를 명령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계삼은 그 요구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치 그러한 방식으로는 청춘들과 접속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는 여기서부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끝에 다다랐다

 

  『청춘의 커리큘럼』은 그 제목처럼 일종의 연강連講과도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 저자인 이계삼은 스무 개에 이르는 다양한 테마들을 선정하고 테마마다 그에 걸맞은 고전들과 저자들을 배치한 뒤 자신의 독해를 통해 그것들을 한데 엮어낸다. 그리고 그토록 수많은 테마들을 아우름에도 불구하고 그 독해들은 결국 현 시대에 대한 하나의 진단으로 귀결된다.  그 진단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끝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우리를 끝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종말론적 예언이나 자연 재해가 아니다. 오히려 근현대 이후 우리 사회를 유지시켜온 바로 그 시스템들이 한계에 봉착함으로써 찾아온 ‘끝’이다. 경제는 끝없이 성장할 것이고 기술은 영원히 발전할 것이며 에너지는 바닥나는 법이 없다는 믿음,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의 진보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바로 그 믿음 위에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들 말이다. 이계삼은 더글러스 러미스와 제임스 쿤슬러 등 우리에게 익숙지는 않지만 장중한 울림을 지닌 비주류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끄집어내어 우리의 일상을 유지시키고 있는 그 모든 시스템들을 공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폭로한다 : 경제성장은 빈부격차를 해결할 수 없다. 석유는 고갈될 것이며 원자력은 언제라도 대 재앙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내건 국가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인민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는 삶의 양식들은 사실 모두 강요된 것이다.

 

  이 마법에 걸리면 숲의 나무가 잘려나가고 주차장이 되어버리는 것을, 농토에서 농민이 쫓겨나가고 비행기를 띄우는 활주로가 되어버리는 것을 진보로 여기게 된다. (...) 실은 국가 권력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제 1의 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져도, 여전히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끔찍한 착각을 의심하지 못한다. 어찌할 수 없는 혹독한 경쟁과 강제노동 속에 떠밀려 들어와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믿는다. (71쪽)

 

  이 모든 과정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우리의 현명한 선택이 결집 되었다면 전환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어쨌든 인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최악의 선택만을 이어왔다는 것, 우리의 삶을 지속할 가능성을 서서히 잃어가는 방식으로 이끌려온 것만은 분명하다. (145쪽)

 

  이러한 ‘폭로’가 중대한 의미를 갖는 까닭은 감추어져 있던 진실들을 드러낸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상이 지금 이대로 이어질 수 없다는 -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이 폭로는 우리의 삶과 사고의 방식에 대해 크나큰 변화를 요구한다. 머리로 받아들이고 몸으로 실천해야만 하는 변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라고 하는, 비현실적이라고 밖엔 느껴지지 않는 요구. 그렇기에 이러한 폭로와 맞닥뜨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밀려 외면하거나 관성에 따라 이를 무시하고 현재 삶의 형태를 유지하려 한다.

 

  물론 청춘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처한 삶의 조건이 아무리 가혹하다 해도, 변화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때때로 그 고통 이상일 수 있다. 따라서 이계삼의 커리큘럼은 폭로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로는 대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말을 거는 교육

 

  저자 이계삼은 11년 동안을 국어교사로서 교단에 섰다. 나 역시 학교 교사는 아니지만 문탁 네트워크에서 몇 년 동안 중 · 고등학생들과 인문학 수업을 했다. 그 때문일까. 나에게는 유독 독자들에게서 ‘자신의 말’을 이끌어내려는 저자의 노력이 눈에 밟힌다. 그는 분명 청춘들에게 닿기 힘든 언어를 말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청춘들로 하여금 말하게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청춘들의 입은 여전히 무겁다. 지금까지 앞으로 펼쳐질 무한한 세상에 대해서만 들어왔는데, 그 세상에 나아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듣기만 해왔는데 이제 와서 모두가 한 시대의 막바지에 서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어쨌거나 이 책의 제목은 ‘커리큘럼’, 교육과정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교육이란 자기 말을 하는 것이기보다는 주어지는 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읽고, 쓰고, 외우고, 얼마나 잘 외웠는지 읊어보는 것이다. ‘그가 뭐라 말했는지 말해보라’는 명령에는 익숙하지만 ‘그가 말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은 낯설다. 머뭇거리다가 이내 묵묵히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 나라의 교육은 청춘들에게서 말할 힘도 들을 힘도 앗아갔고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타자들을 마주할 기회마저 박탈했다. 청춘들은 제각기 고립된 유령이자 투명인간으로서 말라 죽어간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이후 엄기호는 덕성여대, 연세대 원주캠퍼스, 그리고 상지대 학생들과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자살한 카이스트 학생들이 그들의 ‘동료’에서 그저 ‘동시대인’으로, 더 흐릿한 동시대인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증언한다. (...) 징벌적 등록금으로 600만원을 납부한 카이스트 학생이든, 진종일 이어지는 알바로 피곤에 절어 울면서 과제를 하는 덕성여대생이든, ‘팔려가기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는 심적 고통으로 선배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서울대생이든, 그들은 이 체제가 아로새긴 분명한 상처가 있음에도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홀로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 모두 투명인간이며 유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위기란, 혹은 대학생의 삶의 위기란, 유령이 유령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투명인간이 투명인간을 향해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다. (85쪽)

 

  청춘은 만나지 못하고, 그들은 대화하지 못하고,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함께하지 못하며, 그들은 자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이 오늘날 청춘이 처한 현실이다. 결코 ‘해결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해결되지 않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말하도록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말하도록 할 수 있는가? 저자는 교육운동가 조너선 코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대답한다.

 

  교사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거짓 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교단에 로봇을 세우지 않고 사람을 세운 이유인 것이리라. 아이들 또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일인칭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외국의 민간인 마을에 폭탄과 네이팜탄 발사 버튼을 누르는 완벽한 일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31쪽)

 

  물론 한쪽이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해서 다른 한쪽 역시 그래야 할 의무는 없다, 따라서 이계삼-코졸은 알고리즘이나 법칙, 요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일, 그럼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사가 ‘자신의 말’을 하고 그를 본 아이들로 하여금 역시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하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대화는 양자가 서로 말하고 들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마주침의 연속이며 수많은 타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타자가 있는가 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개 전자는 가까이하고 후자는 멀리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를 구성해나간다. 나의 취향, 나의 사상, 나의 가치관, 나의 신념. ‘나’는 홀로 오롯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수많은 타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구성된다.

 

  즉 우리는 자신의 말을 할 능력과 상대의 말에 진정으로 귀 기울일 능력, 두 가지 힘을 가지고 타자의 앞으로, 마주침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두 가지 힘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타자를 만나지 못하고 오직 거울 속의 자신만을 마주한다.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말만을 듣고, 그리하여 자신의 세상 안에 갇힌다. 그 사람의 구성은 그 시점에서 정지한다. 이계삼은 그와 같이 석화되어 가는 청춘들을 다시 한 번 제 발로 설 수 있게 하기 위해 그토록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마주하라, 더욱 더 강렬한 목소리로

 

  헌데 이쯤 되면 어째서 이계삼이 그토록 절박하게 청춘들과 교신하려 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청춘의 커리큘럼』의 마지막 장에는 마치 그에 대한 대답처럼 이계삼 본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토록 많은 사상가들의 목소리와 세상의 일면들을 아울렀음에도 서문과 마지막 장, 시작과 끝에는 이계삼 자신이 서 있는 것이다. 그 마지막 장의 제목은 <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가>이다. 머리말에서 그는 교사였지만, 마지막 장에서 그는 교사이기를 그만두었다. 그는 학교 교육이 아이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오직 그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임을 깨닫고 11년간의 교직 생활을 스스로 끝냈다.

 

  교사로 일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의 편에 서서 학교 교육의 나쁜 관행과 맞서 싸우는 일을 기쁘게 감내하고자 했다. 충분히 각오했던 일이었고, 그런 일들로 교직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분노와 슬픔으로 길을 잃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아이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아이들이 청소년 때보다 훨씬 못한 얼굴로, 주눅 들어 굽은 어깨로 뒤척이는 모습을 수없이 만나게 된 것이다 (...) 초중고 12년, 대학4년, 16년을 정말 죽을 것처럼 달려온 아이들에게 이 사회는 왜 이렇게 형편없는 대접을 하고 있는 것인가? (6쪽)

 

  그 분노, 그 슬픔.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이 자리에 교실을 놓도록 했다. 나는 미약하게나마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나 스스로가 20대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와 그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문탁 네트워크에 머무르면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마주치는 동년배들, 그 외 수많은 타인들에게 말을 걺에 있어 항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나름대로의 삶의 고통이 있다. 그것에 대하여 내가 왈가왈부하는 것이 옳을까? 내가 경험한 바 없는 고통들 – 아니, 설령 내가 경험했던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무언가 말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나는 내가 뱉어내는 말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현실에서 이계삼이 택한 방법은 놀랍게도 더더욱 과감해지는 것이다. 독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신중히 말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하게 그가 보는 세상을 드러내고 그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 그것이 그가 독자들을 만나는 방식이다. 원자력 문제를 대하는 국가의 위선, 정당정치라는 시스템에 존재하는 분명한 한계, 사창가의 포주가 되어버린 대학, 석유 시대를 끝내야 할 당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지지. 숨 쉬듯이 당연히 존재해온 상식들을 거침없이 공격하고 모든 게 끝나간다는 사실을 들춰냄으로써 독자를 불편하게 하며 그 사실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만남의 강도는, 서로를 확장시킬 수 있는 만남은 그 정도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은 그와 같은 만남을 통해서라도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포효하라. 그 다음은 그 포효가 닿던가. 아니면 닿지 못해 서로가 외로이 침몰하던가다.

 

  교사들이 중립적인 척, 객관적인 척하면서 드러내는 완곡한 표현들은 인내와 절제의 상징이 아니라 문젯거리를 만들지 않고 그저 무난하게 이 상황을 넘어가려는, 무기력과 안일의 적극적인 표현일 뿐이다. (...)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며,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인 것이다. (233쪽)

 

  이것이 그가 시대의 끝에서 청춘과 대화하는 방법이다. 그는 여러 사상가들과 고전들을 통해 자신의 눈에 비치는 세상을 자신의 말에 거침없이 실어낸다. 그리고 독자들 역시 거침없는 자신들의 말을 건네주길 바란다. 설령 그가 바라보는 현실에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는 그 현실을 설명하는 그의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정녕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말에 동의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무어라 생각하는지 그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주눅 들지 않고, 자기방어에 매달리지 않고서. 그와, 우리와, 모두가 처해있는 현실을 변화시킬 힘은 거기서부터 온다. 명령하지 않고 요구하지도 않는 가르침. 마주침이야말로, 그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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