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책 02 - <이 폐허를 응시하라>폐허에서 피어나는 자율적 개인의 도덕성

달팽이
2018-07-2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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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이 사랑한 책들 02  <이 폐허를 응시하라>

폐허에서 피어나는 자율적 개인도덕성

    

 

 

 

글 : 달팽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jpg

 

우리는 누구인가?  

 

문탁에 처음 오는 신입들은 문탁이 친절하지 않다고 한다. 꽤 상냥한 웃음으로 맞이하는데도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불편함은 다른 데서 보기 힘든 개인과 전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문탁은 다양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만들어내는 변화하기 쉬운 균형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간다. 개인이나 팀의 활동이 살짝 방향을 틀면, 회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내 전체 지형이 변하기 때문에 역할은 수시로 달라진다.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성을 믿고 끌어내는 이런 사람관계는 때로 오해와 갈등을 불러오지만, 나는 이 때문에 우리의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탁의 이런 운영원리는 아나키 철학에 맞닿아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없는 자율적 공동체, 현재가 미래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예시적 정치.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우둔한 민중을 교양하고 선도하는 대문자 투쟁이 아니라 특수한 것들로부터 자기자리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다른 정치의 실현. 이런 아나키즘의 철학과 이상은 지나치게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는다. 비판의 핵심에는 인간존재에 대한 상반된 믿음이 있다. 우리는 과연 자율적 공동체를 이루어낼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가?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자율적 공동체가 가능하리라는 믿음 쪽으로 우리를 조금 더 다가가게 한다. 그는 인간 도덕감정의 기원을 진화의 기억과 사회성의 본능에서 찾는다. 그는 시베리아 탐험시절 동물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동종간의 생존경쟁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여러 동물들의 예를 통해 상호부조의 사회성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최대의 무기임을 보여준다. 동물의 상호부조와 마찬가지로 원시사회도 개인의 횡포를 억제하고 평등의 원리를 확립하는 관습과 풍속으로 유지되었으며, 중세에도 수공업 길드, 촌락공동체를 통해 상호부조의 문화가 이어져왔다.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인류의 특징은 아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꿈꾸는 아나키 공산주의는 자율적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부터 나왔다. 권력의 지배와 단절된 자유로운 개인은 타인의 이해를 고려하여 이웃을 도우려 하고, 인류 진보의 거대하고 힘겨운 운동에 기여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존재이다.

 

우리는 크로포트킨이 오랜 연구와 관찰을 통해 찾아낸 자율적 개인의 도덕성이 모습을 감춘 시대에 살고 있다. 근대 이전 가축을 풀어놓던 공유지가 울타리로 막히고, 도시에 대공장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노동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이야말로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하는 무한경쟁의 시대는 국민을 보호하는 복지의 영역마저 자본의 손에 넘겨버린다. 국경이 없는 자본은 지구 곳곳을 착취해 몸집이 불어나고,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근대인들은 무한경쟁의 대열에서 진이 빠질 때까지 달리거나 지쳐 나자빠진다. 낯선 사람은 무조건 경계하라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세상이 아닌가? 우리는 벌써 진화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러한 딜레마들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이다.

    

 

 

폐허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공간  

 

예술, 문화 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여전히 우리 이웃 가운데 살아있는 연대와 상호부조의 도덕감정을 재난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찾아내고 있다. 대재난 속 인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허물고 지옥 같은 폐허 속에 출현하는 낙원을 발견한다. 지진이나 폭격, 태풍이 닥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타심이 발동해 자기 자신과 가족,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타인과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보살피는데 참여한다는 사실을 여러 예들을 통해 보여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멕시코시티의 대지진, 9/11의 뉴욕, 카트리나로 지옥이 된 뉴올리온즈까지, 어디에서나 그 장소에 있는 재난 당사자들은 즉석에서 질서를 만들어내고 침착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돌보았다.

 

 

증언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들은 재난 속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상상과는 반대로 쾌활함과 즐거움까지 느끼며, 사태에 냉정히 대처하면서도 대단히 침착하게 행동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반복하여 전해준다. 큰 재앙을 비참하게 느끼는 것은 직접적인 희생자들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이후 상황을 회상하는 에드윈 에머슨은 “··길거리 급식소들이 도시를 점령하자 유쾌한 소란이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어디서건 천막에서 흘러나오는 기타와 만돌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모든 재난에는 고통이 있고, 정신적 충격이 있으며 죽음과 상실이 따르지만, 한편에는 깊은 만족감과 새로운 사회적 유대, 자유도 존재한다. 캐나다의 작은 항구도시 핼리팩스에서 대형선박 폭발을 경험한 로라 맥도날드는 이렇게 기록한다. “종교와 계급, 민족에 의해 분열되고, 계급구조가 엄격한 핼리팩스가 잠시나마 하나가 되었다.··” 재난으로 인해 공고했던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면 삶은 오직 현재에만 속하여 비본질적인 것들은 작아지고, 놀라운 해방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많은 이들이 정서적으로 오히려 풍요로워지며 위기나 압력 없이 목적의식과 친밀감을 되찾고 공적 삶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9/11 당시 뉴욕, 무너지는 건물 안에 있던 25000명은 질서 정연하게 대피했다. 부상자들을 옮길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서 기다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침착하게 서로를 도와 스스로를 구조했다. 반면 먼 곳에서 지켜보며 상상을 보태어 상황을 전달하는 미디어들은 달랐다. “뉴스는 지나치게 흥분하여 비행기가 건물과 충돌하고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만 반복해서 보여주었죠.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것은 거리에서의 경험과 사뭇 달랐어요. 거리에서 나는 사람들과 연결되었다는 걸 느꼈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9/11생존자 테일러의 말이다.

대중매체는 재난을 스펙터클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보여준다. 재난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공황과 폭도로 표현되고, 경찰과 군대의 진압대상이 되며, 몇몇 영웅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질서를 회복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재난을 할리우드 영화처럼 생각하는 엘리트들에 의해 재난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재난 디스토피아가 만들어진다. 이재민을 잠재적 약탈자로 간주하고 가둬야 할 적으로 취급하여, 출구를 막고 방어선을 치고, 무턱대고 총을 쏘아대는 자경단을 만들고, 소문들을 확대보도하는 매스미디어가 결합하여 재난보다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낸다. 레베카 솔닛은 이것을 하나로 묶어 엘리트 패닉이라 부른다. 재난은 사람들을 연대와 우정의 공동체로 만들기도 하지만 위협적인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레베카 솔닛은 여러 번 강조하여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웃을 재난으로 인한 피해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집과 상점에 있는 재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재난 후 최악의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남들이 야만적 행동을 할 것이므로 자신은 야만에 방어적 행동을 취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면서 자신들을 질서의 수호자라 믿는다. 이런 홉스적 인간들은 소수의 엘리트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미디어를 믿는 사람들이다.

재난을 직접 대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돕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준다. 재난 직후 국가기관의 개입이 미치지 못하는 며칠 동안에 지배를 벗어난 자율적 개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재난 유토피아가 만들어진다. 재난 유토피아는 마치 혁명으로 성취한 해방공간과도 같다. 크로포트킨이 꿈꾸었던 아나키공산주의 사회가 그곳에서 실현된다. 재난의 역사는 인간존재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믿음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한다.

    

  

 

재난유토피아 vs 재난자본주의 복합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도덕감정은 깊이 잠들어 나날의 삶이 재난이 되고 있다. 곳곳에서 배제와 고립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전방위적인 자본의 공세는 평범한 개인들마저 엘리트 패닉에 빠뜨려 친구를 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나오미 클라인이 쇼크 독트린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본은 재난을 기회로 몸집을 불린다. 재난당사자들이 만들어낸 재난유토피아는 외부가 개입하면 빠르게 모습을 감추고, 국가와 자본이 손을 잡고 재난자본주의 복합체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폐허에 새로운 자본의 성채가 건설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 해안을 쓸어버린 쓰나미 이후 그곳에는 초호화판 리조트와 관광레저시설들이 들어섰으며,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강제로 이주되었다. 부시정부는 9/11이후 쇼크에 빠진 세계시민들에게  '문명의 충돌', '악의 축', '이슬람 파시즘', '국토안보' 등의 새로운 단어들을 사용하며 9/11테러사건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해외에서는 민영화된 전쟁을 일으키고, 국내에서는 사기업들의 안보복합체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뉴올리언즈에서 카트리나는 민영화를 확대할 절호의 기회가 되어 주었다. 공립학교 교사를 모두 해고하고, 학교제도를 사립학교의 특성이 강한 차터스쿨로 바꾸었으며, 가장 피해를 덜 입은 공공주택을 폐쇄해버렸고, 빈민들을 위한 보건의료의 원천이었던 채러티 병원이 사장되도록 방치했다. 이러한 결정들은 시스템을 민영화하고 빈민들을 쫓아내려는 갈망의 이데올로기적 선택이었다. 전쟁, 테러, 자연재해, 주식시장 붕괴 같은 총체적인 대규모 충격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린 자리에 즉각적으로 생겨난 재난유토피아를 무너뜨리고 재빨리 경제적 쇼크요법이 처방된다. 정상상황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자유시장 프로그램이 강행되는 것이다. 여기에 저항하는 대중에게는 물리적 충격이 가해진다.

결국 재난 속에서 실제로 진행되는 사태는 즉석에서 재난유토피아를 만들어 내는 당사자 시민들과 그들을 적으로 몰고 재난자본주의 복합체를 만들어 상황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통제하려는 국가와 자본이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내전 같은 상황이다. 이 전쟁에서 자본과 국가는 연이어 승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지구 끝 어디라도 달려가 자신의 이익이 되어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재난현장에서 피어나는 재난유토피아 따위는 잠시 피었다 지는 꽃처럼 허무한 것인가?

    

 

 

희망의 씨앗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상식적인 용어가 되었다. 흔히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외상은 분명 실재하지만 보편적이지는 않다. 어쩌면 그들을 약자로 보는 시선이 장애의 원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소중한 것들의 상실이 삶의 구조를 다시 구축할 기회를 제공하여 새로운 심리적 구조를 만드는 외상 후 성장이라는 심리학 개념이 있다. 상실과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집단 내의 개인들을 보살피는 더 나은 방식을 도출할 수 있다. 세월호와 촛불집회는 평범한 대한민국 장삼이사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고, 사회 전체가 새로운 삶의 구조를 희망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안 한다면, 또 우리에겐 힘이 없다고 수긍하며 모든 것은 나빠질 대로 나빠질 거라고 상정한다면 이는 모든 것을 정말 가능한 최악으로 만드는 데 협력하는 겁니다. 참여하고, 참여하지 않는 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제게 있어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 우리의 참여가 좌우합니다. 우리에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책임이 있어요.” 레베카 솔닛은 2017년 초 경향신문과의 대담에서 망각은 절망을 생산하지만 그 시간에 기억은 희망을 생산하고 있다고, 절망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간에 존재하지만 승리의 스토리를 관찰하고 비폭력적인 사회변화가 일어났던 방식을 이해하고자 배워나간다면, 희망은 자라난다고 말한다. 그녀는 모두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아큐파이(Occupy) 운동1이 학생들이 지고 있는 부채, 건강보험, 주택담보대출 등 파멸을 부르는 곳곳을 바라보도록 이끌었으며,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에게로 그리고 세계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마틴 루서 킹이 간디로부터 배워 온 비폭력저항의 기술은 쥬코티공원에서 다시 아랍의 봄에서 남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절망이 일상의 재난이 된 세상에도 희망을 일구어내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전 시대 누군가가 뿌린 씨앗들이 여기저기서 꽃을 피운다. 꺽이고 시들어 사라지더라도 또 그 꽃이 뿌린 씨앗은 어디에선가 싹을 티운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이후 대피소로 변한 유니언 광장에는 나중에 미스바 카페라 이름 붙여진, 홀스하우저라는 여성이 카펫과 시트를 이어 붙여 만든 대형천막이 있었다. 허물어진 건물에서 끌고 나온 화덕으로 낯선 사람들, 먹을 것이 필요한 모두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던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를 묶어주는 보살핌 속에서 모든 참여자가 주는 사람이자 받는 사람이 되는 상호부조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그곳은 주고받음이 자연스러워 누가 주었는지 누가 받았는지도 모르게 상호부조가 일어나는 장소였다.

문탁의 독특한 사람관계는 우리가 주고받음에 능숙한 존재들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아직은 미숙해서 삐걱대더라도 폐허에서 피어나는 유토피아처럼 때때로 함께 만들어내는 연대의 순간들이 문탁을 계속 살아가게 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오랫동안 낯선 존재들을 진화의 기억을 간직한 크로포트킨적 인간으로 반갑게 맞이하길 바란다.

니체는가장 용감한 동물이자 고통에 가장 잘 단련된 동물인 인간은 고난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만약 고난이 어떤 의미를 제공한다면 고난을 원할 뿐 아니라 추구하기까지 한다.”2고 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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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1<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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