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청년 #5 | 장타이옌,전사(戰士)인 스승

문탁
2018-10-0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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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타이옌, 전사(戰士)인 스승

- 애닯고 아득한 청춘의 모퉁이, 그곳에 늘 서 있는 스승들(2) -

 

 

 

 

1. 단발과 혁명

 

루쉰은 1936년 10월 17일, 「타이옌 선생으로 하여 생각나는 두어 가지 일」을 쓴다. 스승인 장타이옌 선생이 사망한 것이 6월 14일. 쓸쓸한 그의 추도식을 보면서 스승을 추억하는 글을 쓴 것이 10월 9일. 그러나 좀 미진했고 더 쓰고 싶은 게 있어서 새로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글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다음 날 쓰러졌고, 그 다음 날 결국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글은 루쉰이 죽기 이틀 전에 쓴, 루쉰의 마지막 글이 된다.

 

그런데 그 글은 죽기 이틀 전에 쓴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아주 심상하게 시작된다. 지난 번 장타이옌 선생에 대한 글을 쓴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쌍십절(雙十節) 25주년이었다는 것. 시간이 참 쏜살같다는 것. 그런데 다시 신문에서 “신진작가가 노인을 증오하는 글을 읽고 찬물을 반 바가지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 그러면서 자기가 감탄할 때 하는 정수리를 만지는 손동작도 구닥다리 유물이지만, 그것은 원래 마침내 변발을 잘라냈다는, 승리의 제스추어였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루쉰은 변발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사실 당시 정세는 엄중했다. 1927년의 백색쿠데타로 정권을 쥔 장제스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동지였던 공산당을 섬멸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5차례에 걸쳐 감행된 초공작전(剿共作戰) (혹은 위초작전圍剿作戰이라고도 불린다)이 그것인데 심지어 1933년 마지막 작전 때는 100만의 군대와 500여대의 비행기가 동원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백주에 살해되거나 체포되어 고문 받고 처형당했다. 루쉰과 깊은 우정을 나눴던 취추바이(瞿秋白)도 그 전 해인 1935년 6월 처형당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출판물과 영상물에 대한 검열도 극에 달했다. 마치 우리나라 유신 말기처럼. 하여 루쉰은 “우리는 이런 곳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부기」, 『차개정잡문』전집8, 293쪽)고 쓰기도 했다. 그리고 루쉰은 이 때 이미 폐병이 온 몸에 퍼져있었고, 몸무게는 40킬로가 안 될 정도로 쇠잔해있었다.(8월1일자 루쉰의 일기에 따르면 루쉰의 몸무게는 38.7킬로였다) 그런데 루쉰은 마지막 글에서 마치 에피소드 같은 변발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일단 그 글의 요점은 “내가 중화민국을 사랑하여 입이 부르트게 말을 하고 혹시라도 쇠퇴할까 염려하는 것은 거개가 변발 자를 자유를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1911년의 10월10일이 되었다. 나중에 사오싱에서도 백기가 걸려 혁명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혁명이 나에게 가져다준 최대의 그리고 가장 잊기 어려운 좋은 점은 이때부터 이마를 내놓고 고개를 들고서 유유히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는 비웃거나 욕하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변발이 없었던 친구 몇 명은 시골에 올라와서 만나자마자 자기의 맨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 나온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결국 이런 날이 오고 말았어’라고 말하면서‘

만약 나에게 혁명의 공덕을 찬송하고 ‘울분을 토하라’고 한다면, 나는 가장 먼저 변발을 자른 일을 말할 것이다.” (「아프고 난 뒤 잡담의 남은 이야기」, 1934.12.17., 『차개정잡문』, 전집8, 262쪽)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맥락 역시 실용적 단발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평범하다. 바로 단발로 인해 엄청한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자신의 단발이 타이옌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오랑캐의 무능에도 합당한 지위를 얻지 못하는 한족의 현실에 분개”하면서, 옛 오, 월 지역의 백성답게 머리카락을 바짝 자르는 일 같은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혁명성을 띤 행위가 아니었고 다만 불편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모자를 벗을 때도 불편했고 체조를 할 때도 불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일로 말미암아 루쉰은 같은 유학생에게도 경멸을 당하고 유학생 감독관에게도 닦달을 당하는 지경에 처한다.

 

그 경험 때문에 루쉰은 귀국 후 어쩔 수 없이 가짜 변발을 하나 사서 그걸 쓰고 집에 갔단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곧바로 분석에 들어갔고 가짜 변발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럴 바에야 가짜 변발을 벗어던지고 양복을 입고 다니자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제 사람들은 대놓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길을 걸으면, 길 자체가 비아냥에 욕지거리”였다. 심지어 어쩐 사람은 뒤쫓아 오면서 욕을 퍼부었다. 시건방지다고 했고, 남의 여인과 간통했다고도 했고, 심지어는 가짜 양놈이라고, 외국과 내통했다고도 했다. 그것은 ‘참수’로 다스려질 수도 있는 죄명이었다. (「두발이야기」, 1920,10, 『외침』 /(「아프고 난 뒤 잡담의 남은 이야기」, 1934.12.17., 『차개정잡문』) 그러니 혁명으로 인해 더 이상 단발이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세상. 그보다 좋은 일이 있겠느냐는 반문.

 

 

 

1911 신해혁명

 

 

그런데 루쉰의 글을 읽을 때는 말해진 언표 이면을 좀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말에 '뻥'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여서이다. 거두절미 생략하고 수없이 많은 상황을 압축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씩 그 촘촘히 주름져 있는 말들을 풀어낼 필요가 있다.

 

루쉰은 신해혁명을 통해 혁명의 민낯을 보게 된다. 그토록 바라던 혁명. 그런데 곧바로 찾아온 혁명에 대한 회의(懷疑). 이번에도 문제는 단발이다. 신해혁명 이후 혁명군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잡아 머리를 잘랐다. 변발은 만주족의 풍습이고, 단발은 배만(排滿)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에 찬성한다면 머리를 잘라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 후 왕조복귀의 정세가 도래하자마자 다시 가짜 변발을 사러 난리 법석을 벌였다. 그러다 다시 그것이 소문에 불과했다고 하자 다시 단발이 유세를 한다. (「야단법석」, 1920.10, 『외침』) 도처에 아Q는 넘쳐났고 중국은 누군가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 한, “스스로 머리털 한 올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말 머리털을 자르는 것이 혁명이 될 수 있을까?

 

그 글에서는 장타이옌 말고 두 명의 인물이 더 등장한다. 한명은 우즈후이(1865~1953). 그는 루쉰이 유학을 가서 처음 참가한 집회에서 만주족 배척을 소리 높여 이야기 하던 용감한 청년이었다. 당시 그는 청조 관리와 투쟁하여 부상을 입은 것으로 유학생 사이에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후 우즈후이는 장제스의 청당운동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황커창(1874~1916).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우즈후이 등과는 다르게 “변발을 자르지 않았고 소리 높여 혁명을 외치지도 않았”지만 딱 한번 진정으로 반항한 적이 있다고 한다. 황커창은 "일본인 학감이 학생들에게 웃통을 벗지 말라고 했는데 한사코 웃통을 벗고서 사기로 만든 세숫대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목욕탕에서 마당을 지나 슬렁슬렁 자습실로 걸어갔던 것이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올듯한 풍경. 그래서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해지는 장면. 그런데 글은 딱 거기까지만 쓰여진 채 중단되어 있다.

 

마지막 글. 백 투더 1903년. 혁명적 파토스가 넘쳐흐르던 그 시대에서 지금은 조롱당하는 장타이옌은 비장하게 단발하고, 지금은 장제스 편에 서 있는 우즈후이는 머리에 흰 붕대를 메고 허세 쩔게 혁명을 부르짖고, 이미 신해혁명 직후 과로사 한 황커창은 여전히 변발(辮髮) 한 채 무심한 듯 반항하고 있다. 하여 생각한다. 1936년 "이런 시대에"서 거의 소멸해가는 육체를 붙들고 루쉰이 썼던 그 미완의 글은 변발에 대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여전히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장타이옌이 루쉰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변발이 아니라, 혁명, 여전히 미완인 혁명의 문제였다.

 

 

변발을 자르는 혁명

 

 

 

2.학자보다 혁명가, 장타이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루쉰은, 자신의 단발은 무슨 거창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실용적으로 불편해서 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수없는 혁명의 배반을 경험하면서 사후에 재구성된 것일 수도 있다. 1903년 루쉰이 자신의 단발을 기념하여 쓴 <자제소상自題小像>이라는 7언 절구는 스물 셋 청년의 애국적 파토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靈臺無計逃新矢 영대무계도신시 내 마음은 결국 큐피트의 화살을 피할 수 없고

風雨如磐闇故園 풍우여반암고원 비바람은 무겁게 덮여 고향 땅이 어두워진다

寄意寒星荃不察 기의한성전불찰 차가운 별에 부친 마음 고운 임은 몰라주어도

我以我血薦軒轅​ 아이아혈천헌원 나의 이 뜨거운 피 내 조국에 바치리라

(「작은 사진에 부친 시」, 『루쉰 시를 쓰다』, 역락, 45쪽)

 

같은 해 7월에 쓴 「스파르타의 혼」이라는 작품 안에 수록된 전투가(「戰哉歌」) - “싸우자! 이 전장은 위대하고 장엄하도다” - 에서도 그런 기백이 넘쳐난다. 그 즈음 루쉰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는 유학생에서 조국에 헌신하는 혁명가로 빠르게 이행 중이었다. 그리고 루쉰 등에게 혁명적 파토스를 전파하는 일본의 중국 혁명가들. 그 선봉에 장타이옌이 서 있었다.

 

 

 

1903 단발기념 사진

 

 

장타이옌은 청말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정통적인 고증학 훈련을 받은 국학자이면서 동시에 옌푸를 통해 서양 근대 진화론을 받아들인 중국의 신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문을 좇아 고증학자의 길을 버렸고, 국학과 불교를 통해 옌푸의 유물론에 반기를 든 복잡하고 독창적인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의 학문을 “경서를 익히고 박학(朴學)을 근수(謹守)했으며...유독 손경(순자)와 한비자...이어서 불경을 열람...미륵과 세친이 지은 글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서...제물(齊物)을 해석하자 유가, 화엄과 상통...논어를 다시...장자로 공자를 증명...하여 처음에는 ‘세속적인 것을 전화시켜 진리를 이루는 것’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진리를 세속적인 것으로 돌리는 것’”(리쩌허우, 「장타이옌 해부」, 『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사, 614쪽)이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유법불 회통, 동서융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이 기억하는 장타이옌의 업적은 학문이 아니라 혁명의 역사에 남긴 흔적이다. 루쉰은 자신도 그의 논문집 『구서(訄書)』(1899) 때문이 아니라 “그가 캉유웨이를 반박하고, 추용의 『혁명군』에 서문을 쓴 일로 상하이 서쪽 감옥에 갇혔기 때문”(「타이옌선생에 관한 두어 가지 일」, 『차개정잡문 말편』, 전집8, 699쪽)에 그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그러니까 1902, 3년 무렵, 루쉰이 일본에 도착하고 다음 해 단발을 감행할 시점은 장타이옌이 캉유웨이 등의 보황파와 격론을 벌이면서 개량주의를 넘어 혁명주의를 전파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1902년 도쿄에서 <지나망국支那亡國 242년 기념회>를 발기하여 반청(反淸)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1903년 5월에 「캉유웨이를 반박하고 혁명을 논하는 글(駁康有爲論革命書)」을 써서 “지금 세상은 합중과 공화(共和)로는 완전하지 않다...반드시 민주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역시 그 해 장타이옌은 '중국의 인권선언문'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그 유명한 쩌우릉의 『혁명군』에 서문을 쓴다. 청 말의 가장 대표적인 필화사건! 당연히 둘은 체포되고 구금된다. 둘 모두에게 3년이 언도되었다. 장타이옌은 꼬박 3년간 옥살이를 했고 쩌우릉은 안타깝게 옥사한다. 당시 그의 나이 갓 스물이었다.

 

 

“내가 듣기로 동족이 왕조가 서로 바뀌는 것을 혁명이라고 하고, 이족이 왕조를 선양하거나 뺏는 것을 멸망이라고 한다. 동족이 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하고, 이족을 아예 몰아내는 것을 광복이라고 한다. 지금 중국은 이미 오랑캐 역적에게 멸망당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광복을 도모해야 하지 혁명을 말할 게 아니다. 쩌우룽이 『혁명군』이라는 서명을 붙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의도는 단지 이족을 몰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나 학술, 풍속이나 품성까지 개혁하고자 해서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붙였다” (장타이옌, 「『혁명군』 서문」, 김영진, 『불교와 무의 근대』, 그린비, 37쪽에서 재인용)

 

 

루쉰은 나중에 그 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영향 면에서 말한다면, 다른 천언만어도 대개 평이하고 직설적인, ‘혁명군의 말 앞에 선 졸병 쩌우릉’이 지은 『혁명군』보다는 못했다”(「잡다한 추억」,1925.6.19., 『무덤』, 전집 1, 329쪽)고. 그러니까 1903년이야말로 “중국 사상계의 대전환이 있던 주요한 해였으며, 혁명사조가 개량주의를 대신하여 사상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한 첫해”라고 말할 수 있다. 1903년 이후에는 “보황당(保皇黨)을 나와 혁명당에 들어가는 자가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리쩌허우, 「20세기초 부르주아 혁명과 사상논강」, 『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사, 487쪽~479쪽) 루쉰은 그 이후 “추용 나의 어린 아우 /더벅머리 때 일본에 건너갔었지 / 날선 가위로 변발을 잘랐고 / 마른 육포로 끼니를 때웠다 / 영웅이 옥에 갇히니 / 천지가 슬픈 가을 / 죽음 앞에서 두 손 마주 잡을 이 / 하늘 아래 오직 그대와 나”라는 장타이옌의 옥중시를 매우 즐겨 읽고 외웠다고 한다.

 

장타이옌의 활약은 그가 옥에서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더 본격화된다. 혁명파의 기관지 『민보』의 주필을 맡아 캉유웨이 등의 개량주의와 본격적인 논전을 벌이기 때문이다. 당시 루쉰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들이 그 『민보』를 통해 혁명사상을 키우고, 장타이옌의 호방한 문체를 흉내 내어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루쉰이 이 시기에 쓴 「마라시력설」, 「과학사교편」, 「문화편향론」, 「파악성론」 등 그 어떤 것에도 장타이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루쉰 등은 장타이옌에게 직접 배우기로 한다. 그것 역시 “그가 학자여서가 아니라 그가 학문 있는 혁명가였기 때문이다”(「타이옌 선생에 관한 두어 가지일」) 그리고 1년 정도 계속된 『설문해자』 강의에서 보여준 그의 유쾌하고 해학 넘치는 태도를 오래 오래 기억한다.

 

하지만 그랬던 장타이옌은 “나중에는 평온을 찾아 은퇴한 학자”가 되어 “자신의 손으로 또 남의 도움을 받아 쌓은 담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시대와 멀어진 상태”가 된다. (「타이옌 선생에 관한 두어가지 일」) 일본 유학시절 루쉰과 함께 장타이옌 선생에게 강의를 듣던 친구 쉬셔우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타이옌의 “‘불교로서 중국을 구원한다’는 주장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동생 저우쭤런은 “장타이옌이 일생 중에 저지른 과오를 문제 삼아서 그와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린시엔즈 『인간루쉰 下』, 사회평론, 730쪽)

 

그러나 루쉰의 평가는 달랐다. 비록 말년의 장타이옌이 "민중으로부터 멀어졌을 뿐 아니라 차츰 풀이 죽어 나중에는 투호를 하고 선물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옥의 티’에 불과하다. 더구나 “요새, 글을 가지고 노는 자들이 자질구레한 신문과 짜고서 선생을 놀리는 것으로 자랑을 삼고 있는데”, (「타이옌 선생에 관한 두어가지 일」) 이것이야말로 파리가 죽은 전사의 몸 위에서 앵앵거리며 죽은 전사의 결점과 상처자국을 발견하면서 자신들이 죽은 전사보다 더 영웅적이라고 느끼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결점을 지닌 전사는 어쨌든 전사이고, 완미한 파리 역시 어쨌든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전사와 파리」, 1925.3.21, 『화개집』, 전집4, 67쪽)

 

 

 

 

장타이옌은 전사(戰士)였다. 그는 “일곱 번 수배되고 세 차례 옥살이를 하면서도 혁명 의지를 끝까지 굽히지 않"았었고,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자 위안스카이가 내린 “대훈장을 부채에 달아 노리개 삼고 총통부 문 앞에서 위안스카이의 사특함을 꾸짖”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전사의 일상생활은 매사가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건 아니다. 그러면서도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부분과 관련이 있다. 그것이 실제의 전사이다”(1936. 8.23 「“이것도 삶이다”....」, 1936.8.23., 『차개정잡문말편』) 루쉰에게 장타이옌은 언제나 전사(戰士)! 전사여서 스승이었다.

 

 

3. 스승이란 누구인가?

 

고등학교 2학년. 나는 ‘프로불평녀’였다. 뺑뺑이로 진학한 그 고등학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게 학교냐?”의 수준이었다. 교복색깔부터 불모(不毛)의 운동장까지 맘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자기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외에 열을 올리는 수학 선생, 고3 아이들을 버려두고 학기 중간에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사회 선생, 부처님 오신 날에 ‘사랑의 쌀’을 적게 가져왔다고 딱딱한 출석부로 아이의 머리를 내리쳤던 대처승, 교학선생 등에 분개했다. 학교(=교사)는 나의 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잘 생긴 젊은 국어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특이했다. 무엇보다 그 선생님은 월요일 아침의 ‘애국조회’에 나오지 않았고, 큰 키에 늘 구부정하게 걸었고, 입매에도 늘 뱅글뱅글 비웃음 같은 게 서려있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교사 같지 않은 교사였다. 임기묵이었다.

 

어느 날 그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넌, 어떤 데에 관심이 있니? 자기 자신이니? 사회 문제니?”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당시는 유신 말이었지만 사실 난 주변에 대학생 비스무레한 사람도 없었고 아버지는 보수본산 대구 출신이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호기롭게 “사회문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학교적폐’에 대한 나의 분노가 최소한 개인적 성장에 대한 관심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그 날부터 나는 임기묵 선생님의 특별한 제자가 되었다. 나는 ‘의식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선생님은 극단 <상황>의 핵심멤버였다. 주로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1976년에 결성한 그 극단은, 첫 작품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올렸었고 (우리가 아는 민중가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이 연극의 주제가로 당시 모 음악교사에 의해 작곡된 노래이다) 그 다음 해에는 <소작의 땅>이라는 작품을, 또 그 다음 해에는 <아벨만 이야기>라는 작품을 올렸다. 이 작품은 지금은 장관까지 지낸, 당시 배화여고 국어교사 김명곤이 연극에 첫 발을 디딘 작품이기도 하다. 나와 내 친구들은 어느 정도는 팬 심으로, 어느 정도는 존경심으로 그 연극판을 쫓아다녔다. 1979년 2월, 막 대학입학 합격소식을 들은 직후에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극단 <상황>의 다섯 번째 공연, <뻐꾹 뻑 뻐꾹>의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고 쎄실극장 매표소에서 표 받는 일을 한 것이었다.

 

 

 

1976년 창립된 극단 <상황>과 1979년 2월 공연된 <뻐꾹 뻑 뻐꾹>의 포스터

 

 

그리고 그 해 10월, 임기묵 선생님과 극단 <상황>의 여러 선생들은 갑자기 사라졌다. 흔히 ‘남민전 사건’이라 불리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임기묵 선생님은 처음에는 ‘튀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구속된다. 극단 <상황>의 많은 교사들이 함께 구속되었다. 그 사건 관련자 중에는 당시 극단 <상황>에서 가장 급진적인 민족주의자였던 연출자 ‘이민(李民)’ 선생도 있었다. 이민(李民)은, MB의 남자 이재오의 당시 가명이다. 쩝! 그리고 한 가지 더. 당시 함께 구속된 사람 중에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의 중학교에 재직했던 박광숙 선생님도 계셨다. 그 분은 나중에 고(故) 김남주 시인의 부인이 된다.

 

대학 1학년, 난 정식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운동권 써클에 가입했다. 어쩌면 동기 중에 운동권 1호?! 그리고 1학년 내내 난 비전(祕傳)되던 의식화 교재들을 탐독하고 선배들을 좇아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시국기도회에 참여한다. 그리고 임기묵 선생님의 옥바라지를 한다. 그래봤자 가끔씩 책 몇 권을 넣어드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몇 년 후엔 선생님과 나의 처지가 바뀐다.

 

선생님은 출옥 이후에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를 하셨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교사였고 덕분에 사모님이 고생깨나 하셨는데, 참 아이러니한 게 감옥도 갔다 오고 정규직에서도 짤린 이후 돈을 더 잘 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교육 천국 대한민국에서나 가능한 일. 반면 그 때 난 학교에서 짤리고 노동운동에 막 입문한 상태였다. 집과는 일체 연락을 끊었지만 임기묵 선생님과는 가끔 만나곤 했다. 선생님의 단골메뉴는 3김 비판이었다. 만날 때 마다 선생님은 ‘3김 시대’에 분노했고 “우리나라의 ‘3김 시대’는 세 명이 죽어야 끝이 날 것이다”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으셨다. 난 호남출신인 선생님이 김대중을 지지 하지 않는 것이 늘 신기했다. 그리고 헤어지는 길에는 예외 없이 나에게 10만원을 건네주셨다. 적지 않은 돈이었고 당시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보다 더 귀한 ‘자금’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혹시 노동운동을 하고 다니는 당시의 내가 선생님의 마지막 희망이었을까?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연락이 드문드문해졌고 결국 어느 날 연락이 끊겼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과의 마지막 대화.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를 하셔 물으신다. “너는 출마 안 하니?” 허걱! 지금 생각해봐도 출마 하라는 이야기였는지 절대로 그런 건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는지 잘 모르겠다.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루쉰의 스승 이야기를 쓰면서 나 역시 나의 스승을 떠올렸다. 나도 루쉰이 장타이옌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임기묵 선생님에게 배운 국어수업의 내용은 단 한 글자도 생각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나에게 문학에 대해서도 글쓰기에 대해서도 단 한 톨의 자극이나 영감을 주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국문과에 진학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은 매일 매일 ‘구의동 잔혹사’를 쓰면서 분노 게이지만을 키워가던 나에게, 그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을 보여주셨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울부짖으라고 격발시켰다.

 

스승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격발시키는 자! 장타이옌이 그러했고, 임기묵 선생님이 그러했고, 루쉰이 그러했다. 나는 어떤가? 나와 함께 공부하고 일하는 청년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도 그들을 격발시킬까? 나는 전사(戰士)일까? 하여 나는 그들의 스승일까?

댓글 1
  • 2018-10-13 19:53

    '스승은 전사다. 스승은 전사여야 한다'

    '미스터선샤인'에 김태리가 그러데요

    Sad ending, happy ending 이 의미가 있을까?

    끝맺음이라는 말 자체가 슬픔을 담고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요..

    스승도 전사라면..전사여야 한다면..

    문탁샘의 스승도 루쉰의 스승도

    스승이 된 루쉰도..

    누군가를 격발시키는 자는

    외로움, 위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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