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후기. 만약 그 때의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당근
2020-05-02 14:41
261

5장 만약 그 때의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나와 함께 8주를 진행하면 30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첫날은 1분씩 4번을 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런데이 앱, 초보자코스에서 나오는 멘트다. 오케이!!! 난 그 멘트를 듣자마자 에펠탑, 로마의 바티칸 근처를 뛰는 나의 모습을..., 영국은 어디를 뛸까? 공원이 한적하고 좋다 하니, 그냥 공원을 뛰어 볼까? 하며, 각국의 도시를 온 몸으로 맞이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잠시 행복해 했다. 글쎄 다시 생각해보니, 문화적 사대주의에, 김치국 마시기의 끝판 왕이다. 그리고 작년 12월 9일 20대 이후 거의 처음으로 1분씩 4번을 달렸다. 겨우 4분인데--- 내가 아무리 달리는데 잠뱅이라도 4분 정도 못 달릴까?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그냥 졸도했다. 다음 날 문탁에 갔는데, 온몸 탈수현상에 손발이 떨렸다. 마침 문탁 축제라 풍성히 차려진 음식을 그냥 폭풍 흡입했다. 그날 그 습관을 몸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좀 자제했더라면, 봄에 입으려고 지난겨울에 샀던, 허리가 잘록한 하얀 스커트를 입고 꽃구경도 갔을 텐데(물론 코로나 정국에 힘들었겠지만, 꽃구경이 중요한 게 아니니). 남들이 보기엔 그냥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빨리 걷는 것처럼 보여도 난 그날 이후 일주일에 3번을 뛰었고, 3월부터는 일주일에 6번 정도를 30분 이상씩 뛰고 있다. 난 내가 정망 기특하다. 그렇게 걷는 건지, 뛰는 건지 알 수가 없어도, 그것을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이것이 니체가 말한 대로 나의 삶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온전히 나의 의지와 땀으로 내 몸에 어떤 새로운 길을 내는 것 말이다. 아 또 오바다.

 

여기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한 남자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에게 달린다는 건 자기 몸의 리듬을 찾아가는 일인 것 같다. 그렇게 얻은 몸의 리듬은 하루키 주변의 모든 것과 자연스레 접속하게 한다. 뉴욕 마라톤을 한 달 앞둔 시점의 보스턴에서 하루키는 찰스 강변을 달린다. 10월 3일 찰스 강변을 달리는 그에게 저주 하고 싶을 만큼 무더운 보스턴의 한여름, 특유의 짧은 가을, 그리고 마치 유능한 세금 징수원처럼 민첩하고 말없이 찾아오는 차갑고 예리한 겨울이 그냥 느껴진다. 그러다 얼어붙은 눈이 녹고, 눈 녹은 뒤의 질척거리는 진창길도 마르는 3월이 지나면, ‘자 이제 슬슬 달려볼까...? 하는 느낌으로 보스턴 마라톤이 다가온다.’고.

 

아름다운 피라미드 형태를 그리고 있는 주행거리-6월부터 9월까지, 260키로, 310키로, 350키로, 300키로-, 새 미즈노 러닝슈즈, 뉴욕 레이스까지 한 달. 테이퍼링 시기다. 이렇게 무장한 하루키 앞에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고, 바람을 가르듯 일직선으로 도로를 달려가는 하버드 여학생들의 출현은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을까?” 생각하게 한다. 조금은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진 않았으리라. 그래도 우리들 각자에겐 각자에게 어울리는 페이스와 시간성이 있는 것이니. 뭐 어찌하랴?

 

“무라카미 씨처럼 매일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가끔 일본에 있을 때 듣는 질문이다. 소설을 쓰는 하루키에게. 일견 맞는 말이다. 참된 창조 행위엔 독소가 개재되는 법이고, 복어도 독이 있는 부분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불건전한 영혼은 자기 안의 독소를 잘 다룰 수 있는 건강한 육체가 필요한 법이다. 상상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육체능력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작가들은 문학적 번아웃 상태를 겪게 된다. 작가들에겐 정말 치명적인. 죽거나, 절필하거나.에 이르게 하는. 하루키는 문학적 소진현상을 되도록 뒤로 미루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달린다.

 

댓글 3
  • 2020-05-03 22:28

    훌륭하십니다..
    1주일에 6일을 30분이상 달리신다니....

    하루키를 능가하는 자질을 가지셨군요.
    환갑을 바라보는 아줌마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다니 하루키는 대단한 마라톤 전도사입니다.
    일어강독에 달리기 건강까지 일거양득, 가재잡고 고랑치우고... 대단한 성과입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저에게도 전파되길 바래봅니다.

  • 2020-05-04 07:31

    제목 포니테일의 궁금증으로 읽었던 5장 이야기네요^^ 당근님 재미난 글솜씨도 무라카미상 못지 않아요~

  • 2020-05-07 11:21

    잘 읽었습니다. 당근님은 하루키 못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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