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 10장 후기

오영
2019-09-19 03:12
303

찌질한 질문 말고 쿨한 질문을... 

 

사업을 시작한 후 하루, 이틀이 그야말로 훅~ 하고 지나가네요. 덕분에 연휴 전 세미나의 후기를 써야 한다는 것도 아주 깨끗하게 잊고 있었어요. 월요일에 후기 재촉을 받고 나서야 완전 깜놀!! 했지만 결국 아~주 늦어졌네요. 늦어진 후기에 대한 변명으로 시작하는 후기입니다. ^^

우선 지난 세미나를 복기해보자면, 생성이 분자적이라거나 근방역과 식별불가능성에 질문과 토론이 집중되었습니다. 도대체 생성이 분자적이라는 것이 뭐냐, 또 근방은 뭐냐,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있기와 금욕, 절제는 무슨 관계인가 등등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모든 생성은 이미 분자적이다.’ 라는 들가의 선언에서 스피노자의 개체를 ‘관개체성’으로 해석한 발리바르가 떠올랐습니다. 애초에 독립적이고 단독적인 개체란 존재하지 않고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개체라는 것이 발리바르가 말하는 관개체성의 핵심입니다. 들가 역시 주체나 개체란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의미화와 주체화를 통해 늘 일정한 형식, 주체, 기관들, 또는 기능들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들가가 말하는 생성은 이로부터 입자들을 추출하는 것입니다. 동일성의 해체, 변용하기와 변용되기의 과정이 곧 생성이자 입장들의 추출이라고 생각합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정화스님이 강좌에서 강조하신 ‘아상은 없으며 변화가 곧 생성이다’라는 요지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네요. 스피노자 역시 우주의 모든 개체는 복합개체로 끊임없이 부분개체들의 새로운 합성으로 지속되는 것이고 늘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주체화와 의미화를 통해 지층화하는 방식이 탈지층화와 동시적입니다. 인간은 형식과 절차, 체계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에만 머물 수도 없지요. 늘 변화하고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쿠키무이 사업을 인수받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기존 매뉴얼을 고스란히 습득하는 과정이 인수과정의 가장 큰 부분이었습니다. 기존 매뉴얼이 없었다면 중구난방에 시간도 오래 걸렸겠지요. 그런데 그 매뉴얼도 매번 업데이트되었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점차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를 갖추어 갔습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들을 다시 허물고 새로 세우고 변형하는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그것들을 수용하는 조건과 관계들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저와 담쟁이는 카페놀의 구성원과는 다른 맥락과 관계망 안에 있고, 현재도 다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업을 함께 하는 사람들도 매번 다릅니다. 저와 담쟁이 둘만 일할 때와 마경팀에서 거들어줄 때마다 다른 리듬이 구성됩니다. 저는 그게 ‘입자들이 비규정성과 불확실성의 객관적 지대를 형성하고 있고 근접성의 원리에 의해 서로 어떤 지대 내로 들어올 때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게 된다는 구체적인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익숙한 구성과 조합이 아닌 낯설고 새로운 조합이 이루어질 때마다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새롭게 형성되고 그것이 곧 생성인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생성이 아닌 것이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포착하고 사유할 개념이 없어 놓치고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분자적이라는 것과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있기>의 관계는 또 무엇일까요? 앞서 입자들을 추출하는 것이 생성이고 그것은 일정한 형식이나 주체, 기능들을 해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현실에서 언제든 근접성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관계를 생성가능하려면 아무래도 그 누군가가 유연한 상태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들가는 주체화와 의미화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주체화와 의미화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매우 견고하게 쌓은 벽은 그만큼 허무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힘들기 때문에 언제든 해체하고 다시 세울 수 있는 가벽 정도로 세워야 하지 않나 싶네요.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있기>란 언제든 허물고 다시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쌓을 수 있는 조립식? 가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이라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려면 물건만이 아니라 많은 것을 버리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스스로 정한 기준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고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한번 타협하게 되면 느슨해지면 집안에 버리지 못해 쌓아두는 물건들이 늘어나겠지요. 

세미나 후반부에는 문탁샘이 어려운 질문을 많이 던지셨습니다. 들가의 개념을 정확히 소화하려면 결국은 질문을 해봐야 한다고, 그래야 무엇을 알고 무엇을 잘 모르는지 확실하게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정확히 몰라도 느낌적인 느낌으로 말로 대강 얼버무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질문에 대한 글을 쓰려면 대강 퉁쳐서 아는 척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요.

문탁샘이 예를 들어 제시하신 질문은 이것입니다. “소녀는 각 성의 여성-되기이며, 이는 아이가 각 나이의 청춘-되기인 것과 마찬가지이다.”(526)에서 도대체 나이와 무관하게 ‘아이-되기’란 무엇이며 ‘소녀-되기’는 무엇인가? ‘또 다른 20대의 탄생’이나 ‘다른 아빠의 탄생’ 처럼 이미 이항적 대립이나 어떤 규정을 넘어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뾰족하게 파고들어보라고 하셨죠.

새로운 개념이나 철학을 공부한다 해도 질문 자체가 구태의연하고 기존의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찌질하지 않은 질문, 한걸음 더 밀고나가는 쿨한 질문을 던져야 분자적 생성이든 새로운 00 탄생이든 00-되기이든 가능하겠지요.

다음 주 에세이 데이까지 뭐든 가능할까요? 당장 내일, 아니 오늘이군요. 오늘 숙제라도 제시간에 해내야 하겠지요? 이상입니다.

댓글 1
  • 2019-09-21 17:56

    쿠키무이 인수로 드신 예시에 많은 공감이 갑니다. 길드다 활동 중에도 비슷한 느낌이 자주 들거든요....사실 문탁의 운영 원리가 자체가 생성-변화에 있다고 느끼기도 하구요. 하지만 한편으로 '가벽'의 예시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느껴요.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탈영토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필요하되, 애초에 그것을 전제로 '가벽', 임시방편의 영토화(?)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로 느껴져서요. 개인적으로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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