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키친] 청년매니저의 후기 끝

무화
2020-10-11 15:00
591

3개월 간의 은방울키친 청년 매니저 활동이 끝이 났다. 나는 어떤 심정이냐면...그냥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면서도, 잘 해보겠다고 다짐했던 마음들이 안타까워 허무하기도 하고, 이럴 바에 한 번이라도 더 나서서 뭔가를 했어야 했나 후회가 되기도 한다. 후련하거나 개운하지는 못한 거 같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걸까.

이 마무리 글에 내 마음이 온전히 담기면 좋겠다.

 

 

 

- "문탁 생활"

문탁에서 청년은 어떻게 위치하는가. 선집에 들어와 문탁 홈페이지에 첫 인사를 할 때부터, 나의 걱정은 관계에 있었다. 이 곳에서 장시간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인 내가, 6개월간 이 곳에서 생활하며 진짜 관계라는 걸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작년에 수업 몇개를 들으며 보았던 문탁 사람들은 내가 지금껏 마주쳐온 사람들과 많이 달랐으니까. "아, 이곳은 그렇게 '오픈'되어 있지는 않구나. 여기서 산다면 정말 많은 벽들을 허물어야 하는구나" 이런 마음이었다.

가장 높은 벽은, 이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정말정말 적다는 것이다. 기능적인 필요를 말하는 것이 맞다. 쌤들(문탁의 호칭이다)이 하고 계신 공부들은 정말 오랜 기간동안 함께 세미나를 진행하고 책을 읽어가며 쌓아오셨고 진행 중인 활동들의 맥락은 정말 다양했다. 활동하시는 분들은 아주 오랜 기간동안 서로를 보아 왔으니,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도 몇 개 없었다. 하긴, 별명들 다 외워서 얼굴이랑 매치시키는 데만 두어 달이 걸렸는데 어쩔 수 있을까. 몇 년 간 축적된 이 역사성이라는 건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문탁 사람들이라는 게 대부분 오후까지 공부

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40대 이상의 어른들이고, 얼마 없는 청년들은 분절적으로 문탁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길드다라는 사업체에 소속되어 최소 1년 반 이상 함께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6개월 정도 선집에 살며 들락날락 하다가 군대 갈 친구'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많이 없었다. 만약 그런 자리를 만들어 주셨더래도 아마 내가 부담스러워 했겠지. 그래서 그냥 표면적인 관계만을 가져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래도 욕심이 나긴 했다. 가끔씩 이곳 사람들이 서로에게 한껏 무례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처음 문탁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며, 나는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온 거 같았다. 점심을 먹게 되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는 이야기들이 식탁을 오갔다. 가끔 같이 웃다가도 내가 왜 웃고 있는거지 싶은 뻘쭘함이 막 올라왔다. 음..그래서 밥을 먹으러 잘 안갔던 거 같다. 먹고 나서 체한 날이 많기도 했고. 참 내가 스무살 이후로 2년 동안 많이 예민해졌구나 싶었다.

 

(2주일간 조용히 문탁 밥상 기록하기 켐페인을 혼자 진행했었다)​

 

- 은방울 키친에 발을 들이고

그러다 문탁 쌤께서 오고 가는 청년들이 있는 톡방에 [은방울키친 청년 매니저]를 구한다는 공고를 올려주셨다. 내 적응을 배려해주신다고 느꼈을만큼, 현재 상황에 잘 맞는 일인 거 같았고 페이도 있다고 하셔서 바로 저 하고싶다고 어필을 했다. 그 후 일주일 뒤에 만난 기린쌤, 도라지쌤, 물방울썜(몇 개월 간의 은방울키친 활동이 끝나신 상황이었다!)과 이야기하며 본격적으로 매니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린쌤은, 은방울키친에서 내가 주방 보조나 정기적인 밥당번보다 '매니저'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하셨다. 주기적으로(최소 매일 점심 정도는) 파지사유에 들러서 주방 상태를 점검하고 식기 세척 등을 신경쓰는 것을 요구하신 거였다. 정말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활동을 시작해보니 그냥 12시 언저리에 집/문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스케쥴이었다. 보컬 학원이 끝나고 집에 오면 6,7시였고 그때 막 시작한 여러 문탁 활동들을 마치고 집에 오면 저녁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월 수 금에 약속된 식기 세척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전날 새벽에 해놓고 선집에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린쌤과 도라지 쌤이 청년 매니저의 역할이 그리 절실하지는 않다는 걸 첫 회의 떄부터 얘기해주셨었는데(내가 너무 부담갖지 말라고 해주신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정말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는거 같아서 계속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3주 정도 엉망으로 활동을 해 놓고서, 은방울키친 회의가 열렸을 때, 나는 내가 잘릴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떤 알바를 뛰었건 이렇게 불성실하게 임한 적이 없었는데, 왜 이 별 거 아닌 일들이 심리적으로 나를 이렇게나 조여놓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회의에서 기린 쌤이 속 시원하게 내 태도를 지적하고, 도라지 쌤이 뭐가 그렇게 힘드냐 물어봐주지 않았다면 사실 그 상태가 계속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청년, 아예 점심에 얼굴을 보기가 힘들던데 왜 그래", "여기서 그냥 뚝 적응하기는 정말 힘들지. 맞아"

이 낯선 곳에 와서 처음으로 그런 얘기를 들어본 거 같았다.

(단품 생산일. 기린쌤 사진이 없다ㅠ)

 

- 잠깐 반짝

제일 많은 시간을 쏟았던 밥당번 시간에는 너무 행복했다. 그냥 양파를 채 썰고, 반죽을 해 전을 부치고, 접시에 음식을 덜어 식탁에 내고,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한마디 두마디 얹어주는 게 좋았다. 나에게는 너무 오랜만에 느껴본 푸근함 같은 것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교로 떠났을 때, 나는 내가 잘한다고 자부했던 것들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4학년들과 토론하고 머리를 싸매 보고서를 내고 살았지만 정작 나에게 누군가의 애정 어린 코멘트가 돌아온 적은 없었다. 그저 기계적인 수업에 지나지 않았고, 나는 그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타인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1시간 반 동안 부친 전을 먹고 쌤들이 싱긋 웃어주던 순간들이 그렇게 좋았던 거 같다. 하루 종일 애너지가 넘쳤을 정도로.

8월 첫째 주에 혼자 점심을 차려서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밥을 대접한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직 4번밖에 밥 당번을 해보지 않았고, 매번 기린 쌤과 도라지 쌤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만 음식을 만들다가 갑자기 최소 25인분의 음식을 혼자 해야 한다고 하니 걱정이 산더미였다. 그리고 너무 설레는 일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메뉴 선정을 하며 고민하고, 오고가는 친구들과 쌤들에게 이런 음식은 어떻냐 저런 국은 나온 적이 있냐 꼬치꼬치 묻고 다녔다. 장을 전날에 다 봐놓고도 아침 8시에 일어났다. 메뉴는 과감하게도 양식. 빠쉐(파스타 빠쉐에서, 면을 빼고 국물을 스프처럼 만들었다)와 새우볶음밥(과 빠에야의 중간), 매쉬드 포테이토를 정해 왔다. 한번씩은 해봤던 요리긴 하지만, 어디서 30인분을 해봤을까. 진짜 아무런 감이 안왔다. 응답하라 이일화 씨에 감정이입을 해서, "먹다 모지라는 것보다 낫다" 마인드로 양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날 9시에 시작한 조리는 12시 20분까지 쭉 이어졌고, 중간에 도라지 쌤이 휴가를 가시다 말고 들려서 도와주시기까지 한 덕분에 잘 마무리 되었다. 그날 요요쌤이 밥을 다 먹고 국이 정말 맛있었다고 레시피를 물어보신 일도, 쌤들 몇 분이 핸드폰으로 차려진 밥상을 찍어가신 일도, 갑자기 [한문이 예술] 친구들까지 밥을 먹어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접시 바닥까지 음식을 싹싹 긁어 완판되었던 일도, 모두 정말 행복했다.

 

(내가 만든 감자 사라다. 도라지쌤이 데코레이션을 도와주셨다)

 

그렇게 애너지 넘치게 8월달 밥당번을 시작하고 3번의 밥당번을 마친 뒤, 은방울키친은 다시 중단되었다. 원인은 재발한 코로나의 유행.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모든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정이 들어가던 파지사유의 점심은 텅텅 비어버렸다. 그 이후로 우린 단품 생산을 2번 했고, 더 이상의 회의는 없었다. 카톡으로 간간히 냉장고 사정을 공유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9월이 지나가버렸다. 10월이 되기 전, 기린 쌤이 활동을 어떻게 마무리 할 건지 생각해보라고 얘기해 주셨을 때 나는 어딘가에 쿵 하고 머리를 찧은 기분이었다.

얼얼한 감정이 다 가시고 나자, 너무 쉽게 나태해진건가 부끄럽기도 하고, 이유 모를 억울함이 마구 올라오기도 한다. 은방울키친 활동과 같이 나의 문탁 적응기도 끝이 날지 모른다. 올해는 축제도 예년같지 않을거라고 하던데, 이러다 내년 1월쯤에 "아 형준이 군대 갔어?"라는 말들이 오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을 꺼내보자면, 원래는 3개월동안 정말 열심히 활동해서 활동이 끝나는 날 쌤들에게 3개월 같이 더 하자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많이 많이 후회되고 슬프고 억울하다.

 

6월 여름부터 나에게 아주아주 큰 동력을 제공해준 은방울키친에게 너무 큰 고마움을 느낀다. 빨리 밥당번이 재개되었으면 좋겠다!

댓글 6
  • 2020-10-11 15:19

    형준이, 고생혔다^^

    쓰담쓰담.png

  • 2020-10-11 15:31

    3개월동안^^ 형준과 함께 은방울키친 활동을 했는데~
    형준의 솔직한 마음을 알게 되어 좋네요^^
    요리를 좋아하는 형준에게 주방이 더 많은 기쁨을 주는 공간이 되기를^^

  • 2020-10-11 17:28

    코로나 시대 형준이의 은방울키친 인턴 분투기!
    하하 뭔가 익어가는데는 언제나 시간과 햇빛과 바람이 필요한 법..
    아마 형준이를 떠올리면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형준이가 차린 밥상이 생각나지 않을까?
    그것말고도 또 다른 것들을 서로 연결시켜가는 시간을 천천히 조금씩 쌓아나가 봅시다.

  • 2020-10-11 19:17

    기록을 남기니 좋다. 형준이 마음도 조금은 알겠고^^

  • 2020-10-12 08:57

    그런 마음이었군요.. 그날 먹은 맛있는 국이 국수 뺀 빠셰구나^^
    형준이 군대갔어? 하기 전에 자주 자주 봅시다. 노래도 들려줘요~

    • 2020-10-12 19:36

      이번주 토요일 오후2시 <루쉰과가족>북토크에서 형준이가 멤버인 크루와상의 노래를 들으실 수 있어요.
      <루쉰과가족> 북토크에서 만나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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