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영화인문학 시즌1>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2007)

청량리
2021-06-07 22:02
1110

 

<우연3부작>

우연한 선택  | 영화 <페르세폴리스>(2007) 96분

 

 

 

 

 

 

 

 

 

 '만화'는 하나의 컷과 또 하나의 컷의 연속으로 이뤄진다. 스크롤방식의 웹툰이 획기적인 사건인 이유는 그 컷과 컷 ‘사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시장에서도 디지털 저장매체의 등장과 함께 컷과 컷 이어지는 필름이 사라졌다. 그러나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은 한 컷을 그리고 난 후, 그 위에 다음 컷을 그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만화가가 지금 그리고 있는 컷은 어쩔 수 없이 이전 컷이나 앞으로 그려질 컷 속(사이)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다.

 

 

 1979년 이란혁명은 친미성향의 전근대적 팔라비왕조정권을 무너뜨린 시민혁명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호메이니는 율법에 따른 신정국가로 이란을 통치하기 위해 유혈탄압을 서슴치 않는다. 안타깝게도 검은 차도르도 이때 확산되고 여성의 지위는 추락한다. 캄보디아의 좌파 크메르루즈가 벌였던 혁명, 그리고 탄압으로 유혈사태와 흡사하다. 혁명도 중요하지만, 혁명 이후가 더욱 어렵다. 영화 <페르세폴리스>(2007)은 그 시대를 관통하며 성장한 이란 출신의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 이야기를 인상적인 흑백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이다. 민중혁명은 성공한 듯 보였으나, 국내 유혈탄압은 심해지고 결국 마지(마르잔)의 부모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마지를 보내는 유학을 ‘선택’한다.

 

 우리의 삶은 일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얻게 되는 작은 '차이'들로 이뤄진다.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마치 성룡의 액션처럼 그러하다. 그 차이들이 중첩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늘 어떤 '선택'과 마주하게 된다. 그 선택 앞에서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보이지만, 앞뒤로 그려진 '컷'들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의 친구가 오스트리아에 살게 된 컷과, 그녀의 삼촌이 감옥에 간 컷에서, 마르잔이 프랑스학교에 다닌 컷들에 의해 그녀의 오스트리아 유학은 이미 정해졌다, 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의 선택이란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양태들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는 스피노자의 말이 뜻하는 바다. 문제는 그 관계 속에서 내린 '선택'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이지만, 그것은 ‘우연히’ 혹은 뜬금없이 일어난다.

 

 

 오스트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마르잔은 홀로 살아남은 병사들처럼 우울증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렸으나 결혼의 실패로 힘들어한다. 할머니는 '앙심을 품고 복수하는 것이 제일 어리석은 짓'이라고 마르잔에게 일러준다. 그런 일이 있으면 '그냥 지나가게 내 버려두라’고, 앙심과 복수가 마음속에 일어났더라도 흘러가게 두라는 할머니의 지혜는 될 때로 되라는 비관주의나 어떻게든 될 거라는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위해서 과거를 소환할 필요도, 미래를 걱정할 이유도 없다는 말로 들린다. 만화의 다음 컷을 지금 그리기 위해서 뒷장은 넘겨야 한다. 어쩌면 관계에 있어서, 어떤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건, 앞으로 다가올 그 무엇에 대한 ‘예측’이라기보다는 가만히 짚어내는 그 이후의 ‘성찰’이다. 나에게 이미 다가와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없으면 그저 흩어지며 지나간다.

 다시 컷과 컷의 연결로 이뤄지는 애니메이션을 보자. 그 컷과 컷은 마르잔의 저항적인 삼촌장면, 유년시절에 겪은 우울했던 장면, 가까웠던 할머니의 죽음장면, 기대했던 사랑과 결혼의 실패장면들로 이어져있다. 어느 하나의 컷에 너무 집중하면 영화는 지루해진다. 하나의 장면이 그 전과 후의 장면을 통해 구성되고 컷은 그냥 흘러가게 두어야 비로소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마르잔을 둘러싼 모든 관계들은 이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특별한 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누구나 '특별한' 상황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러한 특수성 역시 보편적인 양태들의 존재조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 영화는 보편적 작품이지만 이 상은 (특별히) 이란인들에게 바치고 싶다"라는 수상소감을 밝혔다.

 마지막에 마르잔이 공항을 떠나면서 알게 된 것은 무엇일까? 흑백의 차도르를 벗은 마르잔은 이제 다시 유럽으로 떠나며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아니,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화면은 칼라로 바뀌고, 마르잔이 유년시절 떠났던 모습과 사뭇 다른 것 신체 뿐만은 아니다. 그녀는 ‘우연’의 구름 속으로 날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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