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시즌1 마틴 스콜세지 <택시 드라이버>

띠우
2020-06-16 22:52
637

트래비스, 괜찮아질 거야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결의한 이후 미국 내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시민 단체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9년 닉슨은 국내외 여론을 감안하여 일부 미군의 철수를 결정했지만 베트남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1973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미국은 전쟁의 악몽과 함께 최악의 경제파탄 속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맞이했고 정치 · 사회적으로 암흑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대 미국 영화는 1930년대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합니다. 50년대 이후 오락 산업이 꾸준히 분산되는 가운데 다양한 멀티미디어가 출현했고 새로운 배급 체계를 통한 세계화가 이루어졌지요. 그리하여 고제작비, 고기술의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리게 됩니다.

 

차츰 영화 산업은 경제적, 미학적, 기술적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가면서 더욱 복잡한 구조가 되어갔습니다. 스타시스템, 장르, 영화적 혁신들이 분명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독립·대안 영화들의 장이 열린 것도 주목할 일입니다. 유럽예술영화의 영향이 강해졌고 영화학교 세대들이 등장하면서 고전 할리우드의 시기 이후 가장 위대한 영화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7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실험적 영화운동인 뉴 아메리카 시네마는 미국 사회의 병폐를 영화 예술로 그려냅니다. 대담하고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죠. 그 정점에 오늘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택시 드라이버>가 있습니다.

 

 

<택시 드라이버>는 <조커>가 오마주한 작품이기도 하고,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수상소감에서 언급해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마틴 스콜세지의 연출작이죠. 주인공 트래비스는 앞서 설명한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암담함에 빠진 미국사회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며 포르노 극장을 전전하지요. 미국의 70년대 혼돈과 암울함을 떠올리지 않고 본다면, 트래비스는 그저 망상에 빠진 미치광이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트래비스라는 인물을 보다보면 <조커>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저에게 두 인물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사악한 빌런으로서의 조커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망상 히어로 같습니다. <조커>의 서사는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자극하면서 시작해 신체적인 부분까지 조커가 되어가는 아서 플렉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료체계나 빈부차를 원인으로 하여 상황을 폭발시키는 과정은 지극히 상투적으로 보입니다. 그저 화려한 몸놀림과 이미지만이 정신을 쏙 빼놓고 있지요. 극장의 불이 켜지면 망상에서 벗어나게 되고 조커의 메시지는 너무 명확하거나 전혀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호아킨 피닉스의 과한(?) 연기만이 남아버립니다. 그래서 조커의 서사에 공감하지 못하고 배우의 연기만이 이야기거리가 됩니다.

 

반면 트래비스(호아킨 피닉스 못지 않은 로버트 드 니로!)라는 인물은 소외의 서사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 역시 망상에 빠진 인물이지만, 베트남 참전용사로서 사회정의에 대한 편집증적 신념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보다보면, 그가 가진 사회적 불만이 어디선가 폭발할 것만 같은 불안이 전해져옵니다. 이때 관객은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의 망상과 현실의 경계에 함께 서게 되는 것이죠. 특히 살인 이후의 장면은 상이합니다. 조커가 화려한 춤으로 관객의 눈을 현혹한다면, 트래비스는 아이리스의 포주를 죽이고 나서 어두운 계단 위에 앉아 잠시 망연자실하지요. 인간이 되돌릴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자포자기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순간의 멈춤이지만 그의 내면 속으로 폭풍우가 몰려 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두 영화에서 망상은 스토리의 전개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인물들이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 때문이죠. <조커>의 아서가 머레이나 토마스 웨인과 맺는 관계는 개인적 망상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사회적 구조로 풀기에는 출생에 대한 맥락없는 집착만이 두드러지죠. 그가 총을 손에 넣고 벌인 살인은 그를 대중 앞으로 나서게 합니다만 그때의 자각도 분노하는 대중의 선동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절대악의 상징인 조커의 탄생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반면, 트래비스는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지만 현실 속으로 편입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합니다. 택시를 몰고, 극장에 가고, 연애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편입과정에서 사회에 의해 분열되고 소외된 그가 망상에 의해 파괴되어가죠. 조커의 망상이 이내 감지된다면, 트래비스의 망상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우리를 현실과 망상 어디쯤에서 망설이게 합니다.

 

70년대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많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반사회적 일탈 끝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트래비스도 파괴적인 살인을 통해 비극으로 향해가지요. 대통령 후보인 팔렌타인을 저격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지만 결과적으로 저격은 어이없는 실패로 끝납니다. 유세현장에서 도망친 트래비스는 마치 영웅처럼 거리의 쓰레기 셋을 죽이죠. 저는 <택시 드라이버> 결말을 트래비스의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보면서 그가 살았고, 쓰레기를 처리한 영웅이 되었으며, 다시 택시를 몰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젊은 시절의 저는 그가 비극적인 영웅처럼 죽어가길 바랬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감독은 다른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시간을 되돌려버리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도입부와 엔딩 장면은 택시를 모는 트래비스와 그의 시선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중간 장면을 보지 않는다면 두 장면은 거의 똑같아 보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마틴 스콜세지는 “비록 영화의 결말에서 그가 통제력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가 언제든 다시 폭발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대한민국에서 하루하루 불안과 희망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해 보입니다. 택시 창 너머로 보이는 70년대의 거리가 지금의 늦은 밤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여기저기서 트레비스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시 택시를 모는 트래비스, 이제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편안해 보입니다. 불편한 음담패설과 함께 의미없는 대화들을 주고받던 동료들이죠. 이전에는 그들을 쓰레기로 여기며, 그들과 거리를 두었던 그가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섞여 있습니다. 삶의 가치를 포기한 걸까요? 트래비스가 동료 위저드에게 고민을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대답하는 위저드는 횡설수설합니다. 직업이 그 사람의 얼굴이 된다거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낙오자라거나, 엉터리 충고밖에 못하겠다거나 하는 말을 이어가다가 트레비스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하지요. “걱정하지 마 킬러, 괜찮아질 거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이야기처럼 그의 불안이 언젠가 다시 폭발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트레비스, 괜찮아질 거야.”

댓글 2
  • 2020-06-17 15:33

    택시 드라이버와 조커를 비교할 때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 에서 이런 다른 점도 기억납니다.
    트래비스의 이야기는 신문기사 등을 통해 후일담으로 영웅화된다면
    아서의 이야기는 라이브 쇼 현장에서 생중계되는 방식으로 언론에서 '영웅화' 되는 지점요
    이러한 변화의 지점이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필름이다에서 영화를 본 후 떠올랐던 생각^^

  • 2020-06-24 15:13

    로버트 드니로 하면 베트남전 후 트라우마 영화가 생각나는 배우죠 저에게는.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41
2024 필름이다 4월 상영작 | 디즈니 #2 <히든 피겨스>
청량리 | 2024.04.16 | 조회 103
청량리 2024.04.16 103
240
필름이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후기 (3)
코난 | 2024.04.04 | 조회 32
코난 2024.04.04 32
239
2024 필름이다 3월 상영작 | 디즈니 #1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1)
청량리 | 2024.03.17 | 조회 248
청량리 2024.03.17 248
238
2024 필름이다 월 후원회원 정기모집 (10)
청량리 | 2024.02.26 | 조회 402
청량리 2024.02.26 402
237
2024 필름이다 2월 특별전 <끝까지 간다> (3)
청량리 | 2024.02.07 | 조회 220
청량리 2024.02.07 220
236
요르고스 란티모스 #3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후기 (1)
진달래 | 2023.12.31 | 조회 110
진달래 2023.12.31 110
235
2023 필름이다 12월 상영작 | 요르고스 란티모스 #3
청량리 | 2023.12.17 | 조회 287
청량리 2023.12.17 287
234
필름이다 11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2 <킬링 디어> 후기 (1)
띠우 | 2023.12.13 | 조회 140
띠우 2023.12.13 140
233
요르고스 란티모스 #1 <더 랍스터> 후기 (4)
청량리 | 2023.11.26 | 조회 147
청량리 2023.11.26 147
232
2023 필름이다 11월 상영작 | 요르고스 란티모스 #2
청량리 | 2023.11.18 | 조회 312
청량리 2023.11.18 312
231
필름이다 前사장 추천 - <두 사람을 위한 식탁> (1)
문탁 | 2023.11.06 | 조회 179
문탁 2023.11.06 179
230
필름이다 8월 장률의 <풍경> 후기 (3)
겸목 | 2023.10.25 | 조회 166
겸목 2023.10.25 166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