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시즌1 짐 자무쉬 <천국보다 낯선>(1984)

청량리
2020-05-31 00:54
984

일상은 때론 천국보다 낯설다

| 천국보다 낯선, Stranger Than Paradise | 짐 자무시 감독 | 1984

 

 

윌리 : 여기선 진공청소기로 청소한다고 하지 않아. 촌스러워

에바 : 아하~그럼 뭐라고 하는데?

윌리 : 우린, 악어 목을 조른다고 해. 누가 뭐하냐고 물어보면, ‘나, 악어 목을 조르고 있어’라고 말하

는 거야.

에바 : 좋아, 난 지금부터 악어 목을 조를 거야. (위이이이이잉~~~~)

 

 

뉴욕에 온 지 10년이 넘었으나 뒷골목 인생을 벗어나지 못 한 벨라, 아니 윌리(존 루리)에게 어느 날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의 고향인 헝가리에서 자신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사촌 에바(에츠더 발린트). 하지만 8평 정도의 원룸에 사는 윌리는 갑자기 찾아온 사촌동생이 달갑지 않습니다. 며칠이 지났을까, 더러운 방을 청소하려고 에바는 청소기를 찾습니다. 그러자 윌리가 에바에게 해 준 말입니다.

 

미국생활 10년차인 윌리가 어깨에 힘 팍팍 주고 에바에게 ‘이게 바로 미국’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에바가 사온 ‘티비 디너’와 ‘체스터 필드’ 한 보루에 윌리는 웃으면서 ‘너 괜찮은 녀석이었구나’라며 화해(?)의 악수를 청합니다. <천국보다 낯선>(1984)에서 아마도 가장 행복하고 유머러스한 장면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이죠. 미국에서의 생활은 왁자지껄하고 화려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뉴욕의 뒷골목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고 인스턴트로 끼니를 해결하고 할 일 없이 텔레비젼을 쳐다보는 것뿐입니다. 영화는 계속해서 그들의 무미건조하고 암울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 그리고 이 시대 작가주의 영화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동시대에 개봉한 <천국보다 낯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슬로건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었습니다. 근데 이건 80년대 미국을 상징했던 로널드 레이건(1981~1989)이 사용했던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에서 ‘Let’s’만 빼고 의도적으로 갖고 온 것이죠. 게다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링컨을 제치고 레이건이 1위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위대해졌는지, 경제적으로 나아졌는지에 대한 팩트 이전에 그만큼 미국 사회는 80년대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도 한 연설에서 “1980년대까지 내 영화들은 대부분 현실도피적이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하지만 84년에 개봉한 영화임에도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드러나는 미국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첫 장면, 이민자 에바가 공항에 도착해서 윌리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수평트래킹으로 계속 따라갑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8)에서 클레오가 거리를 뛰어가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을 따라 같이 걷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이런 트래킹장면들이 좋습니다. 아무튼, 짐 자무시가 담은 뉴욕의 모습은 전쟁 직후의 도시처럼 스산하고 황량합니다. 에바와 윌리가 함께 있는 열흘 동안, 그들의 일상은 건조하고 무기력하게만 보입니다. 헝가리에서 온 이민자인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윌리의 친구 에디(리차드 에드슨) 역시 경마장에 들락거리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건 뉴욕뿐만 아니라 숙모가 살고 있는 클리블랜드도, 셋이 훌쩍 휴가를 떠난 플로리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윌리를 따라온 에디는 처음 클리블랜드를 둘러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봐, 이거 웃기잖아, 우리 여기 처음인데 다 똑같은 거 같아.” 겉모습 보다는 거기에 사는 그들의 일상이 똑같이 건조하고 암울한 것이겠지요.

 

 

하루 종일 텔레비전으로 드라마, 스포츠, 만화영화를 보는 일상처럼, 매체의 다양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성장한 텔레비전과 홈비디오는 영화산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970년대부터 할리우드 영화는 보다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블록버스터 시장으로 나아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거대자본을 투입하여 큰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거죠. 천만 달러를 투입해 1억 달러의 흥행수익을 낸 <죠스>(1975)가 그 시작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시장은 커지고 할리우드 영화도 거대해지고, 80년대 쏟아지는 블록버스터 영화들 앞에서 유럽은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나 과거의 누벨바그와 작가주의 모더니즘 영화는 안으로는 더 이상의 신선함을 잃어버렸고, 밖으로는 거대자본의 홍수가 쏟아져오고 있었습니다. 80년대에 등장한 ‘누벨이마주(새로운 이미지)’는 어쩌면 프랑스 혹은 유럽영화가 엘리트적인 모더니즘 경향을 벗어남과 동시에 할리우드에 대항하기 위해 과거의 ‘누벨바그’로부터 갖고 온, 다소 안타까운 자구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의 재현을 부정하지만 모더니즘이 갖는 정치-계몽적이고 비대중적 취향도 거부하기에 일종의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즉 할리우드 내러티브도 싫지만 그렇다고 작가주의 영화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누벨 이마주’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렬한 이미지는 겹쳐지고, 내러티브가 사라진 시간은 뒤섞이며, 여러 기법들과 장르는 혼재됩니다.

 

 

<나쁜 피>(1986)는 로맨스를 기본 장르로 삼고 있지만, 중간에 뮤직비디오는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고, 오토바이 탈출이나 자동차 추격씬 등의 액션 장면도 있고, 중간 중간 엉뚱하거나 유머러스한 장면으로 감정을 흩뜨려놓습니다.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로 프랑스에서 천재감독으로 평가받은 레오 까락스의 두 번째 장편영화 <나쁜 피>는 누벨이마주의 상징적인 영화입니다. 그러나 엘리트적이지 않아도 여전히 대중적이진 못하고 현실을 재현하지 않았지만 어디서 본 듯한 장르의 전개, 감정을 드러내려 했으나 과잉된 이미지는 오히려 내면을 알 수 없게 만듭니다. 다분히 프랑스적 영화의 한 경향만을 나타내는 누벨이마주는 결국 짧게 타오르다 식어버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천국보다 낯선>은 저예산 독립영화입니다. <나쁜 피>와 비교하자면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정된 흑백 필름카메라는 한 장면을 롱테이크로 잡습니다. <나쁜 피>가 이미지의 과잉인 영화라면 <천국보다 낯선>은 절제된 최소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김영진 평론가는 황폐한 미국 생활의 이미지를 유럽의 감수성으로 재구성했다고 평가하면서, 그렇기에 짐 자무시의 영화에는 곧잘 포스트모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고 설명합니다.

미국의 영문학도였던 짐 자무시는 대학 졸업 전 프랑스의 시네마테크에서 본 로베르 브레송, 장 뤽 고다르, 야스 오스지로 등의 영화에 심취되어,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영화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짐 자무시 영화의 낯설음은 그러한 영화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지만 <천국보다 낯선>이후 형식의 매너리즘에 빠져 더 이상을 새로움을 만들지 못 했다고 김영진은 덧붙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시에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을 못 본 상황에서 단정지은 실수인 듯합니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허상을 걷어냈으나 암울한 일상을 보여주고 그저 머무르기에 그쳤다면 <패터슨>에서는 같은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한 발자국 나아가려고 합니다. 짐 자무시의 영화는 소외된 자들의 일상을 매번 새롭게 그려냅니다.

 

몇 달 전 보았던 일출이 장관이었습니다. 여기에 언제 또 올까 싶어서 그 감동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사진들을 폴더 안에 고이 모셔져 있지요. 인터넷 사진커뮤니티에서 ‘오늘의 사진’으로 가장 많이 올라오는 것도 일출 아니면 일몰사진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멋진 하늘과 일출을 담은 사진들은 장소만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소위 흔하고 익숙한 ‘달력 사진’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얻은 예술적 감흥은 ‘그곳’을 벗어나면 다시 일어나기 어렵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도 어렵습니다.

반면 사진작가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 구름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시킵니다. 그래서 그저 흘러가는 구름이 그에게는 예술적 영감이 됩니다. 비슷해 보이는 구름들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낯선 곳에서 수동적으로 얻게 되는 낯익은 풍경이 아니라, 일상을 능동적으로 낯설게 보는 방법입니다. 처음 본 클리블랜드마저도 익숙한 풍경으로 인식하는 에디에서, 매일 같은 동네에서 작은 차이들을 발견하고 시를 쓰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브)으로 변해갑니다. 패터슨에게 일상은 때론 천국보다 낯설게 다가옵니다.

 

에바는 윌리의 원룸에서 숙모가 있는 클리블랜드로 떠났지만, 뉴욕에서 보낸 열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냅니다. 그들의 일상은 일탈을 꿈꾸지만, 마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암전 화면처럼, 순간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계속 어둠 속에 묻혀 버립니다. 막상 뉴욕에서 클리블랜드로, 다시 플로리다로 즉흥적인 일탈 속에서도 그들의 삶은 어디서나 똑같이 건조하고 암울하고 황폐해질 뿐입니다. 그 이유가 마지막에 각자의 길로 헤어지는 것처럼 그들이 일상 속에서 소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영화 <패터슨>에서 주인공이 세상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장면이 있습니다. 분신과도 같은 자신이 쓴 시가 빽빽이 적힌 노트를 우연히 강아지 마빈이 모두 찢어버리는 사건 앞에서 패터슨은 절망합니다. 강아지라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아내와도 떨어져 잠시 혼자 있고 싶어 합니다. 세상을 시로 노래하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때 패터슨 앞에 나타난 낯선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포스트모던 시대에 짐 자무시가 <천국보다 낯선>의 미니멀리즘 형식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를 레오 까락스가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댓글 3
  • 2020-05-31 07:54

    <천국보다 낯선>도 좋고,
    짐 자무시도 너무 좋고,
    여기에 올라오는 청량리, 띠우 등의 글도 너무너무 좋습니다.
    요즘 이 게시판을 보는게 저의 낙 중에 하나입니다.

    하여 저의 기쁨과 감사를 담아 이 세미나팀에게 커피(음료) 쏠게요.
    담 세미나 하실 때 제 이름 달고 커피(음료) 한잔씩 드세유~~~~

  • 2020-05-31 08:40

    짐 자무시의 영화가 좀 이해되는 글이네요.
    영화도 찾아보고 싶어지고
    그러고나면 마음이 좀 쓸쓸해질거란 염려도 들고...
    이 쓸쓸함과 마음의 동요를 어찌 처리할까의 문제가 남네요. 이 문제를 어찌 처리할지 생각해보겠습니다.

  • 2020-05-31 13:30

    좋네요
    모처럼 아는 영화들이 나와서 그런가
    (청량리의)영화인문학 공부 내공이 쌓인 덕인가
    잘 읽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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