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세번째 후기 세 번째 달력을 만나다 ; 지뢰복

누룽지
2021-06-11 09:11
362

세 번째 달력을 만나다  - 地雷

 

세상엔 뭔가 많겠지만 내가 만난 달력은 지금까지 3종류였다.

달력이라는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만 달리 어떤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니 할 수 없다.

첫 번째는 1582년에 정해 지금까지 쓰고 있는 그레고리력이다.

갓난아기 때는 아니었겠지만 조금 커서 생일이나 손꼽아 기다리던 어떤 날은 누구라도 당연하게 예수님이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AD(anno domini)BC(before christ)를 나누고  前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그 달력의 시간 세기에 의해 정해진 날짜를 알려주셨다.

그때는 태양계 세 번째 행성의 일정한 공전주기를 단위로 1년이라 정하고 자전주기를 1일로 정해 한 바퀴 돌 동안을 숫자로 꽉 채워 시간의 흐름을 센 이 달력을 신기하다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두 번째 달력 24절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거겠지만 암튼 황도에서 춘분점을 기점으로 15° 간격으로 점을 찍어 모두 24개의 점에 이름을 붙인 달력을 만난 것이다. 어디서 가끔 듣기는 했지만 아이를 낳고 애미로 살게 되면서 함께 세월을 살게 될 내가 품은 새 생명에 대한 애틋함이 이 달력을 들여다 보게 한 것 같다.

아주 건조하게는 지구가 자전축이 기울어 공전하니까 지구의 입장에서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온도와 계절변화를 1년 치로 나누어 만든 달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난 내 고정관념에 충격을 받았다. 시간의 흐름을 세야 하니까 적절한 도구가 숫자인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처음 24절기를 만나고 한 생각이다. 그런데 24절기는 그런 디지털적인 세기가 아닌 매우 아날로그적 세기로 1년을 설명한다. ‘즈음이 되면 만물의 변화가 이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형용사, 동사들이 등장하여 주변 환경의 변화를 알려주고 이 때에 무엇을 하는 게 (씨를 뿌리거나 큰 더위를 조심하거나) 좋다고 말해준다.

12개의 중 사이에 절을 넣어 157/32일 단위로 세는 이 달력이 얼마나 매력있었는지.

 

내게 세 번째 달력은 주역을 배우면서 알게 된 12달 괘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배운 地雷復괘 덕분에 그 간의 많은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우선 24절기 때 뭘 먹거나 어떤 것을 하는 이유를 몰랐던 것이 약간 해결되며 앞으로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될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주변의 연세 드신 어른들이 동지를 亞歲, 작은 설, 까치설날이라 부르셨는데 밤이 가장 긴 이 날이 왜 그렇게 불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팥죽 속에 나이 수 만큼 세알을 빚어 넣어 먹어야 진짜 한 살을 먹는건데 너무 오래 살아 도저히 그 만큼은 못 잡수시겠다며 웃으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단오에는 부채를 주고 동지에는 달력을 준다는 夏扇冬曆도 그렇게 내려왔으니 재미있는 이벤트라 생각해 아이들과 놀았던 것 같다. 다만 그래서 달력회사들이 동지가 되기 전부터 달력을 파는구나 하고 생각은 했었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건 荊楚歲時記에 공공씨 아들이 동짓날 죽어 역귀가 되었는데 붉은 팥을 두려워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역귀를 쫒는다 하였는데 이런 단편적인 지식이 내 목마름을 채워 주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왜?? 가 꼬리를 물고 나왔으니까.

一陽來復하지만 지극히 미약한 기이기 때문에 활개 치는 소인이나 음의 잡귀를 구축(驅逐)해야 하니까 팥죽이 동짓날 중요한 呪物이 됨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참 크다.

동짓날 세시제를 지내고 음복하는 음식들도 이해가 되고 동지를 즈음해 먹던 냉면과 동치미 수정과도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주나라 때 만들어진 24절기가 주역을 기본으로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난 지금까지 그 세계를 전혀 몰랐으니까.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달력이 세상의 이치와 관계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번 나의 고정관념이 깨졌다. 시간의 흐름을 세는 달력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는 고민하기 나름일텐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64괘의 순서상 산지박괘 다음이 지뢰복이지만 12달의 괘를 보면 산지박(음력 9), 중지곤(음력 10), 지뢰복(음력 11)이다.

산지박괘 상구의 碩果不食이 꼭 중지곤의 땅을 통해 지뢰복괘의 일양으로 돌아온다.

더 이상 절망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의 마지막 희망 석과불식이 이치를 순하게 따르는 땅을 통해 일양이 된다니. 품어주고 때로는 남이 보지 않게 묻어주고 또 힘을 주며 여린 일양으로 돌아오게한다. 절망이 승화되지 않고 희망으로 바뀌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절망이라는 그를 치유하는 것이 순한 땅이었다니 눈물이 핑 돈다.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의 운명인 일정한 공전주기, 기울어진 자전축에 북반구 중위도에서 살고 있으며 45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문명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지 만년도 되지 않는 한 생명체, 날개도 없고 아가미도 없어 지표면에 딱 달라붙어 살면서 그 생명체가 본 세상은 어땠을까?

 

이제 七日來復 쯤엔 놀라지 않는다. 효가 6개니까 음의 효를 채워간다면 시간의 순서대로 횡으로 늘어놓아도 공간의 흐름대로 종으로 늘어놓아도 7번째가 되어야 양이 돌아올 수 있으니까. 상징으로서의 7달이 될지 7년이 될지 그건 맥락 속에서 알아채면 된다는 것도 안다. 소인의 도를 따르면 70년이 되도 一陽來復 안할테니까.

지난 번 후기에서 내게도 변화가 올까 한숨을 쉬었는데 세상의 이치는 나같이 작은 미물에게도 공평하게 흐르나보다

여전히 주역공부는 너무 어렵지만 이젠 64괘를 다 보기 전에 포기하기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 4
  • 2021-06-11 13:24

    와우~👍

  • 2021-06-12 07:14

    누룽지님, 이런 어마어마한 후기를 쓴 걸 이제 꼼꼼히 읽었네요. 

    제가 날나리 반장 맞습니다...

    저도 주역의 절기를 보면서 '최고의 레시피'는 바로 주역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쩌면 주역을 가지고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이런 구체적인 쓸 거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거 같았기 때문이죠.

    지금은 배가 산으로 가고 있지만....아마 그때의 느낌이 이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누룽지님은 평소에도 음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잘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네요.

    부럽고....주역 글쓰기에서 한 꼭지 정도는 음식에 관해서 쓰고 싶은 미련을 아직 못 버리고 있는데

    그때 누룽지님의 도움을 받아야 될 듯 하네요.ㅎㅎ

    그리고 주역을 전혀 안들은 사람은 있어도 중간에 파한 사람은 정말 없을 듯 해요.

    갈수록 매력있는 텍스트 아닌가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죠?

    • 2021-06-14 23:48

      저...

      망설이다 답글 다는 건데요

      저는 보이는게 다예요

      도움 드릴게 있을지 모르겠어요

  • 2021-06-15 11:47

    누룽지님의 평소 솔직한 질문들과 이런 철저한 연구(?)에 매번 놀라는 1인 입니다. 

    철부지란 말이 바로 이런 절기를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네요. 절기란 상황들이 흘러가는 때와 마디인데 ᆢ 때에 맞는 행위(나아감과 물러섬)를 못하면 바로 철부지가 되는거였네요ᆢㅜ 

    주역공부하면 절기를 알아 철부지에서 벗어나려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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