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의 대화] 써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안 쓸 이유도 딱히 없었던 그런 후기

이건아마도유자청
2020-11-0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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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안 쓸 이유도 딱히 없었던 후기

: 당연하다는 것,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의심

 

어느 날 아침, 청량리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거대한 신체로 변신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살이 찐 등은 구부러지고, 머리를 조금 들어 올리자 모니터를 향해 뻗은 두툼한 그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여러 손가락들이 그의 눈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둥거렸다. 그는 지금 후기를 쓰고 있었다.

언제서부터 그는 매일 K의 단편소설을 읽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었다. 청량리는 올해 K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처음 K의 글을 읽었을 때, 그의 입에는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그는 놀라웠다. 전혀 알지도 못하고, K의 글을 제대로 읽은 적도 없었지만 청량리는 알고 있었다. 오래 전 니체를 만났을 때처럼 K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저 흐뭇하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되는 사람, K는 좋은 친구가 될 예감이 들었다. 문탁에 있는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날은 K의 글을 함께 읽는 친구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하지만, 문탁에서 직접 얼굴을 보는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줌’을 통해 만났다. 보통 만나는 방법과는 전혀 달랐다. 세수하고 가방매고 걸어서 혹은 차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고 스피커로 혹은 이어폰을 끼고 네모난 화면 위로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너무 낯설었지만 이제는 줌 신체로 변신하는 것에 꽤나 익숙해진 편이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있었으나 거의 매일 K의 글을 통해 만나면서 낯설지는 않았다. 그날 오선민은 초록색 표지의 책 하나를 들고 화면에 나타났다. 제목은 <자유를 향한 여섯 번의 시도>, 부제는 ‘K를 읽는 6개의 키워드’였다. 우리는 짧은 이야기를 부탁했다.

K는 원래 장편 출간을 고려하진 않은 듯하다. 단편 소설의 작가로 스스로를 규정한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단편소설이야말로 K의 정수를 알 수 있는 글이다. K의 단편소설에는 스토리도 없고 친절한 설명도 없고 많은 비약적 전개들이 펼쳐진다. 아예 하나로 묶을 의사가 없어 보인다. 미완의 형식이 바로 K가 단편소설에서 취하려고 했던 형식이 아니었을까?

오선민의 이야기 중에서 청량리는 망원경에 대한 비유가 맘에 들었다.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그는 오선민의 비유가 마치 자신이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대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민한 적은 없는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방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대상을 망원경으로 집중해서 바라보면 그 대상은 배경에서 벗어난 거리감을 얻게 된다. K의 단편소설은 그러한 효과를 노린 듯하다. 그래서 꼭 그래야하는 (사회적)배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야 하는’ 그 모든 것,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K에게는 필요했다. 그에게 정해진 것, 당연한 것은 없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의심은 자신에게도, (그가 속한)공동체에도 중요하다.

 

오선민은 K의 글을 읽고 나서 자신의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이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그렇다. 누군가에게 다가오는 그런 책, 그런 작가, 그런 글들이 있다. 청량리에게 K의 글도 그러했다. 친구들과 함께 K의 글을 읽으면서 뭔지는 전혀 모르겠으나 그에게 다가오는 것들 있었다. 유목-독신-소송-측량-변신-문학 이외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유머’라고 청량리는 생각했다. K의 단편소설들은 대부분 유머스럽다.

영화 <선물>에서 삼류 개그맨인 용기(이정재)는 아내 정연(이영애)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용기는 자신의 코미디프로 녹화현장에 찾아온 정연을 발견한다. 너무 아파서 힘들게 웃고 있는 정연 앞에서 용기는 도저히 개그를 할 수가 없다. 웃기려는 대사를 칠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난다. 그러나 관객은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용기의 표정에 큰 웃음을 터뜨린다. K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유머가 그러하다. 갑충이 된 잠자가 안간힘을 쓰면 침대에 내려오는 장면, 부들거리는 가는 다리를 흔들며 겨우 문손잡이를 돌리는 장면에서 청량리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겨 놓는 게 K의 독특함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잠자의 인생도, 청량리의 인생도, K의 인생도 어쩌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셈이다.

 

짧은 북토크가 끝나고 청량리는 지금 후기를 쓰고 있다. 후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에게 안 써야할 이유도 마땅히 없었다. 그는 문득 ‘필경사 바틀비’가 생각났다. 묘하게 K에게는 바틀비의 냄새가 났다. ‘안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거부하고 떠나지는 않는다. 만일 모순이라는 것이 뭔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연스럽다고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면, 바틀비가 그 모순을 인간의 존재로 거부했던 것처럼, K 역시 그러한 모순에 대한 저항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별로 쓸 이유는 없었지만 안 쓸 이유도 없어서 쓰게 된 후기를, 억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써서 쓰지 않았던 청량리는 이제 슬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컴퓨터 자판에서 손가락을 거두었다.

 

댓글 6
  • 2020-11-02 10:57

    재밌었어요. 북토크.
    글구 이 후기...정말...ㅋ

    30000360091_700.jpg

  • 2020-11-02 12:34

    ㅎㅎㅎㅎ이거슨 청프카, 또는 카량리 ㅋㅋㅋㅋ 아, 프량츠 청프카.
    재미있습니다. 뭔가 다른 의미로 日新又日新 하시는 듯 하녜영!?

    • 2020-11-03 19:20

      찌찌뽕~ 청프카, 카프청... 뭐라고 불러줄까 고민하면서 읽어내려 갔는데.. ㅎㅎ

  • 2020-11-02 17:37

    후기의 변신이네요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20-11-02 19:20

    그러타. 청량리는 그날 아침에 변신해버린 거시어따! 꿈틀꿈틀 많은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면서 이미 낯설어진 자신을 느끼는 거시어따!

    완전 빵 터지는, 안 쓸 수는, 과연 없었겠도다, 싶도다... 커윽!

  • 2020-11-04 13:08

    갑충이 된 잠자가 안간힘을 쓰면 침대에 내려오는 장면, 부들거리는 가는 다리를 흔들며 겨우 문손잡이를 돌리는 장면에서 청량리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겨 놓는 게 K의 독특함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여기가 유머 코드였던 건가요 ??? 제겐 왜 그 유머보다 쓸쓸함이 먼저 와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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