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4회] 달콤한 절제의 맛, 감절(甘節)

봄날
2022-01-26 02:20
654

 

인생은 참아야 할 일투성이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거나 변화하려고 한다. 새해 첫 일출을 보러 산으로, 바다로 가기도 하고, 새로 산 일기장에 정성들여 첫 줄을 쓴다. 작심삼일이 될 것이 뻔한 계획을 또 잡는다. 그런 새해의 다짐을 지키는 데는 크든 작든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다던가, 매일 운동을 한다던가, 하루에 몇 시간씩 공부를 한다던가 하는 일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 실행에는 또 크든 작든 ‘절제’가 요구된다.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금단증상처럼 견디기 힘든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운동이나 공부도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억누르거나 견뎌내야 한다. 운동을 하려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하는 내 몸을 다스려야 하고, 공부도 가령 졸음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고, 견디고, 억눌러야 하는 일투성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늘 절제심을 시험받는다. 주역에도 이런 ‘절제’에 관한 괘가 있다. 60번째 수택절(水澤節)괘는 괘 자체가 60이라는 한 주기를 매듭짓는 자리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인간사에서 중요한 절제를 다루는 괘이기도 하다. 절(節)은 수목의 마디, 뼈의 마디, 음절의 곡조, 사물의 한 단락, 규칙, 절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절(節)이라는 글자에 대나무 죽(竹)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대나무가 마디 하나를 키우고 또 다른 마디 키우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롯한 자연 속의 생명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펼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절제이다. 마디를 매듭짓고 마디를 새로 시작할 때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을 견디고 넘어서는 것, 수택절괘는 절제에 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흐르는 물과 고인 물, 그 경계에서

수택절괘는 위는 물(水), 아래는 연못(澤)의 형상을 하고 있다. 연못에 물이 고여있는 모습이다. 주역에서는 불은 밝음, 지혜, 양의 상징이고, 물은 고난, 어두움, 음의 상징이다. 그래서 물의 형상이 들어있는 괘는 안좋은 괘라고 푼다. 하지만 수택절괘는 의외로 좋다. 단, 하나의 조건을 달고 있기는 하다. 그 단서는 바로 ‘절제’이다. 어떻게 절제할 것인가. 방법은 물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다. 상괘의 물은 흐르는 물이고, 하괘의 물은 연못에 고인 물이다. 물은 연못을 꽉 채우면 흘러 넘친다. 그 흘러넘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일시적으로 흐름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결국 물은 넘치고 만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계속해서 더욱 극단적인 방법으로 물을 막아보는 것과 넘치기 전에 미리 물꼬를 터서 그 흐름을 관리하는 것. 후자의 경우 요구되는 것은 흐르는 물과 고인 물의 경계에서 예민하게 그것을 컨트롤하는 능력, 혹은 감각일 것이다. 이때의 절제는 무조건 찍어누르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멈춰야 할 때는 멈추고, 흘려보내야 할 때는 흘려보내는 것이 더 높은 차원의 절제이다.

수택절괘의 괘사는 ‘절 형 고절 불가정(節 亨 苦節 不可貞)’이다. “절괘는 형통하나, 괴로운 절제는 바르지 않고 오래가지도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고절(苦節)이라는 말은, 괴로운 절제, 억지로 참는다는 뜻이다. 절제란 스스로에게 가하는 강제인데, 그렇게 강제로 하는 절제는 바르지 않다는 뜻이다. 이때의 정(貞)은 ‘바르다’의 뜻이지만, ‘오래가다’의 뜻을 함께 가진다. 즉, 억지로 괴로움을 견디는 방식의 절제는 오래 갈 수 없고 이는 바른 절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절괘의 형통함을 제대로 쓰려면 고절(苦節)해서는 안된다. 상전에는 ‘천지에 절(節)이 있어 사시(四時)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나온다. 한 계절이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계절로 넘어간다. 사계절이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처럼, 하나의 마디가 꽉 차면 다음으로 넘어가면서 순환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절제는 안간힘을 써가며 버티거나, 과정을 무시하고 스킵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고인 물과 흐르는 물의 비유에서, 첫 번째 방법처럼 물을 가두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고절이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미생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때마침 큰 비가 내렸고 다리 밑은 순식간에 개울물이 넘쳤다. 그러나 미생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 기다리다가 홍수에 떠내려가 죽고 말았다.”

 

<사기> <장자> <전국책> 등 여러 고전에 등장하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에피소드이다. 상전에 ‘절은 통함과 막힘을 아는 것(知通塞)’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천이 불러낸 이 미생의 일화는 통함과 막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변한다. 다리 밑이라는 장소를 고집함으로써 미생은 약속도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자신의 생명도 지키지 못했으니, 통함과 막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소치이다.

 

흔히 절제라고 하면 물질에 관한 욕망을 누르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괴로움 혹은 불편함을 동반한다. 속담에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소비는 또 다른 소비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것을 ‘참아야 한다’는 도덕적 태도로 고집할 때 더 극심한 심신의 고통을 유발한다. 금주나 금연을 결심한 사람도 역시 그 결심을 실천하는 것은 극한의 고통이 따른다. 모두 고절이다.  괘사는 고절은 할 수 없다(不可)고 단정한다. 일시적으로는 절제할 수 있어도 오래갈 수 없다. 그런 절제는 실패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절이 아니라면 어떻게 절제하라는 말인가?

 

편안하게 절제할 수 있는 방법

통함과 막힘을 안다면 절제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렵지 않은 절제. 이와 같은 절제를 절괘에서는 안절(安節)이라고 말한다. 편안하게 절제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 수준에 이를 수 있을까. 사실 안절은 실천하는 것말고는 경험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고절과 안절은 절제를 관념으로 접근하느냐, 실천으로 접근하느냐로 구분될지도 모른다. 실천 없는 금연은 불가능하다. 금단증상의 와중에서 시간이 지나면 괴로움이 사라질 것을 아는 이상,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온몸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고절에서 안절로 이행하는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은 물질에도 만족하는 삶,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이 안절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 라이피즘(lifism)이라는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중앙대 김누리 교수다. 라이피즘은 인간의 삶과 생존과 생명을 존중하고, 그 바탕이자 전제인 생태를 중시하는 일련의 사상적, 실천적 활동을 가리킨다. 그가 주창하는 라이피즘의 계기는 의외로 단순해 보인다. 그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아버지 김철이 생전에 늘 “생활수준을 높이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생활수준을 한번 높여 놓으면, 그것을 내리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그러면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되는 거지요. 전 가난이 그다지 두렵지 않아요. 가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방법을 자연스레 익힌 거지요.”(한겨레 2022년 1월 1일자, ‘살롱 드 여울’ 인터뷰 기사에서 )

 

안절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소박한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삶과 맥락이 일치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가난을 결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의 토대로 여기는 것. 우리가 지향하는 덜 벌고, 덜 쓰는 삶은 다름 아닌 안절이다. 그렇다고 안절이 물질적인 측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과도한 격정같은 감정의 소모를 절제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도 안절이다.

 

공생을 위한 절제는 달콤하다

그런데 주역은 안절이 궁극의 절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안절의 절제는 자기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그래서 안절은 늘 자기만족에 그친다. 수택절괘의 구오 효사는 이 자기만족을 넘어선 절제인 감절(甘節)에 대해 말한다. 구오의 효사는 ‘감절 길 왕유상(甘節 吉 往有尙)’이다. “달콤한 절제는 길하니 나아가면 상서로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푼다. 가장 높은 차원의 절제에 이르면 절제가 달콤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안절이 자신의 절제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달달한 감절은 나의 절제가 타인의 기쁨이 되는 절제이다. 정이천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에 있어서는 편안히 행하고 천하는 기뻐하며 따르니, 절제함이 달고 아름답다.” 그의 해석을 따르면 절제라는 것은 자신이 편안히 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사람들과 조응하는 것이다. 절제의 본질은 이미 나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인 것이다. 나는 구오 효사의 갈 왕(往)자를 타인과의 적극적인 교류, 교감으로 해석한다.

 

이 감절은 이반 일리치의 용어, 컨비비얼리티(conviviality)와 닮아있다. 컨비비얼리티라는 말은 ‘개개인이 인위적인 제도의 억압 없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생기발랄하게 스스로 학습하고 지식과 기술의 경험을 나누며 서로 도와주는 자율적 공생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때의 컨비비얼(convivial)은 ‘화기애애한 모임의 즐거움을 선호한다’는 뜻으로, 원래는 스페인어의 ‘연회’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단어에는 두 가지의 가치가 녹아들어 있다. 하나는 ‘개인의 지극한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가 ‘남과 더불어 누림’이다. 나와 타인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율적으로 절제하는 것, 함께 하는 기쁨을 이루는 근본정신이 바로 감절이다.

 

절제를 ‘~해야 한다’는 당위로서 접근하면 고절이 되기 쉽지만, 생활 속에서 습관이나 태도를 바꿔 자연스럽게 몸에 절제가 배게 되면 안절로 변화한다. 말은 쉽지만 안절이 되기까지 많은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역은 안절이 궁극의 절제가 아니라 감절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감절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감이 오지 않았을 때, 나는 문탁 홈페이지의 ‘공생자행성’을 보고 무릎을 쳤다. 그곳에는 기꺼이 절제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감절하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http://moontaknet.com/?page_id=244) 생태적인 삶, 반소비적인 삶의 지향에 공감하면서 기꺼이 절제에 동참하는 친구들이다. 혼자 절제하는 것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친구들의 기쁨 덕에, 또 새로운 절제의 의욕도 생긴다. 혼자 하는 절제는 편안하지만, 함께 하는 절제는 달콤한 기쁨을 동반한다. 달달한 감절의 공생.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댓글 7
  • 2022-01-26 09:00

    안절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나아가 감절이 있었네요. 뭐든 나만 좋은거로 끝날게 아니라 함께 해야하나 봅니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 2022-01-26 09:50

    컨비비얼리티를 잇는 감절 맘에 들어요  

    올해도 함께 감저ㄹ해보아요

  • 2022-01-26 10:12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르는건 뭐죠ㅎㅎ

    잘 읽었습니다~ 

    안절도 감절도 참 소중한 마음이 그 안에 숨어 있는 듯

  • 2022-01-27 09:25

    작년에 수택절 괘사를 점사로 받아놓고 끙끙댔던 기억이 떠올라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고절이 뭔지 다시 살피고, 감절의 희망은 놓지 않아야겠어요!

  • 2022-01-27 11:35

    '어얼쑤'  이모티 좀 찾아줘요~~

  • 2022-01-30 20:39

    안절, 감절을 공생과 연결지으니 그럴듯하네요^^

    주역세미나에서 절제가 금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었다면 이제 그 달콤함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샘의 글이네요

    잘 읽었어요~~

  • 2023-04-27 15:37

    면접관님이 면접을 보고있던도중 저에게 감절에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하시저라구요 좋은의미일까요..?? 읽어봐도 도통 의미를 잘모르겠네요...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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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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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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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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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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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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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63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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