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4회] 무엇이 비린 것인가?

요요
2022-01-16 17:08
440

무엇이 비린 것인가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새벽이는 직접행동DxE(Direct Action Everywhere) 활동가들이 화성에 있는 한 종돈장에서 훔쳐온 돼지이다. 이들은 왜 돼지를 훔치는 절도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자발적 참여자들과 함께 매주 도살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몸으로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차를 막았다. 도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의 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첫 도살장 방문 후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그들은 돼지 5,000여 마리를 기르는 종돈장에 몰래 들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돼지 세 마리를 훔쳤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1,7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된다. 새벽이는 공개 구조되어 살아남은 돼지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새벽이의 보금자리인 생추어리를 만들었다. 생추어리(sanctuary)는 ‘saint’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곳’을 뜻하는 라틴어 ‘sanctuarium’에서 왔다.(위키피디아) 생추어리는 마치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면책특권이 주어지고 보호받을 수 있는 ‘소도’와 같은 성역이자 피난처이다. 수태될 때부터 고기가 되기로 운명 지어진 돼지들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새벽이는 지옥행 운명으로부터 구조된 돼지가 되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는 역설은 ‘죽이는 것은 합법이고 살리는 것은 불법인’(작가 홍은전의 추천사에서 인용)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웅변한다.

 

새벽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더더욱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집단 사육하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먹는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가 커진다. 이런 현실을 마주하면서 고심 끝에 나름의 윤리적 결정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육식 권하는 사회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고기 권하는 사회이다. 육식문화는 튼튼한 몸과 강인한 체력을 강조하는 건강담론, 위생담론과 함께 사회 진보와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길을 간 일본을 보자. 일본은 7세기 이후 1000년이 넘도록 이런 저런 이유로 네발달린 짐승을 먹는 것이 금지된 나라였다. 그런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의 정책으로 육식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몸집이 왜소한 것도 나라가 부강하지 않은 것도 육식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와규가 맛있고 비싼 고급 쇠고기로 등극하고 쓰끼야끼와 같은 음식이 일본의 대표음식이 된 것은 채 150년이 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불교문화마저 바꾸어버렸다. 그때부터 승려들의 육식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개화된 문명인으로 살려면 육식을 좋아해야 했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인도도 오랫동안 채식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소년시절의 간디 역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서양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디의 부모는 경건한 힌두교도로 육식을 멀리했다. 간디는 부모 몰래 친구들과 육식을 한 것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느꼈던 경험을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근대문명은 고기를 전 세계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공장식 축산과 도살은 근대문명에 필수적인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고,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믿음이 지배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생각과 행위를 육식주의, 고기 중독이라고 부른다. 육식이 몸에 좋고 더 맛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미각의 쾌락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관음증적 포르노에 가까운 먹방 마다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등장하고 그것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우리를 보면 육식주의가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육식은 비린 것, 채식은 향기로운 것?

그렇다면 붓다는 육식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불교는 육식을 금한다는 우리의 통념과 달리 붓다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걸식으로 음식을 구한 고대 인도의 불교 수행승들은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붓다가 금지한 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폭력과 살생이었지 육식이 아니었다. 세 가지 경우에 육식이 금지되었다.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자신을 위해 죽였다고 듣거나, 자신에게 먹이기 위해 죽인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주어진 음식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이런 불교 수행승들의 음식문화는 육식과 기름진 음식을 엄격하게 금지하던 수행자들로부터 의혹을 샀다. 『숫타니파타』에는 대놓고 붓다의 육식을 문제 삼는 대화가 등장한다. 히말라야산에서 야생수수, 풀씨, 야생 콩, 나무열매와 같은 수수하고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금욕하던 아마간다라는 고행자가 있었다. 그는 육식을 비린 것,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간다는 붓다가 물고기나 동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붓다를 찾아가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친척인 그대는 새의 고기를 훌륭하게 요리해서 쌀밥과 함께 즐기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아마간다의 물음에 붓다는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붓다의 대답은 명확했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말과 행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 비천하게 행동하는 것이 비린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를 가지고 비린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려 하지 말고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답이었다.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숫타니파타』 『아마간다의 경』)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붓다는 매일같이 고행하고 경전을 외우고 철마다 수련하는 루틴에 철저하다고 하여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고 그 조건을 잘 살펴 의혹에서 떠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어떤 금기나 계율을 묵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는 것, 즉 지혜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붓다는 식사초대를 받아 훌륭한 음식이 나오면 거절하지도 물리치지도 않았다. 어떤 음식이든 감사히 먹었다. 붓다의 위대함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붓다의 위대함은 음식의 맛에 탐닉하거나 매혹되지 않는 데 있었다. 식사 초대에 응하여 음식을 먹을 때 붓다는 다음에도 이렇게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미각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맛지마니까야』 『지바까의 경』)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붓다는 당시의 고행주의자들과 달리 금욕과 고행을 절대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쾌락주의는 눈먼 욕망을 따르는 것이요, 고행주의는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붓다의 관심은 육식이냐 채식이냐, 쾌락이냐 고행이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붓다가 감각적 쾌락과 미식을 즐긴다고 오해받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한편 이와 반대로 붓다가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바라문 우다인은 제자들이 붓다를 존경하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했다. 그는 붓다가 ‘식사를 적게 하고, 어떠한 옷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음식으로도 만족하고, 어떠한 처소로도 만족하고, 고요한 숲속에서 멀리 여읨을 닦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붓다를 찾아가 그런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붓다는 그의 믿음에 어긋나는 대답을 했다. 자신은 때때로 양껏 배부르게 먹기도 하며, 좋은 옷감으로 만든 멋진 옷을 입기도 하고, 고급요리를 먹기도 하며,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된 누각에서 지내기도 하고, 재가자, 대신들, 왕들, 이교도들과 어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금욕 때문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지혜를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이다.(『맛지마니까야』 『훌륭한 가문의 우다인에 대한 큰 경』)

 

붓다의 대답은 ‘나의 가르침은 고행이나 금욕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반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간다의 물음에 대해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한 대답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붓다가 누구보다도 당시에 성행했던, 제사를 빙자한 무의미한 동물 살육에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무례한 것이야말로 비린 것이다. 비린 것은 우리 자신을 괴로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타자들 또한 괴로움에 빠뜨리는 말과 행동과 생각이다.

 

우리는 더 이상 붓다가 비판했던 동물희생제의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수는 당시의 동물희생제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나라에서만 2020년 한 해에 도살된 전체 가축 수가 11억 마리가 넘는다.(이중 10억 마리가 닭이다.) 전 지구적인 범위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매년 100억 마리 이상의 가축이 도살되고 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세상에 붓다가 함께 살고 있다면 아마간다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는 붓다의 대답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육식의 현실에 대한 외면도 도피도 체념도 합리화도 아니다. 붓다의 대답은 육식은 나쁘고 채식은 좋다는 선악 판단이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나아가 그 대답은 비린 것의 근본을 탐색하게 한다. 더 맛있는 것을 원하고 미각의 쾌락을 좇고, 그리고 생명 보다 자본과 이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간다는 ‘당신이 생각하는 비린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붓다는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붓다의 대답을 듣고 아마간다는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고수했던 고행과 금욕을 버리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편으로는 동물들을 오직 인간을 위한 고기로만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의 현실에 분노하고, 다른 한편 종종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번뇌에 빠지곤 하는 우리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사이 그리고 아마간다와 붓다 사이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 나는 언제쯤이면 붓다를 따라 담담하게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까?

 

 

 

 

 

댓글 10
  • 2022-01-17 10:35

    미각의 쾌락~ 딱 요즘 맛집전성시대 문화네요. 전 어디선가 본 이 말을 자주 떠올리는데요, 맛을 탐닉할수록 멋을 상실한다는..멋을 찾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멋진 세상에 대한 성찰로 읽혔어요^^

  • 2022-01-17 10:40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ㅋㅋ... 요요님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동아시아 근대성 공부할 때 읽었던 <메이로쿠자시>(明六雜誌)가 떠올랐어요. 그 잡지는 메이지초기 계몽학술잡지였어요.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만들었던 최초의 근대잡지이죠. 그런데 그 잡지에 '소고기' 이야기가 엄청 나와요. '소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엄청난 이슈였죠. 단발이나 양복 못지 않게 소고기를 먹는 문제가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닌가의 바로미터였으니까요. 결국 1872년(메이지 5년) 천황은 고기반찬을 들이라 명합니다. 근대화가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육식을 해왔지요.세종대왕이 엄청 육식을 즐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당뇨?! ㅋㅋㅋ)  왜 전근대 일본사회는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조선은 육식을 했을까? 자기수양-성리학적 주체인 조선 사대부들은 육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갑자기 육식에 대한 문화적 해석, 고고학적 접근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 2022-01-17 10:55

    최근 <Seaspiracy>와 <Cowspiracy>라는 다큐를 보고... 식구들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고민이 깊어졌더랬지요.

    부다의 가르침에 대한 선생님의 글이 참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무엇이 비린것이고, 탐진치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고민으로부터 해탈하는 지혜!

    탐나네요^^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1:20

     "육식이냐, 채식이냐가 아니라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일상의 윤리이자 태도였다. 비린 것은 육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괴로움을 낳는 탐·진·치인 것이다."

    요즘 여러가지 이유로 채식을 해야하나 고민중이었는데 샘 글을 읽으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오네요^^

    감사합니다~~

     

  • 2022-01-17 11:25

    너무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7 12:44

    무엇이 비린 것인가...

    맛에 집착하지 않고 음식에 대해 절제하는 것!

     

    채식모임하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라 깊이 와닿았습니다

    요요샘,  감사합니다~~

     

  • 2022-01-17 18:23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1-18 09:54

    주말에 만난 아낫님은 비건이세요. 아낫님은 공장삭축산과 도살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위험성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사람다운 일을 하기 어려운 세상이네요....잘 읽었습니다.

  • 2022-01-19 18:11

    오랜 질문을 여러 결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02-06 11:23

    먹는 걸 좋아하는 자신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들어온 한 구절은 이거에요.

     “붓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무엇을 살펴야 하는 지 놓치고 있는 아마간다의 허를 찔렀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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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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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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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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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60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68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조회 15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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