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2회] 두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요요
2021-09-08 10:16
612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으려면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 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숫타니파타』 3품 8 『화살의 경』)

 

최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해(苦海)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고 있다. 작년 가을, 긍정과 명랑의 아이콘이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 추운 겨울날 새벽 어머니는 자살충동을 느끼고 집을 나섰다. 천만 다행으로 길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찾은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급히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이번에는 치매가 진행 중이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무조건 어머니를 데려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며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버지도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받아야했다.

 

퇴원한 날 어머니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상사고를 당해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은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나 했는데 얼마 전 어머니의 직장과 질 사이에 누공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 수술을 결정했는데 수술 후 어머니는 컨디션 난조를 보이고 있다.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내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일들에 대처하고 싶은데, 그것이 참, 쉽지 않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

 

내 부모님이 그렇듯이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생로병사의 사건들은 결국 닥쳐오고야 만다. 2500년 전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가 안락한 왕궁을 떠나 출가한 것도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들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마주침을 통해 그는 삶이란 괴로움이고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예리하게 직시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 수행자가 되었고 마침내 깨달은 자 붓다가 되어 고통이 종식되었음을 선언했다. 그가 성취한 괴로움의 종식이란 어떤 상태일까. 깨달은 자가 되면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를 주제로 붓다 자신이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일반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도 느끼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지혜로운 사람들도 역시 즐거운 느낌도 느끼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과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붓다에 따르면 깨달은 자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 느낌이란 무엇일까? 신경생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뇌』에서 느낌이란 우리 신경계의 자동적 항상성 조절 기제라고 설명한다. 그는 느낌을 좀 더 세분하여 정서와 느낌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정서는 신경계의 작용인 신체적 표상이고, 느낌은 신체적 표상(정서)에 대응하는 심적 표상이다. 즉 느낌은 특정한 신체상태에 대한 관념 혹은 지각이다.

 

우리는 붓다가 말하는 느낌을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정의하는 정서와 느낌을 통칭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그 기반은 외부와 접촉하면서 생겨나는 몸의 반응과 그것에 대한 심적 표상이다. 신체의 상태에 따라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갖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몸에 열이 나면 괴로운 느낌을 갖게 되고, 열이 떨어지면 즐거운 느낌을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그러니 보통사람이든 붓다든 자기 신체 상태에 대한 지각으로서 느낌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비록 느낌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느낌이 일어날 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슬퍼하고, 비탄하고, 비통해 하고, 가슴을 치며 울고, 착란에 빠진다. 그들은 두 가지 종류의 고통, 즉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느낀다.(…)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슬퍼하지 않고, 비탄하지 않고, 비통해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지 않고, 착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의 고통, 즉 신체적인 고통은 느끼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보통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신체적 고통에 더해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괴로운 느낌에 접촉하면 그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멈춘다. 붓다는 괴로운 느낌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첫 번째 화살에, 신체적 고통에 덧붙여지는 정신적 고통을 두 번째 화살에 비유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첫 번째 화살만을 맞는 것에 비해 보통 사람들은 첫 번째 화살에 이어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의 뿌리, ··치 삼독

 

살아있는 한 첫 번째 화살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와 달리 두 번째 화살은 겪을 수도 있고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정신적 고통이다. 두 번째 화살은 신체적인 느낌에 덧붙여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들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정신적 고통을 낳는 마음의 작용을 특별히 번뇌라고 부른다.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수동적이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고, 생산적 역량을 감소시킨다. 두 번째 화살은 바로 그러한 번뇌들이다. 번뇌에 붙들려 버릴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화살로 인한 괴로움을 겪게 된다.

 

일반 사람은 (…) 괴로운 느낌에 접촉되면 분노를 품게 된다. 그가 분노를 품게 될 때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 (…) 그가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찾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발생과 소멸, 유혹과 위험, 그리고 여읨에 관하여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할 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지의 잠재적 경향이 그에게 잠재된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두 번째 화살은 탐욕, 분노 그리고 무지(어리석음)로 인한 괴로움이다. 이것을 탐(貪)·진(瞋)·치(癡) 삼독이라고 부른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 보통 사람들은 그 느낌들에 대해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잠재적 경향, 즉 번뇌의 습기를 쌓아 나간다. 잠재적 경향은 습관과 패턴으로 반복된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분노를 품고, 분노를 키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갈애를 느끼고, 갈망을 키운다. 느낌들은 무상하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느낌도 생겨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느낌도 사라진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게 일어난 무상한 느낌들을, 무상한 느낌들에 대한 습의 반복을 아무런 반성적 성찰 없이 곧바로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다. 그럴 때 여지없이 우리는 스스로 불러들인 두 번째 화살에 맞는다.

 

부모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처럼 비통해 하고, 세상에 ‘나’보다 더 가여운 사람이 없다는 듯이 자기연민에 빠지고,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나’의 처지를 한탄하고, ‘나‘의 수고로움을 몰라주는 주변사람들을 원망했다. 갈팡질팡하는 ‘나’의 무능력을 탓하고 자책했다. 그러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두 번째 화살은 이렇게 우리를 정신적 고통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해있는 조건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살피지 못하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를 착란에 빠뜨려서 내 생각과 감정 외에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 상상이나 망상에 가까운 부적합한 관념과 그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의 노예가 된다. 두 번째 화살의 비유는 그런 속박된 마음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화살은 공부와 수행의 영역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와, 이미 번뇌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는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과 지혜를 길러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나무토막 같은 존재가 되거나 감정이 메마른 냉정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물들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온갖 생명체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더 예민한 감각을 갖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의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화살을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로부터 자유로웠던 붓다를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80세의 노쇠한 붓다는 금세공사 쭌다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혈변이 섞인 설사증세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붓다 역시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라는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강한 선정과 삼매의 힘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붓다는 쭌다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쭌다가 자신에게 공양한 일로 괴로워하거나 남들로부터 비난받을까 염려했다. 그는 쭌다를 위해 “열반 직전의 붓다에 대한 공양만큼 공덕이 큰 것은 없다”는 자비의 말을 남겼다.

 

사람이 모인 곳이다 보니 붓다를 따르는 수행자 공동체에서도 갈등과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붓다라 해도 공동체적 삶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언젠가 우안거 중에 꼬삼비의 수행자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화장실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었다. 이로부터 그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사사건건 서로를 비난하고 저주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의 귀에는 화합하라는 붓다의 조언이 들리지도 않았다. 붓다는 자신의 견해에 완고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았다. 그는 꼬삼비를 떠나 홀로 숲으로 갔다. 붓다가 아니라 서로 내가 옳다며 다투는 수행자들에게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나는 이런 상황에서 숲에서 붓다가 누렸을 평정과 고요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첫 번째 화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는 괴로움을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파악한다. 첫 번째 화살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의 영역에 속한다면 두 번째 화살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 피할 수도 있는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두 번째 화살은 공부와 수행의 영역이다. 공부와 수행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 두 번째 화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붓다는 어떤 고통도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고통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두 번째 화살을 맞고 괴로워하고 있다 해도 다행인 것은 이 괴로움이 우리를 영원히 얽매는 족쇄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족쇄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풀 수 있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 족쇄를 완전히 풀지 못한다 해도 그 괴로움이 탐·진·치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인 번뇌라는 것을 알고 지혜를 키우는 공부와 수행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두 번째 화살을 뽑을 희망도 있지 않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에서 그것을 느낀다. 그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더라도 속박을 여읜 상태로 그것을 느낀다. 이들을 태어남, 늙음, 죽음에서 여읜 자,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불쾌와 절망에서 여읜 자, 괴로움에서 여읜 자라고 한다.(『쌍윳따니까야』 36:6, 『화살의 경』)

 

댓글 11
  • 2021-09-08 11:02

    지난 해 올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이런 생각도 두 번째 화살이겠죠? 두 번째 화살 피하기 어렵네요.....

  • 2021-09-08 11:58

    저를 지나쳐 날아가는 화살도 가져다가 제 몸에 꽂아넣는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ㅠ

  • 2021-09-08 12:05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귀가 안들리시니 급하게 연락할 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게 되니 한참 연락없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참다참다 전화를 하신 듯.ㅎㅎ 요 며칠 새 기침이 심하고 몸도 안 좋은데 꿈자리도 안좋다고, 자식 걱정에 전화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일단 아버지가 내 말도 잘 못들으시니까 당신이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하고...그러려면 왜 전화를 하셨나 싶을 정도로 우린 불통이었어요. 고함을 지르듯 해야 겨우 한 두 마디 알아들으시니 그냥 듣고 있지만 '기침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만 열댓번 하는 아버지와의 통화는 짜증이 났지요. 그러다 요요샘의 이 글이 생각났어요. '아,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저렇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도 어디냐, 꿈자리가 나쁘다고 자식걱정을 하는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게 어디냐'하는 생각에 미치자, 오히려 행복한 느낌이 밀려오네요. 이 건에 대해서는 두번 째 화살을 피한 것 같습니다.ㅎㅎ

    • 2021-09-08 12:0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9-08 12:08

    傷!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onebyone.gif?action_id=68dae09acacd7acb36a918266dd2100!!

    버뜨 나는.... ㅠㅠ

  • 2021-09-08 12:55

    첫번째 화살을 맞으면 마치 자동문이 열리는 것처럼 우리는 두번째 화살을 가슴에 박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이건 두번째 화살이니까 괴로워할 필요없어 하고 생각할 때,우리는 이미 그 화살을 끌어안아버리고 있죠

    저는 그 첫번째 화살을 온전히 맞아버리는 능력 또는 힘에 두번째 화살을 피할수 있는 열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능력은 요요샘 글에도 있듯이 수행,성찰, 공부..이런 것들이겠죠~

    요요샘~오랜만에 ..너무 잘 읽었습니다!

     

  • 2021-09-08 13:09

    첫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알게되면 피할수 있는 두번째 화살

    관점과 태도의 변화로 자유로울 수 있다

    그건 다른 누가 하는게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는 것이다

    두번째 화살이라도 피해가보자 고 생각은 하나...



     

  • 2021-09-08 19:44

    공부와 수행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화살의 필연성을 직시함으로써 두 번째 화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_라는 요요샘의 글이 허둥되는 저에게 와서 두들겨 주셨습니다~^^ 글이 너무 좋아요^^

  • 2021-09-09 20:36

    샘^^ 잘 읽었습니다^^ 

  • 2021-09-09 22:09

    저도 잘 읽었습니다

    총알에 화살에 정신없는하루입니다

  • 2021-09-30 13:18

    어찌 이리 글을 맛깔나게 잘쓰시는지..감동 ㅠㅠ

봄날의 주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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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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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6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1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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