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헤이 유교걸 5회]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고은
2021-03-03 09:44
653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연애의

  딜레마에

  빠지다

 

 

 

 

 

 

 

연애의 딜레마

 

   거의 6년 만에 솔로가 되었다. 간만에 솔로가 되니 ‘이제 연애 그만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 애인과는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연애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 명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연애할 때면 애인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에 휩싸이고, 연인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긴다. 다른 이와 깊은 관계를 맺을 시 그 상대가 나의 성적 지향성에 부합한다면 바람피우는 일이 된다. (나의 경우엔 내 애인의 성별에 크게 개의치 않으니 사랑하는 내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애매해진다) 물론 다른 관계를 열심히 배타적으로 만들어도 애인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다투거나 같은 일에 의견이 갈릴 때면 상대와 합일될 수 없음을 체감하면서 외로움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는 대개 낯선 존재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줄 내 편을 찾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시작된다. 외롭지 않기 위해 시작한 연애가 외로움을 만들고,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별을 했다가도 다시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연애를 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연애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 실마리는 내가 경험하는 독점적 연애, 로맨틱한 연애의 ‘ㅇ’자 도 모를 것 같은 공자가 중요하게 여긴 ‘仁(인)’에 있었다.

 

▲연애의 딜레마

 

 

 

 

 

 

정체가 묘연한 仁

 

   仁은 공자가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오늘날 동양고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한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오래도록 仁을 이해하지 못했다. 『논어』를 들여다봐도 쉽게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공자는 어떤 개념도 특정해서 설명해준 적이 없거니와, 仁에 대해서는 더욱 말을 아꼈다고 한다**. 개념을 풀어낸 사전을 찾아보아도 그 뜻이 불명확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자 사전에 적힌 “어질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중국사상문화사전』(미조구치 유조 외)에 쓰인 “애정 혹은 연민”은 무얼 의미한단 말인가.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하며 뒷전으로 미뤄뒀었는데, 연애 딜레마를 고민하던 차에 갑자기 자공이 공자에게 仁에 관해 물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子貢曰 :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자공이 말했다. “만일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인이라 할 만합니까?” (6:28)

 

 

▲자공

 

   질문을 주고받는 낌새를 보아하니 자공도 仁을 묘연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는 나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내가 仁을 훌륭한 성품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공 역시 仁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이라 여겼다. 굳이 따지자면 자공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자는 자공의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완벽한 것을 기준으로 잡고 시작하면 도달하지 못할 목표라고 쉽게 포기하거나, 방향을 잘못 잡아 허황된 꿈을 꿀 위험이 있다. 공자는 자공의 말을 옛날 옛적 훌륭한 임금이라 칭송받는 성인들도 해내지 못할 것이라며 자르고는 자공의 눈높이에 맞는 이야기를 해준다.

 

子曰 :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하다고만 하겠는가?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근심하셨다! 어진 사람[仁者]은 자신이 서고자 하는 것으로 남도 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남도 통달하게 한다.” 

 

   공자는 자공에게 성인이 아닌 보통의 인간도 仁을 행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공자의 말도 만만치 않다. 내가 움직이면 다른 사람도 움직인다는, 다른 존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나부터 움직이라는 말은 나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걸까? 이질적인 존재가 수두룩한 가운데, 한 명뿐인 애인하고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게 나의 현실인데…. 자공은 공자의 이 같은 확신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졌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인보다 더 높이는 것이 없다. (子曰…好仁者 無以尙之…) …”(4:6)

** “공자께서는 이익과 운명 그리고 인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다.(子罕言利與命與仁.)”(9:1)

 

 

 

 

 

 

仁도 연애도 순환의 문제

 

   당시 仁은 종종 쓰이던 단어로 시와 의학서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중 옛 의학서에서는 손발이 마비되는 것을 仁하지 못한 것(不仁)이라 표현했다. 손발의 저림은 체했을 때나 급격한 빈혈이 왔을 때처럼 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 발생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仁이란 마비나 고립과 거리가 먼, 순환이 잘 되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때 순환이 잘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건강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환은 내 몸 안에서만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몸 안의 세포들부터 외부의 세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니, 나 역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상태일 때야 원활한 순환이 가능하다.

 

   이전에 사용되었던 맥락을 따라 다시 보니 仁에 대한 조금 감이 잡히는 듯했다. 仁은 사람이라면, 아니 생명이라면 누구나 나 이외의 존재들과 연결된 채 살아가고자 하는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게 보면 仁과 연애에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연애도 仁만큼이나 어떤 존재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일이다. 합일을 향한 의지와 다른 관계를 배타적으로 만드는 연애의 과정이 그것을 보여준다. 합일의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들이닥치는 외로움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지 못했다는 절망에 가깝다. 연애의 문제는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仁과 연애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연애가 다른 관계를 차치하고 단둘이서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仁은 만물과 연결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가 仁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논어』에 주석을 단 주희는 이렇게 설명한다. “仁은 천지만물을 하나로 여겨서 자기가 아님이 없을 뿐이다.”(仁者, 以天下萬物, 爲一體, 莫非己也.) 순환이 정말 잘 되면 온 세상과 통한다. 따라서 仁한 사람은 아무리 독단적으로 보이는 행동이라도 내 한 몸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의 일은 좁게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일이고 더 넓게는 얼굴도 알지 못한 타인과 인간 외 존재의 일이다. 시설에 갇힌 장애인, 가장 음지에 있는 노숙자, 먼 나라 난민,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가축, 기후위기를 맞이한 지구를 자신과 같이 여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연애가 구원처는 아니지만, 현장이 될 수는 있다.

 

   그간 꾸준히 연애를 해왔으면서도 연애를 답답하게 느꼈던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을 수 있었다. 오래도록 연애를 하면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을 거라고, 연애가 관계의 중추라고 생각했다. 몇 번의 연애가 끝나고 20대 후반이 되고 난 뒤에야 연애가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줄 구원처가 아님을 알게 됐다. 도리어 요즘엔 내 옆에 사랑하는 애인의 자리뿐만 아니라 퇴직한 아빠, 아픈 강아지, 식탁에 오르는 돼지, 거리에서 사라진 장애인과 같은 이들의 자리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느꼈던 답답함은 연애를 근절하고 싶다는 생각이라기보단, 단둘만의 관계로는 세상과 연결된 몸이 될 수 없음을 느꼈던 일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내게 연애를 할까,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아진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연애에 쏠린 고민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공자가 말하는 仁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본다. 어떻게 하면 만물과 연결될 수 있을까?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仁-능력을 기르는 방법을 귀띔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가까이 자신에게서 취하여 남을 헤아린다면 인(仁)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곧 만물과 같다는 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 대신 만물도 나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은 반추를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면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을 원할 수도 있고, 내가 아프다면 어떤 존재 역시 아플 수 있다. 이때 나의 경험은 나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나를 벗어나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니 어떤 관계가 누군가와 특별히 밀접하다고 곧 不仁은 아니다. 仁-능력이 내가 가진 단서들로부터 길러진다는 것은 仁이 구체적이고 소소한 일상의 영역에 있음을 의미한다. 仁이란 보이든 일상에서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감하며 동시에 그것을 일상에서 구현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만의 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관계를 통해 반추하고 다른 관계로 확장할 수 있다면 연애 역시 仁-능력을 키울 수 있는 단서가, 仁을 발현하는 현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구원처 아닌 현장

 

 

 

 

 

댓글 7
  • 2021-03-04 01:05

    仁이 혹시 사람 인+두 이자의 결합인가요??? 헉.

    • 2021-03-17 13:51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 2021-03-04 19:36

    연애를 저렇게 어렵게 해서야 원 쯧쯧
    仁 따위 집어치우고 연애를 풍선처럼 가볍게~ 감자칩 처럼 바삭하게~ 해 보아요.

    • 2021-03-05 05:35

      봉옥언니 연애의 달인!!!!

    • 2021-03-06 21:24

      ㅋㅋ 네 유념하겠습니다!

  • 2021-03-09 20:41

    연애가 일부일처 혼인관계의 prequel 프리퀄 같은 거군요... 흐음...

  • 2021-03-16 23:32

    仁이랑 연예랑 연결시킨 게 재밌네요.

    연예가 무거워 질 때 仁을 떠올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암튼 관계에 대한 얘기니깐. ㅎ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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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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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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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조회 115
영화대로 42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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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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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63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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