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헤이 유교걸 4회] 공자님은 자기계발이 좋다고 하셨어

고은
2020-12-26 11:50
561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공자님은

자기계발이

좋다고 하셨어

 

 

 

 

 

 

 

전공에 대한 거부감

 

   2017년 겨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이 평창에 모였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오래 공부한 청년들이 가진 욕망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길드다가 탄생했으니, 길드다는 시작부터 많은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특출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내가 잘 모르는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17년 평창에 모인 4명의 청년과 문탁 네트워크의 선생님들

 

   길드다가 시작된 뒤로는 길드다 일에 허덕였다. 퀴어나 장애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내게 길드다의 멤버들은 그들만큼이나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한 멤버는 쓰고 싶은 글이 명확했다. 그가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길 바라며 내가 길드다 운영 일을 좀 더 맡았고,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주제의 책과 이슈를 백업했다. 다른 멤버는 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있는 술자리에 끼거나, 술 먹기를 썩 즐기지 않는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술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길드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중요하게 여겨진 건 전공에 대한 개개인의 역량이었다. 그간의 행적으로 미루어보면 내 전공은 동양고전이나 다름없었으나, 나는 전공을 전면에 잘 내세우지 않았다. 전공, 그러니까 나의 일을 앞세우는 건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낮추고 관계를 면밀하게 살피라는 『논어』의 이야기에 크게 감명받았던 시기였으므로 전공에 집중하는 건 경쟁을 위한 자기계발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했다.

 

 

 

 

 

忠과 恕

 

   올해 2020년 길드다 공동 세미나에는 두 시즌 연달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원이 몰렸다. 시간과 에너지는 언제나 부족했다. 『논어』 강의와 세미나를 듣고 글을 연재하는 시간을 줄여서 공동 세미나를 준비했다. 어떤 일이 위태로워 보일 때면 나는 그것을 수습하는 데 집중했다. 시작된 일을 갈무리하지 못하면 호흡을 맞추는데 막힘이 생기리라 생각했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함께 잘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논어』 공부의 부족함은 길드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드러났다. 나는 길드다가 인문학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공동체가 아니라 회사이기 때문에 개인의 역량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논어』를 읽는데 전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던 문장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子曰 :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 “唯.” 子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증자가 “네”하고 대답했다. (4:15)

 

   여러 제자와 있는 자리에서 공자가 증자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말했다. “얘 (증)삼아, 세상은 만물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꿰어서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단다.” 증자는 별다른 질문 없이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공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공자가 나간 뒤 고개를 갸웃하며 증자에게 그 뜻을 묻는다.

 

門人問曰 : “何謂也?” 曾子曰 :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이다.”(4:15)

 

 

 

 

   유신체제의 잔재 덕분인지 忠(충)이라 하면 권력자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논어』에서 忠은 권력을 향하는 것도 맹목적인 것도 아니다. 忠을 쪼개보면 中(중)과 心(심)으로 나뉜다. 忠은 자신의 마음(心)에 집중한다(中),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려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한 톨의 자기 합리화도 용인해서는 안 되며, 어디에 비춰보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 즉 忠은 힘에 대한 승복보단 자기 충실성과 가깝다.

 

   恕(서)는 忠과 마찬가지로 心을 부수로 가지고 있다. 자기의 마음(心)을 접어서 다른 사람 위로 포개어 같게 한다(如)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 자신을 타인의 자리에, 즉 관계 위에 위치시킨다는 뜻이다.

 

 

 

 

 

자기 충실성과 상호성은 짝꿍

 

   타인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기는 쉽지만, 내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공자도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 자공이 평생 행할 만한 한마디가 있냐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子曰 :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于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15:23)

 

   얼핏 보기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내 멋대로 해도 좋다는 오늘날 풍조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恕는 나의 입장을 고수하며 관계를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恕는 이로운 상황이든 불리한 상황이든, 나의 마음을 상대의 입장에 위치시키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忠이 자기 충실성을 의미했다면 恕는 다른 존재와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忠, 恕 각각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점이다. 자기 충실성은 상호성을 동반한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계발하는 사람과 忠을 지키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恕에 있다. 아무리 하루 24시간을 부족하게 살아도 자신을 관계 위에 위치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존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자의 忠은 경쟁을 위한 자기계발과 달랐다. 공자의 공부는 출세하기 위한 것도, 명예나 재산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중국 곡부에는 공자의 직계 후손들이 공자사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기 위한 저택이 있다.

그중 충서당(忠恕堂)은 공자 가문의 종손이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이었다.

 

   공자는 공부에 뜻을 두고, 15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30살에 자립했다고 한다. 10대와 20대 시절 공부에 매진한 공자는 그 뒤로 자신이 공부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잠재된 성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존재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충실했던 공자의 공부야말로 진짜 자기계발(自己啓發)*, 즉 스스로의 능력을 열어 발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공자식 자기계발에 恕가 필요충분조건이라면,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일에는 공자식 자기계발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자신에게 중심을 두지 못한 채 타인을 살피려 한다면 포커스를 타인에게 맞추게 되고, 타인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설령 남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불통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가진 바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해서 그것을 곧장 恕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자기계발’의 어원을 『논어』에서 찾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헤아리지 않으면 다시 일러주지 않는다.’”(子曰 :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7:8)

 

 

 

 

 

공자는 자기계발광

 

   길드다에서 역량이 문제가 되었을 때 나는 혼란에 빠졌다. 길드다 일과 나의 공부가 분리되어 보였다. ‘길드다 일을 덜 살피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동양고전 공부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건가…?’ 길드다 일에 집중하면 나의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나의 공부에 힘을 쓰면 길드다 일을 할 여력이 남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자에 따르면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된 자원이 되고 내 고민이 분배의 문제가 되었던 건 공자식 자기계발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나는 『논어』를 읽으며 가끔이나마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동양의 고전 사유에 감명을 받으며 감탄할 뿐이었다. 동양고전 공부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공부가 부족하니 길드다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 나누거나 함께 동양고전을 읽어볼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 길드다를 함께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의 역량이 중요한 회사로 만든 건 나였다.

 

   공자의 공부가 그러했듯 내 공부 역시 나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내 공부를 충실히 한다는 것은 나의 고민과 질문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전공인 동양고전을 공부하며 생긴 질문이든, 낯선 존재들과 잘사는 일에 대한 나의 오래된 질문이든 함께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뜻을 함께 하는 친구(友)가 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년에는 친구들을 감화시킬 수 있도록 동양고전 공부에 더욱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뜻을 함께 한다면 마음은 기쁘게 움직이고 배치는 자연히 변할 것이므로 나는 양자택일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이다.

 

   어쩌면 공자를 자기계발 광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존재를 자신의 맥락 위에 적극적으로 위치시킬 때야 자기계발이 가능하고, 자기계발을 할 때야 비로소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공자식 자기계발 광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댓글 2
  • 2020-12-26 15:08

    충을 구시대적 억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한 것이었군요.
    새롭습니다.

  • 2020-12-27 14:35

    맞아요. 좋아요...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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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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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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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조회 11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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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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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63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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