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완이의 쿠바통신 4] 주변에서 중심으로 - 교회 청년 C의 이야기

관리자
2020-12-2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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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파스텔색의 청년

 

P-14. C가 새벽마다 타는 마을버스다. 이제 막 기점에서 출발한 버스는 텅 비어있다. 대학교에 가려면 그가 사는 아바나 끝자락에서 버스로 두 시간은 달려야 한다. 왕복 네 시간 거리를 사 년째 통학하고 있다. 그간 C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는 법을 익혔다.

 

곧 버스는 형형색색의 사람들로 가득 찬다.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한 버스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카리브해 쿠바는 원색의 땅이다. 물, 자동차,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색도 번쩍번쩍하다. 호피무늬 레깅스를 입은 할머니, 머리띠부터 드레스까지 핑크색으로 통일하고 아침 강의를 나가는 교수, 금빛 목걸이와 귀걸이를 뽐내며 일터로 가는 청년. 맨살을 훤히 드러내는 것은 이 뜨거운 나라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 속에서 C는 홀로 파스텔색인 것처럼 옅게 존재한다. 청바지, 단정한 티셔츠, 검은 운동화에 검은 책가방이 그의 복장이다. 한여름 더위에 나시를 꺼내 입어도 가슴이 패이지 않는다.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다. 조용한 존재감이 도리어 이목을 끈다.

 

버스가 학교에 도착했다. 먼저 와 있는 친구들이 C를 반긴다.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C도 발랄한 청춘의 얼굴을 한다. 말이 많아지고 쉼 없이 웃는다. 그래도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는 용해되지 않는다. 작년 여름 화학과 동기들끼리 바닷가에 갔을 때, 비키니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친구들 사이에서 C만 혼자 반팔 반바지를 입었다. 술과 담배라면 정색하고 클럽에는 발도 안 붙인다. 휩쓸리는 청춘의 열기에서 스스로 한 발 물러선 느낌이다.

 

굳이 또래들의 표준 취향에 자신을 맞추지 않아도 C는 명실상부한 ‘인싸’로 산다. 자취하는 친구의 집에 먹을 게 떨어지면 달걀 열 알과 망고 몇 개를 들고 찾아온다. 도서관에서 스무 권의 교과서를 빌려야 하는 친구가 있으면 알아서 여분의 가방을 챙겨온다. P-14를 타고 청년은 어디든 간다.

 

 

 

반빛 - <무챠챠> (2020)

 

 

 

주변과 중심

 

외유내강 청년 C가 살면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성숙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 없이 조부모와 살면서 한 번도 탈선하지 않았고, 철없는 남동생을 단도리 해왔고, 시키지 않아도 척척 집안일을 해낸다. 게다가 학생의 의무를 한 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들 입을 모아 말한다. 또래에 비해 월등히 성숙한 청년이라고.

 

C는 이 말이 좋으면서도 버겁다. 어쩔 때는 자기보고 더 많은 일을 해내라는 명령처럼 들린다. 가난한 살림과 두 노인의 병세가 요즘 들어 C의 어깨를 짓누른다. 학생으로서 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집안일과 장보기를 미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화장지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한다면, 또 매일 쌀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언제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을까? 무상교육의 혜택을 받고는 있지만 결국 공부를 하려면 웬만큼 사는 집에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C는 고개를 흔든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 있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없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므로.

 

가난은 죄가 아니다. 불편할지언정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모두가 오십보백보의 처지로 가난하게 사는 곳에서는 이런 생각이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질량의 차이가 중력의 차이를 낳듯, 중심과 주변은 어디서든 미세하게 나뉜다. 쿠바도 예외는 아니다. C가 어렸을 때 오십보백보에 불과했던 이 사이의 거리는 그가 성인이 된 현재 몇 십 배, 몇 백 배까지 벌어졌다. 저 멀리 중심부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다. 그들이 머무는 호텔, 올드카, 살사바, 가게들이 있다. 굶주린 특별시기에 종지부를 찍은 효자산업이라며 모두들 관광업을 치켜세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더 허기진 시절이다. 들어갈 수 없는 호텔, 탈 수 없는 택시, 살 수 없는 물건이 늘어날수록 성숙한 마음으로 살기는 더 어려워진다.

 

C의 일상은 의심할 것 없는 ‘주변부’다. 아바나의 최외각에 거주하고, 외국에서 돈을 보내줄 친척이 없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돈을 벌 수단도 없다. 가족의 수입은 쥐꼬리보다 작다. 치즈 한 덩이를 사려면 조부모의 한 달 연금의 삼분의 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C와 가족들이 동네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쿠바인들에게 가장 흔한 삶의 조건이다. 가장 평범한 우리들은 어쩌다가 주변부가 되고만 것일까?

특별시기 후에 태어나 관광업과 함께 나이를 먹은 동네 친구들은 늘 질문했고, 어느 순간 질문을 멈추더니 동네를 떠나갔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최단 경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앞으로 거리가 벌어지면 더 벌어졌지, 봉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C는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다. 그렇지만 그들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등을 돌려 반대로 향했다. 주변에서 중심이 아닌 한 발짝 더 주변부로. 또래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각지대로. 그곳에는 교회가 있었다.

 

 

 

낭만 소녀는 할 말이 많다

 

사회 주변부 약자를 품는 것이 원래 종교의 역할이라지만, 쿠바 교회는 반강제로 그렇게 된 면이 없지 않다. 혁명 이후 종교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구시대적 가치의 온상지라는 비판과 감시가 종교계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많은 이들에게 신앙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었고, 신앙을 간직한 자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했다.

 

C가 동네 교회를 찾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였다. 사람들은 꼬마가 홀로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족과 함께 왔느냐고 물었으나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C의 가족은 아프리카계 쿠바인이다. 그들은 같은 피부색의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산테리아를 믿었다. 먼 옛날에 노예 신분으로 끌려온 조상들은 채찍을 들고 개종을 말하는 스페인인 노예주를 속이기 위해서 자신들의 신과 가톨릭 성인의 정체성을 섞었다. 살기 위해 탈바꿈한 새 종교는 혁명 후에도 살아남았다. 종교가 아닌 토속문화 ‘룸바’의 이름을 내세운 덕분에 탄압이 덜했다. 지금도 성인의 날마다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은 마을 한군데에 모인다.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언어로 노래를 하고, 더 이상 입지 않는 복장으로 춤을 춘다.

 

그러나 룸바의 북소리는 C의 내면을 울리지 못했다. 살면서 외가와는 접점조차 없었으니, 중국인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C의 믿음은 스스로 싹을 틔웠다. 씨앗이 적당한 습도와 온도 속에서 저절로 발아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아이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신이 곁에 있음을 알았다. 이 절대적인 존재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 힘이 아이를 동네 어귀의 낡은 교회로 인도했다.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C는 그때의 선택을 조금 더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신이 필요한 까닭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물이 새는 지붕, 병색이 짙은 조부모, 빈 쌀독을 걱정해야 하는 일상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은 모두를 위해 빛난다. 그렇지만 이 빛을 만끽하는 영성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북을 치고 노래 부르며 무아지경의 상태를 잠시 경험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성은 쉼 없이 구해야 한다. 흠 없는 모범에 기대야 한다.

 

그렇게 C는 교회에서 인생을 사는 법을 배웠다. 단정한 복장, 신중한 언행, 금주와 금연, 혼전순결, 낙태금지, 기도하는 마음. 특히 성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C는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성경 속 인물들을 떠올리며 길을 물었다. 설령 답을 찾을 수 없어도 사유의 재료를 가진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이런 마음의 훈련은 타고난 낙천성을 강하게 담금질했고, 그를 벽 앞에 좌절하지 않는 낭만 소녀로 키워냈다.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밝고 반듯하게 자라는 손녀딸을 보면서 조부모 역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낭만 소녀는 할 말이 많다. 언젠가 글도 쓸 계획이다. 비록 경험은 일천하지만 자신에게도 인생을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신이 버린 자라며 경멸했던 중년 남성을 끝까지 돌보고, 또 함께 신의 마음을 헤아려준 젊은이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가? 성숙한 청년은 단순히 어른의 시기를 앞당긴 자가 아니다. 보통의 어른이 굳어진 가슴 때문에 지나쳐버리는 진실을 곱씹는 자다. 신의 지혜는 나이와 상관없이 만인에게 열려있다.

 

 

 

 

불 같은 마음과 물 같은 평화

 

청년의 말은 쿠바 땅, 쿠바 사람들을 향한다. 열대의 열기는 생명력을 낭비한다. 모든 게 빨리 자라고 또 빨리 썩는다. 한순간에 나무마다 우수수 열렸다가 길바닥에 떨어져 으깨지는 망고들, 하루만 방심해도 음식물에서 피어오르는 벌레들, 폭우가 내린 후 거침없는 기세로 일어나는 들풀들. 인간도 자연과 닮은 모습으로 산다. 이곳에서 육체의 욕망은 타부 없이 맨살을 드러내고, 걸러지지 않은 감정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대로 분출된다. 따라서 절제와 복종을 설파하는 교회 공동체는 오늘날 쿠바에서 완벽하게 비주류에 속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혼전순결이라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쿠바 꼬맹이도 웃고 지나가겠다.

 

친구들은 종교에 매인 삶이 지나치게 심심하다고 말한다. 모르는 소리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겁게 달궈지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이 열기가 사랑이나 자비처럼 신을 닮은 마음이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늘 그렇지는 못하다. 깊숙한 곳에는 분노도 묻혀있다.

 

분노는 의외의 순간에 고개를 쳐든다. 가령 화학 공부에 매진하다가 잠시 기지개를 펴는 그런 순간이다. C는 원래 예술이 하고 싶었다. 예술학교의 입시과정이 뒷돈의 잔치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대를 접었지만, 정작 화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딸이 화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딸은 방황을 끝내고 가족 속에 다시 안착한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 이혼의 폭풍을 겪은 아버지는 삼남매를 부모님에게 맡긴 채 오랫동안 집 밖을 배회했었다.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때는 다른 여자가 옆에 있었다. 그들은 집 옆에 새 집을 지었고, 아이를 낳았다. 끊어졌던 가족의 테두리가 어색하게나마 다시 이어졌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첫째 언니를 낳을 때 어머니는 고작 열네 살이었다. 이십대 후반에야 진정한 사랑을 찾은 모양인지, 어머니가 새 가정을 꾸린 후로는 연락이 끊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삼남매를 걱정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계의 무게가 노인과 아이들을 짓눌렀다. 아직 어렸던 C는 왜 늙은 조부모가 그들을 대신해서 괴로워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을 돌볼 수 없는 미성숙한 사람이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숙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고통의 연장선이 아닌가?

 

그러나 C는 내면의 분노를 외부로 돌리지 않는다. 이 분노의 본질은 조부모의 가난도, 부모의 무책임도, 쿠바의 무절제도 아니다. 부당함을 향한 분노보다 더 속을 태우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무지다. 조부모를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착한 손녀가 되었고, 그 탓에 성인이 된 지금도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화학은 공부할수록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강해진다. 만약 끝까지 예술을 고집했더라면 어땠을까? 적절한 때 가족의 지원을 받았더라면? 이런 가정들은 C의 정체성에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남긴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기, 이것이 C가 교회에 가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물론 교회도 답을 주지는 않는다. 대신 답을 찾는 여정에 동행한다. 교회 사람들과 함께 기타를 치고, 글을 쓰고, 성경을 낭독하다 보면 자기도 몰랐던 내면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다가 삶에서 품었던 의문이 명징하게 풀릴 때도 있다. 이것은 물과 같은 평화다. 고된 일상에 닳은 마음을 식혀주고 지혜를 향한 갈증을 덜어준다. 불과 물이 만날 때 일어나는 수증기처럼, 청년은 운무처럼 낮고 넓게 퍼진 삶의 질문들 사이를 걸어간다.

 

이 균형감각은 교회 바깥 커뮤니티에도 널리 존재한다. C가 쿠바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영적이라고 믿는 이유다. 몇 세기 동안 학살과 착취와 혁명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이 섬에서, 사람들은 물처럼 유연한 유머감각과 마르지 않는 생활력으로 삶을 지속시켜왔다. 재난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러므로 버티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저항이다. 고난은 강철 같은 내면을 만들고, 풍랑 속에서도 중심 잡는 법을 가르친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중심을 찾아 떠난 동네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C는 그들의 뒷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세상의 중심인 줄 알고 도달한 장소가 정작 인생의 중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내 중심에 집을 산다고 해서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심을 잃은 삶은 쉽게 무너진다.

 

버스 창밖으로 체 게바라와 호세 마르티의 벽화가 스쳐지나간다. 학교는 이들이 쿠바 정신의 중심이라고 가르친다. 정말일까? 백 년 전 사람이었다면 C 역시 쿠바의 독립과 인간의 영성을 깊이 엮어낸 마르티의 시에 가슴이 에였을지도 모른다. 오십 년 전에 태어났다면 인간성을 한없이 드높였던 체의 연설에 심장이 뛰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청년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속해 있다. 마르티와 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은 복잡해졌다. 변화 위에 표류하는 쿠바는 살아남기 위해 경제 정책을 손바닥처럼 이리저리 뒤집고, 언론은 고통스러운 오늘은 진정한 혁명의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과도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청년은 역사의 과도기가 아닌 자신의 시간을 살고 싶다.

 

중심이 사라져버린 혼돈의 시기, C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을 찾는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뿐이다. 주변을 곧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있는 자리를 신을 만나는 자리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필요한 것은 대체로 여기에 다 있음을 알게 된다. 학교는 지식을 주었고, 교회는 신앙을 심었고, 가족과 이웃은 힘든 생계를 함께 꾸린다. 집 밖의 종려나무, 비 냄새, 파도소리, 끈적이는 공기는 광대한 평화를 선사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맨손으로 일궈낸 일상에 자부심이 넘치면서 그게 자부심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 노동과 고통이 만들어주는 자존감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들. 세상의 모든 물건을 고치는 귀한 손을 가졌으면서 정작 자신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우리들. C는 어리석고 아름다운 인간에 대해 사유한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아름다움이 신의 품에서 지혜로 바뀌기를 기도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결국 어디 사느냐는 중요치 않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창밖의 석양을 보며 청년은 오늘도 기도를 드린다.

댓글 3
  • 2020-12-26 06:59

    쿠바의 현재이야기네요. 쿠바에 관광 가서는 보지 못할 것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연재도 감사합니다.

  • 2020-12-27 12:12

    C 를 알아보고, 이렇게 담담히 써내려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

  • 2021-01-05 10:26

    노동과 고통이 주는 자존감은 너무도 당연하죠.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여라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