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블루스> (7회) - 섬망, 간병지옥을 통과 중

문탁
2020-12-1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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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침에 눈을 떴는데 집안이 고요했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커피를 내렸고 사과를 깎았다.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으니 조용하다. 엄마가 없어서 평화가 왔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훌쩍거렸고 사과를 우물거리면서 울었다. 결국 그렇게 병원으로 쫓겨 간 엄마가 불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집에서 평화를 느끼는 내 맘이 너무 징그러워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삼십 분간 대성통곡을 했다.

 

그랬다. 엄마의 션트 수술 후 지금까지 약 3개월간은 내가 엄마랑 같이 산 지난 6년 중 특히 힘든 시간이었고, 최근 몇 주는 그 3개월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수술 이후 생긴 섬망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기는커녕 빈도나 정도 면에서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들에게 계속 SOS를 쳤고, 급기야 얼마 전 이러다가 내가 죽을 것 같으니 누구든 엄마를 모셔 가라고 카톡을 날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동생들은 긴급회동을 했고 각자 일주일에 두 번씩, 엄마가 혼미해지는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에 4시간 정도 엄마를 돌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최근 한 달 가량 우리 사남매는 간병 총동원 체제를 구축해서 엄마를 함께 돌봤다. 그런데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욕을 해대고, 차려놓은 밥상을 바닥에 패대기를 치는 엄마를 도저히 어찌 달랠 도리가 없게 되자 난 오후 2시쯤 119 구급차를 불렀다.

 

 

 

 

엄마는 구급차 안에서도 안전벨트를 풀라고, 내가 자신의 사지를 (일부러) 꽉 묶어 놓았다며 몸부림을 쳤고, 나에게 고래고래 욕을 해댔고, 병원에 도착한 이후에도 의사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그걸 알아서 뭐하게요?”라고 화를 내고, 응급실 안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나, 미친년이에요, 미친 년! 나 미친년이라고 딸이 데려 왔어요”라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런 엄마를 데리고 나는 문진, 문진, 문진, 대기, 대기, 대기, 검사, 검사, 검사의 지루하고 괴롭고 비효율적이고 관료적인 긴 절차를 치렀다. 결국 밤 8시가 넘어서 입원승인이 났고 나는 밤 9시가 넘어 엄마를 간병인에게 떠넘기고 병원을 떠났다. 등짝은 쪼개지는 것 같았고 입에선 단 내가 났고 목은 계속 쿡쿡 쑤셨다. 나는 충동적으로 동생들에게 “나, 당분간 병원에 안 올 거야” 라는 카톡을 보냈다. 이 모든 게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데 전철 안에서 자꾸 목구멍으로 뭔가, 울음 비슷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동천역이 아니라 그 전 정거장인 미금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밤길을 걸어서, 아릿한 다리의 통증을 느끼며, 그 덕분에 목구멍의 울음을 삼켜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울음이 다음 날 아침에 터져버린 것이다.

 

 

섬망, 헛소리할 섬(譫) 망령될 망(妄)

 

섬망. 한자로 譫妄이라고 쓴다. 헛소리할 섬(譫)에 망령될 망(妄).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면서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나는 이걸 7,8년 전쯤, 지금은 돌아가신 시아버지 때문에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님이 119에 실려 가는 일이 발생했는데 시어머니의 전언에 따르면 아버님이 한밤중에 일어나 장롱 문을 열고 소변을 보시고 나가시겠다면서 바지통에 양팔을 넣고 낑낑대면서 계속 횡설수설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치매를 의심했다. 그런데 병원의 검사결과는 저혈당성 섬망이었다. 아니, 세상에 아버님이 당뇨셨어? 그런데 그렇게 매일 술을 드셨어? 왜 그동안 우리는 그걸 몰랐었지? 어쨌든 아버님은 포도당 수액을 맞고 바로 좋아지셨고 난 그 때 치매와 비슷하지만 치매는 아닌, ‘섬망’이라는 게 있다는 걸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 어머니가 척추 골절로 장기 입원해계실 때도 나중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골절이 아니라 섬망이었다. 섬망의 대표적 증세인 ‘지남력 장애(指南力 障礙, disorientation of time)’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다. 아, ‘지남력 장애’란, 말 그대로 남쪽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한마디로 ‘여기가 어디?’, ‘오늘은 뭔 요일?’ 이라며 시공간을 헷갈리는 인지장애를 가리킨다. 어머니는 당시 병원 원장이 자기 병실 위의 2층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가 입원해있는 곳이 분당이 아니라 어느 날은 을지로(이건 우리가 어릴 때 살던 곳이다)라고, 또 어느 날은 마장동(이건 막내딸이 다니던 입시준비학원이 있던 곳이다)이라고 착각하고 계셨다. 거기에 덧붙여 한편으로는 우울증이 더 깊어져 계속 죽고 싶다고 했고, 다른 한편은 사소한 일로도 간병인들을 잡도리했다.

 

당시 엄마 섬망의 첫 번째 원인은 마약성 진통제였다. 허리가 심하게 부러졌지만 수술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강력한 진통제를 썼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섬망과 관련하여 우리가 한 첫 번째 조치는 마약성 진통제를 끊는 것이었다. 하지만 약물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 섬망의 두 번째 원인은 장기 입원이었다. 사실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만 지내면 젊고 멀쩡한 사람들이라도 시간이 가는지, 계절이 가는지 알 수가 없지 않는가? 그러니 노인들한테 장기 입원은 인지와 관련해서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의사들은 입을 모아 섬망은 퇴원만 하면 무조건 사라진다고 장담했다. 물론 엄마가 퇴원 이후 즉각 좋아진 것은 아니다. 퇴원 후에도 한동안 “집으로 가자”를 외쳤지만 의사들의 말대로 서서히 지남력장애가 사라졌다. 그래, 맞았다. 섬망은 ‘일시적’ 증후군이다.

 

 

 

 

 

 

이거 윗집 은자네 가져다 줘라 , 갖다 줄게요

 

3개월 전 션트 수술을 할 때 우리가 가장 걱정한 것은 션트관이 감염이 되거나 막히는 사태였다. 섬망은? 한 번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걱정되진 않았다. 예상대로 수술 직후 엄마는 섬망 증세를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특이한 점은 우리가 ‘은자 아줌마’라고 부르는 엄마의 오랜 친구, 하지만 최근 1,2년간은 거의 왕래가 없었던 그 ‘은자 아줌마’가 갑자기 엄마의 뇌 속에 소환된 사실이었다.

 

어쨌든 엄마는 처음엔 친구의 소식을 궁금해 했고, 전화를 해보라고 했고, 우리가 연결을 시켜드리자 전화통을 붙들고 약간씩 핀트가 나간 소리를 내둥 했고, 다음날엔 통화했다는 사실조차 까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는 션트수술로 인지능력이 회복되면서 옛 친구가 그리워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현실은 좀 다르게 흘러갔다. 퇴원 후 집에 돌아왔는데도 엄마는 우리 집을 ‘은자네’라고 착각하셨고 왜 자기를 ‘은자네’로 데려왔냐며 계속 집에 가겠다고 난리부르스를 치셨다. 손주 방 앞에서는 여기가 누구 방이냐고 묻고 방문을 열라고 화를 내고 빈방을 보면서 그것보라고, 여기에 ‘은자 딸년’이 숨어 있다가 자기 엄마 몰래 짐을 다 빼내서 도망가지 않았냐고 흥분을 했다.

 

 

2015년 1월, 아직 엄마랑 합치기 전에 엄마와 은자아줌마를 모시고 일본 온천여행을 다녀왔다. 그 때 나는 친구들에게 "꽃보다 할매"를 찍고 왔다고 말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나자 더 이상 우리 집을 ‘은자네’라고 생각하진 않으셨다. 대신 이번에 ‘은자네’는 우리 위층에 살고 있다. 엄마는 식사를 할 때마다 윗집, ‘은자네’에 빈대떡을 가져다주라고, 갈치조림을 가져다주라고 했고, 나나 간병인은 깍듯이 엄마 말을 받들어 접시를 들고 문을 열고 나갔다 조금 지체한 후 다시 들어왔다. 엄마가 여기는 집이 아니라고 하면서 “집으로!!”를 목 놓아 부르면 나는 엄마를 휠체어에 싣고 1층 로비로 나가서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고 지하 1층 주차장을 통해 다시 들어왔다. 엄마는 섬망(이것을 치매라고 바꿔 읽어도 상관없다) 중에 있었지만 이 단계까지만 해도 나는 적절한 ‘롤 플레이’를 하면서 대응할 수 있었다. 나는 섬망 중인 사람에게 사실관계에 입각해 그들의 말을 교정시키는 것은 최악이라는 것을, 언어란 진짜 정보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인 것이라는 것을 점점 더 잘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팩트가 아니라 감응이다.

 

대신 나는 인간의 ‘뇌’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 엄마는 갑자기 ‘은자 아줌마’한테 꽂힌 것일까? 잃어버렸던 기억이 외과적 수술로 인해 되살아났을 때 잃었던 기억 중에서 왜 특정 기억에 꽂히는 것일까? 이건 정신분석학의 문제일까? 뇌과학의 문제일까? 나는 친구가 보내준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우리의 삶은 뇌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에 격하게 공감했다. 내년쯤 문탁에서 <뇌과학 세미나>를 열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급기야 뇌신경학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섬망은 한편으로는 돌봄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상이었던 셈이다. 

 

 

 

 

 

 

뭐지? 혹시 성인 ADHD? 아님 치매? - 아니, 전두엽 진행성 장애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남력 장애’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것도 처음에는 션트 수술의 효과로 운동신경이 좋아진 것이라고만 단순하게 생각했다. 거의 누워만 있던 엄마가 앉아 있기도 하고 워커를 잡고 걷기도 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보니 엄마는 누웠다가 10초도 안 돼서 다시 일어나고 곧 다시 눕고 금방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으셨다. 게다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떠드셨다. 마치 성인 ADHD 같았다. 저녁이 되면 증세는 더 심해졌고, 그러다가 갑자기 집에 가자고 떼를 부리셨고, 우리를 대하는 게 조금씩 난폭해지셨다. 동생들 사이에서도 점점 더 불안한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섬망 맞아? 왜 좋아지지 않지? 혹시 치매오는 게 아냐?

 

나는 혹시 놓친 게 있나 싶어서 미친 듯이 섬망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섬망에 관한 논문을 찾아 읽어나갔다. 어느 날 나는 간병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9월 30일 (수) – 섬망의 원인이 무엇일까?

①일상이 거의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엄마는 션트 수술을 해서 운동기능이나 인지능력이 놀랍도록 개선이 되었는데도 아직 티비를 본다거나 지인과 통화를 한다거나 하는 일상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다. 섬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익숙한 공간에서 일상적 활동을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는데 엄마는 아직 일상을 회복하고 있지 못하다.

→ 그런데 이건 섬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 아닐까? 일상이 회복이 안 되어서 섬망이 개선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섬망 때문에 일상의 회복이 안 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더 합당한 게 아닐까?

 

②혹시 ‘전해질 불균형’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현재 엄마는 열흘 이상 변비가 지속되고 변비약을 쓰면 계속 설사를 하는 변비-설사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설사를 하면 탈수와 함께 전해질 부족이 생긴다. 섬망의 원인 중 하나가 전해질 부족 때문이라고 하니 혹시 엄마의 섬망이 개선되지 않는 것도 그것 때문일 수 있다.

→ 그런데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피검사를 해야 하는데 이게 로컬 내과에서 가능할까? ...음....

 

 

 

 

며칠 후 분당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 외래. 의사는 엄마 상태는 치매가 아니라 섬망이지만 전해질 부족이 그 원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기에는 엄마의 목소리나 걷는 상태가 너무 양호하다는 것이다. 의사의 진단은 ‘전두엽 진행성 장애’였다. 물이 차서 뇌를 누르고 있을 때 만이 아니라 물이 빠지면서 뇌가 펴질 때에도 뇌에 일정한 스트레스가 가해지는데 지금은 특히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두엽이 모종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는 뇌가 지금 상태에 적응할 것으로 보이지만 일단은 공격성과 흥분상태가 문제가 되니 약의 도움을 좀 받자고 하면서 데파코트(Depakote)를 처방했다. 데파코트 125밀리그램을 아침, 저녁으로 드릴 것. 집에 와서 찾아보니 그 약은 발작 같은 흥분성 장애를 조절해주는 약이었다. 치매가 아니라니 일단 안심했고 데파코트가 엄마를 구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간병 스릴러도 간병 느와르도 아니다. 이건 간병 지옥!

 

데파코트는 엄마를 구해주지 않았다. 데파코트를 복용했는데도 엄마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엄마는 나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원인이 될 만한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나쁜 년”이라고 불렀고 점차  “×년”,  “×같은 년”,  “×××년”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퍼부어댔다.

 

동시에 망상이 시작되었다. 방에서 거실로 나와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는 내가 “엄마, 거실이잖아” 라고 대답하면 처음에는 “니가 하도 이 방, 저 방, 물건을 바꿔놓고 방을 바꿔놓아서 헷갈린다” 고 짜증을 부렸고, 나중에는 내가 혼자 ‘아방궁’을 짓고 자기를 구석으로 처박아 놓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심지어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의 어릴 때 동네 친구인 ‘잣집 여자’와 짜고(나중에 외삼촌한테 물으니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학교’를 꿀꺽 먹으려고 (이건 이미 수십 년 전에 처분된 것이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내가 밥에 독을 탔다고도 했다. 집에 있는 수석을 보면 그 돌로 내 ×××를 쳐서 죽여버려야 할 년이라고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당신이 죽어야 한다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겠다며 휠체어에서 벌떡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워커를 잡고 홱~ 창문으로 달려가서 유리창을 두드리기도 했다. 때론 약을 먹고 죽겠다며 밤새 잠을 안자고 방안의 모든 서랍을 뒤졌다.

 

 

 

 

 

나는 점점 더 속수무책이 되어 갔다. 내가 안 보이면 “나쁜 년이 자빠져 자느라 엄마가 이러고 있는데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화를 내고, 간병인이 “이 선생님 강의 가셨어요”라고 하면  “돈독이 오를 대로 올라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개×년!”이라며 욕을 하고, 나중에는 내가 집에 없다고 해도 믿질 않고 기어코 방에 들어와 손에 잡히는 대로 내 책을 책꽂이에서 빼서 집어 던지며 흥분했다. 난 세미나를 빵꾸내기 시작했고 동생들이 와 있어도 늘 방에서 초조하게 스탠바이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 눈치를 봐서 엄마 곁에 가서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면 이번에는 닥치라고, “×××를 찢어 놓겠다”고 하고, 그래서 조용히 옆에 있으면 내가 당신을 미친년 취급하는 거라고 하면서 악다구니를 쓰셨다. 42킬로 밖에 안 되는데 뼈와 가죽밖에 안 남았는데 게다가 거의 밥도 드시지 않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나의 팔을 비틀고 간병인의 멱살을 잡았다.

 

어떤 식으로든 이 상태가 진정되어야 했다. 돌보는 사람도 지쳤지만 무엇보다 엄마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정답은 없는지라 각자는 모두 자기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막내동생은 엄마가 내 욕을 하면 한술 더 떠서 자기가 더 심하게 내 욕을 하는 전략을 취했고, 간병인은 그런 막내동생을 영 마뜩치 않게 여겼다. 엄마를 달래지 않고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간병인은 차라리 나보고 한동안 엄마 눈에 띄지 않게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어떠냐고 했다. 그러면 이번엔 다른 동생이 펄펄 뛰었다. 언니가 안 보이면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겁을 냈다. 남동생은 흥분한 엄마를 제압하려다가 결국 아픈 엄마와 물건을 던지면서 싸움박질을 했다.

 

나는 이제 엄마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엄마와 나 사이에 기어코 만들어내는 어떤 인과적 해석 (엄마는 언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 옛날 언니가 운동권이었을 때 엄마가 배신감을 느꼈었나봐, 그게 이제 터져 나오는 것 아닐까?)이 거슬렸고, 자기 나름의 해석 속에서 계속 나의 행동과 언어를 규율하려는 어떤 태도(언니, 가능한 집에 있어, 언니 엄마 말에 대꾸하지 말고 무조건 들어. 언니,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망상에 인과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동생들과 입씨름 할 기운도 나는, 없었다. 그렇게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다 같이 추락하는 것 같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급기야 동생들 입에서 이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상태를 벗어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동생들에게 엄마를 병원에 보내면 엄마는 돌아가실 거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쳤고 피곤했고 억울했고 화났고 슬펐다. 마음은 늘 불안하고 심장은 시도 때도 없이 쪼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이런 게 공황장애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서 실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나는 겨우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그리고 맘 속에선 이미 수도 없이 엄마를 어딘가로 보내버렸다. 매일 매일 엄마를 버리는 꿈을 꾸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션트수술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정신과로 보내죠

 

병원에 입원을 한 후 거짓말처럼 나에 대한 엄마의 분노와 공격이 멈췄다. 시작이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중단도 이유가 없었다. 엄마는 자기는 진짜 미친 게 아니고 미친 ‘척’ 한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왜 미친 척을 했냐고 물으면 웃으면서 큰 딸이 하도 거짓말을 해서 그랬다고 답을 하셨다. 다시 의사들이 큰 딸이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했냐고 물으면 이번에는 좀 우물쭈물하다가 수줍게 웃으면서 “모두 다요”라고 모기 소리만 하게 답을 한다. 물론 간호사한테 갑자기 외등을 끄라는 둥, 잔디를 깎았냐는 둥 헛소리를 계속 하시긴 했지만 우리는 이 정도만 되어도 좀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신경외과로 입원시킨 것은 엄마의 공격성과 조증(躁症) 등이 모두 뇌 션트 수술 이후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술과 지금의 증세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다. 지금 엄마의 상태는 섬망인가? 그렇다면 왜 점점 심해지는가? 섬망이 아니라면 치매인가? 그런데 치매도 이렇게 급성으로 오는 법이 있는가? 섬망도 치매도 아니라면 새로운 정신병(엄마의 증세는 거의 ‘조현병’의 증세였다)이 생긴 것인가? 그런데 그건 내가 생각해도 가능성이 낮다. 섬망도 치매도 스키조도 아니라면 신경외과 의사가 우리한테 이야기 하지 않은, 혹은 그들도 사실 잘 알지 못했던 션트 수술의 부작용 중의 하나가 아닐까?  솔직히 나는 맨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엄마한테 맞는 적절한 뇌압을 찾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수술한 의사가 엄마를 가장 먼저 진단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경외과에서는 뇌CT 결과 신경외과적으로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냈다. 입원한 다음날 뇌압을 더 낮추는 시술을 했고 다시 CT를 찍었지만 역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정신과에 컨설트를 넣었다. 정신과에서는 내가 작성한 엄마의 경과 보고서를 읽고 또 엄마를 직접 보고 나서 엄마가 드시던 우울증 약, 페로스핀(Perospin)을 중단시키고 아침저녁, 두 번에 나누어 드시던 데파코트 125밀리그램을 하나로 합쳐서 데파코트 250밀리그램을 저녁에 한번만 드리라고 오더를 냈다. 여기에 분열증과 양극성 장애를 치료할 때 쓰는 자이프렉사(Zyprexa) 1.25밀리그램도 함께 처방했다. 하지만 낮에는 비교적 양호하다가 저녁부터 시작되는 불안과 흥분증세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엄마는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간병인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의사는 잠을 안 주무실 때 더 드리라고 조증 및 분열증에 쓰이는 리스페리돈(risperidone)을 추가 처방했다. 어느날 밤 엄마는 데파코트와 자이프렉사와 리스페리돈까지 드셨고 그 결과는 잠을 잘 주무신 게 아니라  말을 버버버~ 어눌하게 하시면서 걸음걸이도 완연히 불안해진 상태가 되어버렸다. 리스페리돈은 다시 중단되었다. 신경외과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정신과로 병동을 옮기라며 재촉을 해댔다.

 

 

 

 

그 즈음 엄마가 다니던 분당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 외래가 잡혀있었다. 나는 정신과에 입원시킬 거라면 분당서울대병원에 입원시키고 싶었다. 나는 혼자라도 의사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산란하여 집에서부터 분당서울대병원까지 걸어갔다. 대리진료를 위해 서류를 냈고 의사를 만나 그동안의 경과를 말했다. 의사는 치매도 아니고 스키조도 아니고 섬망인데, 하여 결국은 좋아지실 건데 다만 지금 너무 고생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을 했다. 그 말이 위로가 된 건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과에 입원할 거면 혜화동서울대병원이 아니라 분당서울대병원에 입원하고 싶다고 했고 의사는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병원을 나왔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걷고 싶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데 비는 점점 거세지고 안경 위로 빗물이 흘러 한 치 앞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혀 엉뚱하고 낯선 곳에 서 있었다. 그날 난 비를 맞으며 구미동에서 죽전으로 죽전에서 미금으로 미금에서 수지로 그렇게 헤매면서 겨우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정신도 지금 그렇게 헤매고 다니는 게 아닐까?

 

이틀 후 난 엄마를 퇴원시켰다. 삼, 사일 후면 엄마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입원시킬 예정이었다. 그런데 집에 오자 또 거짓말처럼 엄마가 한 번 더 좋아졌다. 갑자기 똑똑해지고 한결 수긋해졌다. 물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온 방안을 서성이고 그러다가 때로는 홀딱 밤을 새기도 하지만 이 정도라면 집에서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동생들은 여전히 불안해하는 눈치지만 나는 엄마를 입원시키지 않기로 맘을 먹었다. 괜찮겠냐구? 그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지금 나는 최선을 다해 다시 이런 선택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간병블루스는 계속될 뿐이다.

 

 

에필로그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약 3주 전이다. 그러나 절반 이상을 써 놓은 채 마무리를 못했다. 일주일에 세 개나 되는 강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회의로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바쁜 일정 때문에 그나마 이 간병지옥을 그럭저럭 통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오늘 더 이상 미루면 글을 완전히 새로 써야 할 것 같아 서둘러 마무리를 했다.

 

3주 전에 비해 지금 엄마는 한결 안정되었다. 공격성도 줄어들고 흥분상태도 진정되고 밤을 꼴딱 새는 일도 줄어들었다. 데파코트 250밀리그램과 자이프렉사 1.25밀리그램의 효과를 보는 것일까? 약이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뇌가 참 오묘하다는 생각도 든다. 섬망 지옥, 그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한두 번 겪어 본게 아닌지라 절대! 네버! 낙관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 모두 “전전긍긍 여리박빙(戰戰兢兢 如履薄氷)”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입 밖으로 발설하면 동티날까봐 엄마가 좋아진 것 같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애써 담대한 듯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엄마.........이대로 좋아지자,  제발.....

댓글 6
  • 2020-12-13 22:20

    그간 조각조각 들었던 경과를 알게 되었네요.
    분당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안하게 된 경위도 알겠고요.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하는 약이 무섭긴 하죠.
    그래서 맞는 약 찾는 게 어렵고 중요하기도 하고요.
    고생많으셔요...

  • 2020-12-13 22:55

    샘 어머님께서 이대로... 좋아지셨으면 좋겠습니다.

  • 2020-12-14 14:18

    전전긍긍 여리박빙 ㅠ
    인간의 몸이 정말 오묘한가봐요
    우리가 알수가 없네요
    어머님이 문탁샘을 좀 봐주셔야할텐데요
    나도 눈물이 나네요 ㅠ

  • 2020-12-14 17:27

    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하셨는데 적어도 저는 이 글을 보고 "괜찮겠냐구? 그걸 누가 알겠는가? "하는 용기를 얻습니다,,
    너무 힘드시겠지만, 너무 힘들지 않으셨으면 하고 감히 바래보아요...!!!!!!!!!!!!
    (참 뇌과학 세미나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2020-12-15 09:42

    간병 지옥을 통과하여 다시 간병 블루스~
    이대로만이라도 쭉~~

  • 2020-12-19 17:14

    그걸 다 어떻게 견디셨는지 상상이 안되네요..
    두 분 다 깊은 고통에서 벗어나셨으면 좋겠어요.
    기도할게요.
    문탁샘 건강도 잘 챙기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