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 양생8회> 해독의 기술, 눈물을 흘리는 어른

겸목
2021-09-2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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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내 심정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관심을 끌기 위한 어그로였을까? 한동안 페이스북에 심란한 문장들을 올렸다. “오르막길 내리막길마다 생각이 바뀌고 지금 나는 뭔가를 비우는 중인가 채우는 중인가?”, “눈물이 났다. 이 슬픔은 뭔가? 생각해보니 아쉬움이다. 이제 뭔가 좀 해볼만하다는 감이 왔는데,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게 아쉽다.” 이런 글이 올라간 다음엔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게 불편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다.

 

청계산을 오르내리며 내가 너무 ‘인간적으로’ 자연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을 땐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했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이 미끄러워서 짜증이 났고, 내 인생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라는 자학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수월히 내리막길을 내려올 땐 인생의 내리막길은 참 빠르구나! 하는 허무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울창한 나무와 푸르른 잎사귀,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에서 내 마음은 홀로 재난을 겪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질투와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감정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 마음을 내심 모르는 척하려고도 했다.

 

국사봉에서 이수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었을 때 쏴아악 쏴아악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쏴아악 쏴아악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바람소리가 너무 좋아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기우뚱 휘청이며 내는 바람소리는 죽비소리처럼 시원하게 들려왔다. ‘별거 아냐’, ‘괜찮아’라고 마음을 다독여왔던 방어선이 허물어지면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들이 목청껏 제 목소리를 내질렀다. 이 날은 내가 청계산에서 호흡의 기술에 이어 해독의 기술을 터득한 첫 번째 날이었다. 벌건 대낮에 눈물바람을 하고 나니 머쓱하게도 마음이 개운했다. 눈물과 함께 무거운 감정들도 휘발되어 날아갔다. 그 후로 몇 번 의도적으로 울어보려 했지만, 청계산과 바람과 내 마음의 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지는 날은 자주 없었다.

 

해독의 기술을 훈련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아이템은 돗자리이다. 만성신부전 진단을 받고 불현 듯 청계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처럼, 불현 듯 돗자리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오랜만에 산에 가는 거라 체력이 딸려 많이 못 걸을 수 있으니 앉아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무의식의 심연에서는 울 장소를 찾고 있었나 보다. 널찍한 돌이나 부러진 나무둥치는 앉아서 쉴 수는 있지만, 눈물을 흘리기엔 적당하지 않다. 돗자리를 펴고 누워 몸을 땅과 일직선으로 밀착시켰을 때 느껴지는 안정감이 있다. 돗자리에 눕는 순간 곧추 세웠던 등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이 풀어진다. 이러면 울 배짱이 생긴다.

 

 

 

여기에 단정한 피아노 소리가 얹어지면 퍼펙트하게 해독의 기술을 훈련할 수 있다. 산에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지 몰라 습관적으로 배낭에 책을 한 권 넣어갔지만, 그걸 꺼내 읽지는 않았다. 대신 라디오를 들었다.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음악가의 피아노곡이 들려왔을 때 텅 빈 시간이 무언가로 채워졌다. 나중에 라디오프로그램의 플레이리스트에서 확인한 그 음악은 양방언의 ‘스완 야드(Swan Yard)’였다. 그렇게 유키구라모토, 히사이시조,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을 들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으면 뾰족했던 감정의 독기가 빠지고 순한 맛이 되어가는 화학작용이 일어났다.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이 가져다주는 진정효과였다. 이건 울고 난 다음의 민망함과 무안함을 가려주는 효과도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일본 음악가들의 연주만 듣고 있는 거지? 라는 자의식이 발동해 정재형과 베란다프로젝트의 음악을 찾아듣게 되었고,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따라 김제 시골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놀라웠던 건 시골집에서의 피아노연주가 아니라 이런 이벤트를 기획한 젊은 여자 사람 PD ‘최별’이었다. MBC PD 최별은 자신의 시골살이 브이로그를 ‘오늘을 사는 어른들, 오느른’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올리고 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지하철과 편의점이 있는 도시에서 살았던 최별은 늘 바빴다. 볕이 드는 집에 살기 위해서는 대로변의 소음과 대출이자를 감당해야 했고, 늘 먹을 게 없어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의욕적으로 커리어를 쌓고 있지만, 동시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최별은 4500만원짜리 폐가를 충동구매하고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처음 ‘오느른’의 영상을 봤을 땐,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유튜브 버전이라 생각했다. 김제의 평야와 마을의 풍광과 젊은 PD의 감각적인 연출이 내 눈을 사로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런 보기 좋은 영상들은 많고, 나는 클릭조차 하지 않는다. ‘오느른’을 보며 나를 사로잡은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최별의 모습이었고, 거기에 담긴 ‘진심’이었다.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하기 싫은 일을 해치우는 게 책임감 있는 어른의 모습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나는 ‘오느른’을 보며 어른의 삶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있다. ‘오느른’에서 발견한 어른다운 모습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기도 쉽지 않지만, 그 시간을 지루해하지 않으며 온전히 보내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일단 나는 눈물을 흘리고 감정의 응어리를 해독하는 기술을 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요즘은 돗자리 없이 가볍게 청계산을 오르내린다. 발걸음도 편안해졌다. 눈물 대신 땀을 흘린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그러나 어느 날 또 울지 모른다.

 

 

 

댓글 8
  • 2021-09-28 08:01

    눈물, 땀...역시 해독은 수용성이군요.

    '오느른'은 저도 좋아하는 채널인데, 생각나서 오랜만에 가봤더니... 이게 뭐죠?
    김제 그 시골길에서 유키구라모토가 피아노를 치던데요...와!

    • 2021-09-28 08:41

      유키구라모토의 연주도 멋지지만 최별과 나누는 일상의 모습도 좋더라~

    • 2021-09-28 10:43

      해독은 수용성이란 말 좋네요~

      알콜에서 물로!

      독에서 해독으로!

      독한 술말고 담담한 물에 담궈 봅시다~~~

      <오느른> 몰아 보다 일요일이 훌쩍 가버렸네요. ㅋ

       

  • 2021-09-28 09:28

    이제 골골 백살을 준비하는 것일 뿐. 전처럼 무식하게 살지 못할 뿐, 이렇게 돌아보며 더 오래 살 거임. 천천히, 하지만 꽤오래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니까!!

    앗 그러나 저러나 무릎 혹사하는 거 아님?

  • 2021-09-28 09:51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시골 폐가에서 생활하는 청년들을 봤는데 그게 최별이었군요.

    그런 선택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멋지고 부럽지만 나로 돌아오면 글쎄 ....

    저는 우선 혼자 잘 지내는 훈련부터 해야할듯요~

  • 2021-09-28 10:49

    샘의 글을 읽고 깊은 위로가 느껴져요. 

    주섬주섬...  돗자리를 챙겨들고 산으로 올라가고 싶네요. 

    돗자리에 앉아서 쏴아악 쏴아악 나뭇잎의 소리를 듣고, 불안하고 초초한 마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독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 2021-09-28 11:24

    혼자 있는 시간도 잘 보내고, 함께 있는 시간도 잘 보내고.. 

    혼자든 함께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무엇이 다가오든 다가오는대로 잘 지내봅시다.^^

    김제 시골길의 유키 쿠라모토 들어보고 싶네요.

  • 2021-09-28 11:49

    산에서 듣는 피아노 소리는 어떨까 궁금하네요. 무릎때문에 산을 못가니 더 아쉬워요. 

    전 자전거로 문탁을 오가면서 듣는 음악이 해독제예요.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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