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17회] 매력적인 악동, 페드로 알모도바르/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띠우
2022-05-17 02:09
61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매력적인 악동, 페드로 알모도바르

- 내 어머니의 모든 것(2000)/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

 

 

전 세계에서 주목받던 초현실주의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1900~1983) 이후 몰락해가던 스페인 영화에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페드로 알모도바르(1949~)다. 그는 현재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으로 우리나라 감독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화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올해 들어 우리나라에서 알모도바르 감독의 특별전이 연이어 열리면서 신작 영화 <페러럴 마더스(2022)>도 볼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유럽 영화계의 악동’ 혹은 ‘호모 영화 작가’라고 불렸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가 여전히 거장으로 불리며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모습이 좋지만 후기 작품들 속에서 사라져가는 그만의 생동감이 그립기도 하다.

 

젊은 날, 그의 공격성이 좋았다

 

잡지 『스크린』에 처음 소개되었던 그의 영화는 <신경쇠약직전의 여자(1988)>였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나 ‘에밀 쿠스트리차’처럼 독특한 영화를 찍는 감독들에 꽂혀있던 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1992년작 <하이힐(1991)>을 극장에서 보고 나서 <마타도르(1986)>나 <신경쇠약직전의 여자>를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에서 그는 도발적이고 강렬한 색채와 소재로 인해 음지에서 인기를 얻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냥 영화 자체가 멋있게 보였다. 36년간 프랑코 정권의 긴 독재의 끝에서 벗어난 스페인 사회는 남성권력이 상징하는 가부장적 질서와 권위주의를 한껏 조롱해갔다. 알모도바르는 영화에서 화려한 원색을 자주 이용했는데, <하이힐>은 포스터만으로도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억압적이고 관습적인 체계를 부정하는 움직임, 갑갑한 현실을 해체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무책임하고 무능하며 무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는 남성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이것은 자기정체성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남색행위를 강요당했다고 한다. 이후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혔던 알모도바르는 노골적인 성적 코드를 선보이며 자유분방한 욕망을 대담하게 표현해갔다. 자기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선보여졌고 차츰 그 스타일이 완성되어간다. 초기작에서 그가 선보인 인물들은 양성애자,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 기존의 가치관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엉망진창으로 보일지라도 솔직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시도했고 그것이 먹혀들었다. 그는 ‘악동’이라는 별명답게 다분히 공격적이었고 선동적이었다.

 

사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욕망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일생 전체를 따라왔던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선호하며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상 남의 구설수에 올라야 했으며, 이와 함께 살아야만 했다”라는 그의 인터뷰는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삶을 피하지 않고 일찍부터 정면으로 마주했던 그의 용기가 바로 작품들이 된다. 민감한 주제를 자유롭게 다루는 낯선 시선, 그것이 매력적인 것은 기존 질서에 자신을 맞추느라 급급한 우리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혼란스런 자신의 상황과 암담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유쾌한 리듬으로 비틀어 보여주었다.

 

철이 들면서 알게 되는 것들

 

198,90년대 작품들에서 그가 묘사하는 남성들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러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 이르면, 이전 작품 속에서 파괴적이고 권위적이며 독선적인 모습을 드러내던 남성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나는 이 시기부터가 그의 후반기 작품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마뉴엘라(세실라 로스)는 아들의 17번째 생일날, 위마(마리사 파라데스)라는 여배우가 공연하는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러갔다가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는다. 고통 속에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들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깊은 그리움을 발견한다. 마뉴엘라는 남편이 여장남자가 되고 싶어하자 그를 떠났었다. 아들소식을 알리기 위해 남편을 찾아 다시 바르셀로나로 향한 마뉴엘라는 여장남자 친구인 아그라도(안토니아 산 후안)와 수녀인 로사(페넬로페 크루즈)를 만난다. 또 배우 위마와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되어간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안에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또 다른 작품들이 나온다. 우선 도입부에서 마뉴엘라가 아들과 함께 보는 고전영화는 베티 데이비스 주연의 <이브의 모든 것(1950)>이다. 이 영화는 여배우 마고(베티 데이비스)를 동경하는 젊은 여성 이브(앤 박스터)가 교묘하게 마고의 자리를 빼앗아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 재키 스테이시는 <이브의 모든 것>이 ‘여성이 다른 여성을 보는’ 여성적 영화보기의 쾌락을 재현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영화 속 마고가 이브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관객도 마고와의 동일시를 꿈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브가 마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이브를 동경하는 휘비가 등장함으로써 이 모든 과정이 욕망의 재생산일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중요한 남성 모두(남편, 아들, 로사의 아기)가 이름이 에스테반이라는 것과 연결된다. 결혼 후 커밍아웃한 남편 에스테반을 이해하지 못했던 마뉴엘라는 임신중이었던 아들 에스테반과 함께 남편의 곁을 떠났었다. 이후 아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던 그녀가 이번에는 아들을 잃고 다시 에스테반을 찾아 나선다. 삶이 에스테반을 통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미세한 차이와 함께. 마뉴엘라는 에스테반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변화는 두 번째 작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통해 전개된다. 아들이 죽기 전 함께 보았던 작품으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반복해서 재연되는데 마뉴엘라는 나중에 이 연극 무대에서 연기도 한다. 영화 속 이 연극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극중 블랑슈의 남편도 결혼 후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자살했다. 블랑슈는 남편의 자살로 인해 정서불안을 겪게 되고, 아름다운 그녀는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오명을 얻게 된다. 천천히 블랑슈는 사회적 시선에 갇힌다.

 

 

이런 블랑슈가 동생 스텔라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가부장적인 남편 스탠리와 사는 스텔라 앞에 등장한 블량슈는 아슬아슬한 균열을 만든다. 스텔라가 아기를 낳으러 간 틈에 스탠리는 블랑슈를 겁탈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블랑슈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다. 감독은 동생 스텔라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 보여준다. 스텔라가 블랑슈를 외면하는 이유는 마뉴엘라가 남편 에스테반을 떠났던 이유와 마찬가지다. 스텔라는 남편을 향해. 세상을 향해 잘못되었다고 소리치지 못 한다. 욕망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면 부정당하는 것이다. 블랑슈와 마뉴엘라의 상황은 비슷했지만, 블랑슈와 달리 마뉴엘라의 선택은 달라진다. 차츰 마뉴엘라는 아들 사고와 관련된 인물인 배우 위마, 과거 외면했던 여장남자 아그라도, 옛 남편의 아이를 가진 로사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를 옭아매던 굴레가 무엇인지 깨닫는 마뉴엘라를 통해 감독은 자기질문의 답을 찾았다.

 

다시금 한바탕 소동을...

 

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자신의 모든 영화에서 계속 이야기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거부당했고 놀림 받았다. 기존 질서가 유지해온 도덕성에 대한 혁명적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도덕성이 얼마나 허상인지 우리는 에스테반(아버지)이나 스탠리를 통해 보았다. 아마 감독 스스로가 기존의 틀 속에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듯 하다. 아무리 피해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 마뉴엘라가 아그라도의 거리 복장을 빌려입고 수녀 로사의 엄마와 만나는 장면은 중요하다. 우연히 입은 옷만으로도 누군가로부터 부정당하는 현실. 자기를 바라보는 로사 엄마의 시선에서 이전의 자신을 발견한다.

 

이후 마뉴엘라는 자기를 옭아매고 있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아들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듯 떠났던 마뉴엘라는 이제 없다. 옛 남편 에스테반의 아이를 가진 수녀 로사를 돕고 그녀의 아들 에스테반을 보살핀다. 마뉴엘라가 이전과는 다른 보살핌의 관계를 맺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을 모성신화에 기댄 보살핌으로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연찮게 배우 위마와 연극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마뉴엘라는 이브처럼 욕망을 날카롭게 드러내지도, 블랑슈처럼 분열증의 세계로 숨어버리지도 않는다.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에서 폭력적인 남성 비중이 줄어든 이유를 이제 알 것도 같다. 그는 이제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모든 남성의 이름이 에스테반인 이유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게 누구든 자신을 억압했던 것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기서 마뉴엘라의 친구, 여장남자로 나오는 아그라도의 존재가 다시 감독을 대신해 이야기해주는 것이 있다. 남성이지만 여성인 아그라도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벗어난 존재다. 밝고 경쾌한 인물, 보통 이런 성격의 조연은 감초역할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아그라도의 경우는 영화가 흘러갈수록 점점 더 입체적이 된다. 돌발 상황으로 연극이 취소된 것을 관객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무대로 올라간 아그라도는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남성에서 여성이 되기까지 겪어야만 했던 아픔을 부위별 수술에 들어간 비용으로 설명한다. 툭툭 유머를 던져가며 괴롭고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이 꿈꾸는 자기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말한다. 아그라도는 스페인어로 기쁨, 즐거움, 반가움을 뜻한다. 편안하고 가볍게 듣는 이들의 귀를 열게 하는 아그라도가 마침내(?) 사랑스러워진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보았던 <패러럴 마더스>에서는 세상을 향해 그가 던졌던 날카로운 공격성이 사라져가는 듯해 아쉬웠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맞물린 개인들의 삶을 엮어가지만 뭔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향한 (사랑)영화라고 해야 할까. 2007년 프랑코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며 스페인 의회가 통과 시켰던 역사기억법을 소재로,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한 한줄평으로, ‘그가 소동을 잠재우고 제의를 시작했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이해의 폭을 넓혀주지만 그것이 모범답안 같아서 재미없기도 하다. 나로서는 그가 악동이었던 시절처럼, 영화 속에서 다시 한 번 기발한 소동을 한바탕 벌여주었으면 좋겠다.

 

 

댓글 3
  • 2022-05-23 11:17

    와~ 너무 잘 읽었어요. 띠우님~

    저는 이 감독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늘 선연한 붉은 색도 함께 그려져요.

    위의 필모에서 저는 

    <나쁜교육>과 <내가 사는 피부>를 보았는데,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여전히 인상적인 느낌이 남아있네요..

    글을 읽으니,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보고 싶어져요.
    감사합니다~~.

     

  • 2022-05-25 06:14

    예전에 <태양의 소년 에스테반>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물론 그 에스테반과 이 영화의 에스테반은 전혀 관계가 없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 대한 "내.신.평.가"는  에스테반을 둘러싸고 

    엄마인 마누엘라, 그리고 또 다른 엄마인 로사, 그리고 위마와 아그라도가 벌이는 술자리다.

    로사는 에이즈로 죽어간다. 마누엘라는 아들을 잃었고, 위마와 아그라도 역시 시원찮다.

    하지만 그날 그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에는 그늘이 없었고, 기쁨과 사랑이 넘쳐 흘렀다.

    아니 상황이 어떤지 아는거야? 어떻게 저렇게 유쾌할 수가 있지?

    감독이 꿈꾸는 세상 같았다.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진 해피한 세상이 아니라,

    그건 그것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라고,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살테니. 

    근심, 걱정이 없어지진 않는다. 그러나 그것에 끄달릴 필요도 없다.

    내 옆을 둘러보니 친구들이 있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띠우샘처럼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팬이 안 될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그러니 노년의 감독이 다시 악동의 기질을 다시 보여주진 않아도 오랫동안 현역으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 2022-05-25 23:54

    아 정말 재밌네요. 에스테반 이름의 반복 그리고 변주라~ 영화를 보지 말고 이 글로만 기억하고 싶다면...잘쓴 글일까요, 그 반대일까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4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1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29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7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한국영화시리즈 마지막 회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천재   -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베이비붐 세대의 문화예술론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4·19혁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을 겪으며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다. 1965년, 그는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UCLA 영화과에 진학하였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1969)은 미국 영화과 졸업생 가운데 4명을 뽑는 ‘메이어 그렌트(Meyer Grent) 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났다. 당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조지 루카스 등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연출했던 아서 펜의 조감독으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국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는 형이 있었다. 해외에서 병역기피자가 되어 형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1970년에 강제소환된다. 베트남전과 68혁명의 영향으로 자유를 향한 저항정신이 휘몰아치던 시기의 미국을 떠나 귀국하면서 보게 된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길종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사전검열뿐만 아니라 사후검열이라는 이중의 검열 제도가 있었고, 해외파에...
띠우 2023.05.28 |
조회 314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