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벼슬인 세상, 닥치고 은퇴?! (아젠다 13호 / 20210620)

문탁
2021-06-20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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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까지 보탤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준석’에 대해. <아젠다>가 뭐 정론지도 아니고 내가 뭐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 <아젠다>가 시사저널도 아니고 내가 시사평론가도 아니니 기껏해야 50명 좀 넘게 구독하는 <아젠다>의 친구들에게 이준석 현상에 대해 혹은 이준석으로 촉발된 몇 가지 개인적 단상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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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금의 요란한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뭐랄까, 한편으로는 쏠쏠한 재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그만 봐도 상관없는 TV 연예프로그램이나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의미 있는 쟁점도 있다. 얼마 전 읽은 「능력주의 비판을 비판한다」 (이범, 2021.06.10. 경향신문) 같은 과감한(?) 칼럼, 이에 대해 “조만간 24만자 정도의 글로 이런 무지한 소리들을 비판”하겠다는 박권일의 코멘트 같은 것. 그러나 이 밖에는 대체로 “세대교체의 바람과 변화에 대한 바람을 담아” 따위의 식상한 멘트, 혹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거나 “이준석발(發) 정치혁명” 같은 호들갑, 혹은 배 들어왔을 때 노 젓겠다는 식의 청년동원 이벤트들의 소란스러움뿐이다. 바람 같은 것,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식혜 위에 동동 뜬 밥풀”^^ 같은 것, 이게 작금의 이준석 현상에 대한 나의 인상평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타가 온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준석의 현충원 방명록 글씨를 두고 민 아무개라는 국회의원이 “신언서판” 어쩌고, “어색한 문장” 어쩌고 하면서 훈수를 두었을 때였다. 왜냐하면 나 역시 포털에서 그의 글씨체를 본 순간 ‘헉’ 싶은 마음이 들었고, 문장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 아무개라는, 4.15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당에서조차 ‘수구꼴통’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과 내가 정확하게 같은 정서반응을 보이고 똑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린 것이었다. 헐, 내 안에 민 아무개 있었어?

 

  생각해보니 얼마 전 정의당 류호정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모 의원 사이에 벌어진 ‘당신’ 시비 때도 그랬다. 나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긴 했지만, 류호정 의원이 ‘당신’의 다른 용법, 그러니까 3인칭 용법을 혹시 모르나,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이고!! 내 안에 황교익1)이나 최동석도 있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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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서른여섯 살 정당 대표에게 “즉흥적인 30대 젊은이의 가벼운 언행”이라거나 박원순 조문을 가지 않는 정치적 선택을 하는 이십대 여성 국회의원에게 “구상유취(口尙乳臭)” 라거나 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우리 사회는 정말 나이가 벼슬인 세상이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나이가 벼슬이 되었을까?

 

  내가 아는 한 나이 이야기가 나오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맹자』이다. “천하에 보편적으로 높이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하나는 작위(爵)이고, 또 하나는 나이(齒)이며, 다른 하나는 덕(德)이다. 조정에서는 작위만한 것이 없고, 마을(鄕黨)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을 돕고 백성을 보살피는 데에는 덕만한 것이 없다.” <공손추>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전(前) 국무총리를 구설에 오르게 한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단어의 원출전도 『맹자』이다. 바야흐로 요임금이 천하의 둘도 없는 효자, 순(舜)을 발탁하여 정치를 맡겼더니 순이 자신의 신하인 익(益)과 우(禹)와 후직(后稷)에게 각각 불과 물, 곡식을 관장하게 하여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게 한 후, 설(契)을 시켜 인간의 도리를 가르쳤다고 하는 스토리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도리가 바로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즉 오륜(五倫)이다. (<등문공> 상)

 

  하지만 마을에서는 조정의 벼슬과 맞먹었다는 나이(齒)가 생물학적 나이를 뜻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고대 유가(儒家)의 맥락에서 볼 때 문헌에 등장하는 나이(齒)는 생물학적 나이보다는 항렬과 촌수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갓난쟁이여도 직계종손이면 한 집안의 호주가 될 수 있고 일가친척 중에 나보다 수십 살이 어린 사람이라도 항렬이 높으면 삼촌 혹은 할아버지로 존대를 해야 하는 전근대 사회의 인간관계의 규칙, 혹은 사회조직화의 원리!! 이에 비한다면 생물학적 나이는, 공자의 제자들이 서른 살 이상의 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울려 함께 공부한 것으로 보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중요했던 것 같다.

 

  전근대사회뿐만 아니라 근대 초입에도 생물학적 나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최남선은 열여덟에 한국 최초의 월간지 『소년』의 편집장이 되었고, 김구는 열아홉 살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에 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첫 민의원 의원이 된 것은 스물여섯 살 때였고, 레닌이 <이스크라>를 만든 것은 서른 살 때였으며 김남주 시인이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던 때는 그의 나이 서른여섯 살 때였다. 돌이켜보니 나도 열아홉에 운동권이 되었고 스물둘에 감옥에 갔으며 스물여섯에 전위조직의 중간 지도부가 되었었다.

 

  그렇다면 유교 때문도 아니고 근대 초입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렇게 나이가 벼슬인 세상, 맨스플레인 못지않은 ‘올드스플레인’2)의 사회가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볼수록 나는 아무래도 그게 우리들, 즉 윗세대보다는 아는 게 많고 아랫세대보다는 가진 게 많은 우리, 86세대의 탓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열아홉부터 지금까지 너무 오래 현장에서 현역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명분과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왜 서른둘의 명식, 서른하나의 지원, 스물여섯의 고은 등의 사장과 선생을 여전히 자처하고 있는 것일까? 길드다 청년들을 비롯하여 작금의 청년들이 취약하기 때문에? 혹시 반대 아닐까? 그렇다는 나의 규정, 좋은 어른은 청년과 연대해야 한다는 나의 명분, 오랫동안 현역에 머물고 싶은 나의 욕망, 그런 것이 역으로 그들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잠시 집에 들른 딸이 일삼아 티비 뉴스를 틀어놓고 있는 나에게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엄마, 엄마는 뉴스가 재밌어?” 난 무심히 답했다. “뭐, 그냥 틀어놓는 거야. 딱히 다른 건 볼 것도 없고” 그랬더니 딸이 다시 말했다. “아, 엄마는 티비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 대부분을 알지? 그러니까 뉴스가 볼만한 거야. 난 아냐” 한 번 더 현타가 오는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놓인 자리가 그런 곳이구나. 은퇴와 전업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

 

 

각주 :

1)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페북을 통해 “정의당의 문제는 대체로 구성원의 낮은 지적수준에서 발생한다. 그러니 금세 나아질 수가 없다. 말을 섞지 않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했으며, 최동석 인사조직연구소장은 역시 페북을 통해 “류호정이라는 애는 왜 자꾸 이러는 걸까? 나는 이렇게 미성숙한 애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문제라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2) 맨스플레인 (mansplain)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단어로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발화를 독점하고 있는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신조어이다. 이에 빗대어 작금의 우리 사회, 즉 “나이가 벼슬”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나이 많은 자’(old)에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하여 ‘올드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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