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 ③] 공생 딜레마 - 현민

인문약방
2022-01-0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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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 잣대가 허상이기도 하거니와 비인간 자기들은, 어쩌면 인간도 그렇게 따져지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숲으로 들어가 숲 속의 자기들을 밝혀내고자 했다면, 도시에서 자라고 살아가는 나는 새로운 고민에 맞닿게 됐다. 인간만이 가득해 보이는 이 도시의 비인간 자기들은 모두 안녕할까?

 

 

 

 

 

 

2. 피해자이며 구원받는 자와 가해자이며 구원자

 

유독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인 고양이를 발견하거나, 길을 잃어 보이는 강아지를 만나는 일. 인도 한가운데서 죽은 비둘기를 보거나, 도로 한복판에서 멧꿩을 마주치는 일.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다친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면서 병원비로 있는 돈을 몽땅 쓸 각오를 했고, 길 잃은 강아지는 제 발로 집을 찾아가기를 바랬다. 죽은 비둘기를 묻어주고 싶지만 만질 수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어 꿩을 마주치고도 떠나버렸다. 이 도시에서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그들을 만날 때 나는 자주 당황스러워진다. 그들이 너무 살아있어서, 또는 너무 죽어있어서 나는 내가 한 선택들과 이 세상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그중 일부는 조금 더 수월하게 지나쳤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인간만이 가득해 보이는, 그러나 비인간 동물들과도 함께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그들은 금방 바스라질 것 같다.

 

 

 

어떤 동물들은 집 안에서, 인간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상식이 된 만큼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일은 흔해졌다. 사람들은 동물을 ‘키운’다. 비인간 동물은 인간처럼 대해 지고 인간으로 키워진다. 인간은 본인을 엄마/아빠, 언니/오빠의 역할로 위치 짓고 동물들은 자연스레 동생, 아기로 부른다. 비인간들은 이성애 정상 가족의 역할을, 정상적인 인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취약한 존재, 어리고 부족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아기가 되어, 오이디푸스화 되어 인간과 관계 맺는다.

 

또 어떤 동물들은 인간들의 집 밖에서, 매일 생사를 오간다. 집 밖의 동물들은 그야말로 피해자가 된다.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느 날 그 길에서(2006)>는 로드킬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세 명의 연구원의 자취를 따라간다.

 

"사람들은 다른데도 많은데 왜 하필 동물들이 도로로 올라와서 차에 치여 죽냐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어요. 행동반경이 1.5km으로 가장 적은 너구리조차도, 도로를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어요. 수많은 야생동물이 잠자고, 짝짓기하고, 숨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서식지 유형이 필요한데 야생동물도 도로가 싫음에도 살아가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도로를 오가는 거죠."

 

며칠 전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운전자로써 이동을 하기 위해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미 차에 치여 죽은 시체들을 지나치면서, 도로의 쓰레기들을 보며 시체일까 움찔거리는 내가 방관자 같이 느껴졌다. 잠재적 범죄자 같기도 했다.

 

고속도로가 아닌 나의 동네에서 비인간 동물을 만날 때도 고민은 이어진다. 이 길 잃은 강아지를 유기견 센터에 신고하면 2주 안에 안락사를 당하겠지? 하지만 이 길 위에 있으면 차에 치이거나 보신탕 재료가 될 수도 있겠지? 이 동물들을 그곳에 그대로 두고 오는 것은 존중일까, 방치일까? 아니면 그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내 세계에 끌어들이는 것은 개입일까, 상생일까? 왜 도시에서 동물들은 언제나 피해자일 수밖에 없을까? 왜 나는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 구원자가 되나? 도로에 들어가면 위험한 걸 알지만 도로를 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차에 치인 동물들처럼, 인간의 것들은 그들의 삶에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다. 비인간 동물은 피해자이면서 구원받는 자가 되며 인간은 가해자이며 구원자가 된다. 정녕 비인간 동물은 도시에서 ‘자기’로써 대해질 수 없는 걸까?

 

 

3.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키니까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초반에는 이런 독백이 나온다.

 

‘다카가 숲 싸워라. 스즈가 숲 싸워라. 홍군이든 청군이든 어디든 져라. 패배한 너구리는 죽어버려라. 다카가 숲은 오늘 없어졌다. 스즈가 숲은 내일 없어진다. 남은 너구리는 살 곳이 없다. 남은 너구리는 어디로 가나? … 패배한 너구리는 죽여 버려라. 모두를 위해서 죽여야 해! 살아남아 봤자 소용이 없다. 남은 너구리는 신중히 행동하여 새끼를 안 낳도록 해야 한다. 새끼를 낳아봤자 소용이 없어. 너희가 살 숲이 없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도쿄 인근 산에 살던 너구리들이 도시화 개발로 인해 터전이 없어져 인간들에게 대항하여 생존 대작전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영화 초반 도시화 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카가 숲과 스즈가 숲에 살던 너구리들이 영역싸움을 벌일 때 나이 많은 너구리 할머니가 나타나 북을 치며 독백을 읊는다. 할머니의 호통을 듣고 단결한 숲의 너구리들은 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들은 인간연구 5개년 계획에 돌입하고, 수년간 금지되어 있던 변신술을 배워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변신술을 익힌 너구리들은 공사현장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겁주고, 나무를 자를 수 없게 몸으로 버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시도에도 인간들은 숲을 없애고 도시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끝에서 변신술이 불가능한 너구리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다 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변신술이 가능한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위장하여 인간으로 살아간다.

 

결국은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걸까? 너구리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살아남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 그러나 너구리들이 죽어야만 하는 세상이 인간에게 좋을 리 없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적에는 어떤 동물들이 살았을까? 그것이 인간이더라도, 인간이 아닌 동물이더라도 분명 한 종의 동물만이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무서워했을 테고, 절대로 침범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을 테고, 또 가끔은 서로를 벗 삼아 살았을 것이다. 분명 그 시절의 동물들은 귀여운 존재도, 불쌍한 존재도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sf소설에서 얼룩말들이 집단 자살하는 부분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 아니라면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만으로도 너무 슬펐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먼저 겪고 있을 고난에 대해 생각해본다. 또 인간 중에서도 재난을 가장 먼저 겪을 이들을 생각해본다. 가난한 내 친구들이, 앞으로도 가난할 나와 내 친구들이 이 땅에 살았을 비인간 동물들처럼 쫓겨나지 않을 리 없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바꿔내는데, 책 속 몇 사람들은 지구에 사는 짐승들이 자살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세상에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있다면 사는 것이 좀 더 쉽겠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아서 이 글은 답도 없이 질문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딜레마를 겪는 것이 삶을 살아내는 과정이 될 테다. 그럴 때, 삶이 자주 흔들릴 때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킨다’는 문장을 기억하며 지구에 사는 나와 내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댓글 2
  • 2022-01-03 14:04

    저는 잘 모르기도 하고 확신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어서 인간 아닌 self 들이 집단자살 하기 전에 방향이 틀어질지도 모르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현민님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어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봄부터 날마다 산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갈 때마다 얼마나 다른지, 숲은 정말 살아있구나.. 하는 걸 매일 느껴요. 자연과 멀었던 저희 남편도 그 말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한사람씩 저마다의 계기로 지구 위에 인간이라는 개체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self 들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면 달라지겠죠. 그랬으면 좋겠고요.

  • 2022-01-03 16:54

    집에 길냥이 가족이 왔는데 모두 네명이어요

    엄마는 매일 밥을 주고 차갑지 않는 물을 챙겨주고 살피십니다

    현민씨 에세이를 들은 후 그 아이들을 보며 나는 구원자일까?  생각하다가 과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며 한동안 그들을 쳐다봅니다

    그들도 유리창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요

    남편은 집도 지어주고 추울까봐 담요도 넣어주고 문앞에 비닐막도 쳐주었는데 이제는 마당에서 쥐를 사냥하기도 하면서 거의 제집처럼 지내고 있네요

    그래도 우리가 나가면 경계하며 저만큼 떨어져서 우리를 살피긴 하지만요

    이들과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하여간 귀엽고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현민씨를 통한 배움이 있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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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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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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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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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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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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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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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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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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