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 ①] 알지 못한 채 아이를 알아가는 법 - 모로
인문약방
2022-01-0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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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생각이 났다. 책에 따르면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호과정의 산물이다. 즉, 우리의 사고는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아이는 어떤 식으로 기호작용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 상호작용의 간극이 인간과 재규어만큼 다르다면 어떨까?
이 책의 소제목인 ‘알지 못한 채 알아가기’라는 말이 좋았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매일 함께 하는 시간과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서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똥을 누기가 극도로 두려웠던 이유는 생리 활동은 컴퓨터처럼 분명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더 어릴 때는 불규칙적으로 배가 아픈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음에는 똥을 누는 행위에서의 괄약근 조절 -힘을 주면서 동시에 풀어야 하는 행위- 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왜 생리 현상을 위해 내가 지금 하는 재미있는 놀이 활동을 멈추어야 하는지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이와 나는 수많은 시간 –거의 5년 가까이-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때론 울고, 싸우고, 달래고, 이해시키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받아들였다. 마치 똥이 외계 생물체가 되는 양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그토록 지난했다.
루나족의 이야기에서 흰 눈 잉꼬 겁주기 모형이 등장한다. 잉꼬를 쫓아내기 위해서 잉꼬-겁주기라는 허수아비를 제작하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맹금류랑은 전혀 닮지 않았다. 널빤지 두 개를 십자 모양으로 묶은 후, 빨갛고 파란 줄무늬를 어설프게 그려 넣었는데, 얼핏 보면 아이들이 만들다 만 장난감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맹금류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잉꼬들에게 맹금류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상상하는 데 있다. 잉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추측이 여러 가지 효과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아이는 나에게 흰 눈 잉꼬와 같다. 한글의 원리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읽고 쓸 수 있지만, 생리 작용의 원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가르쳐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 나와 전혀 다른 사고를 하는 존재와의 간극을 시행착오와 추측을 통해서 좁혀나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 그 속에서 갈팡질팡하기
아이가 어렸을 때는 정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유치원에 갈 5살이 되자, 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을 힘들어하는 터라, 시험 삼아 느티나무 도서관 옆에 있는 발도르프 어린이집의 오후반에 보냈다.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느릿느릿 걸어도 도보로 10분 남짓. 하지만 매일 거기 데려다주는데 30분, 한 시간 이상이 걸린 적도 있었다. 나는 단지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줄 알고, 다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런 줄만 알았다. 선생님도 좋으시고, 아이들도 10명 남짓밖에 안 되는 오후반인 데다가, 일주일에 두어 번이라 여러모로 고민 끝에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다. 발도르프 교육은 기본적으로 책을 없애고 자연 위주는 놀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책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무서운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도전이었다. 아이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좋은 교육 속에 밀어 넣었으니, 그 몇 달은 정말로 전쟁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기관에 실패했다.
그리곤 남편 회사 어린이집에 운 좋게 당첨되었다. 나름 유명한 그 어린이집은, 새로 지은 인테리어가 아주 근사했다. 여기도 공부보다는 인성 위주의 교육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처음 몇 달간은 어린이집 밑 맥도날드에서 1분 대기조를 탔고, 그 이후에도 한 달 출석 일수 8일을 겨우 채우면서 다녔다. 나중에 알았는데, 종일 구석에 앉아서 책만 보고 있었던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매일 불려 다니고, 데리고 갔다 왔다, 주차장에 드러눕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렇다면 빠듯하게 공부를 시키는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할까.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지긋지긋해져서, 7살 2학기쯤에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나와 집에서 냄새나게 붙어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코로나 상황이 이어지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를 몇 번 못 갔기 때문에 거의 일 년 반 가까이 둘이 붙어있었다. 나는 미치고 팔짝 뛸 모양새였는데 아이는 ‘자기에겐 코로나가 행운과도 같다’라고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못 가는 것을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
그때야 알았다. 아이는 정말로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다면 이때껏 내가 했던 고단한 노력은 다 헛것이었나? 어린이집이 뭐라고 그 고생을 했나.. 싶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번에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를 그냥 놔두기에도, 그리고 뭔가 하는 것도 매끄럽지 않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구나. 이것과 저것의 혼동 사이에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기호를 해석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도전함으로써 추측하는 길.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다.
외부와 내부를 아우르는 막대기가 된다는 것
이 책에는 퍼스펙티브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생소한 이 단어는 각자의 ‘자기’들 간의 유사성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자기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루나족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이름 장난 같은 걸 하는데, 예를 들어 내 이름이 친구 남편의 이름과 같을 때, 나에게 “자기~”라고 부르는 등의 농담을 나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다수의 퍼스펙티브를 아우르는 시야를 찾아낸다. 루나족 신화에서 영웅과 재규어가 지붕을 보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웅은 지붕 위에 올라가 구멍을 막으려고 하지만, 밖에서는 구멍을 찾기가 힘들다. 반면 건물 안에 있는 재규어는 빛이 새어 나오는 부분을 통해 구멍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너무 높이 있어서 막기는 힘들다. 이때 내부에서 외부로 막대기를 끼워 넣음으로써 내부와 외부의 퍼스펙티브를 정렬한다. 막대기를 통해 양쪽이 다 보이게 되는 것이다. 영웅은 구멍을 막은 뒤 문을 닫아 재규어를 가둔다. 막대기를 꽂는 행위가 재규어에게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베이트슨의 이중기술과도 연결되는데, 두 눈을 예로 들었을 때,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보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사이에 어떤 유사성을 인식하고 차이를 비교하는 이중기술을 발휘함으로써 전체를 포괄하는 인식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시간, 깊이에의 지각이 그 사이에서 창발한다. 사회성 부족과 영재성을 잇는 특징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과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속에 막대기를 찔러넣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처음에 아이가 발달상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여러 기관을 찾았고, 거기서 뜻밖의 영재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뻤다. 아이가 모자란다는 것보다, 넘친다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 후시딘인가. 고슴도치 엄마는 한동안 이 프레임에 빠져서 아이를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해석 또한 결코 적절하지 못했다. 머리가 좋은 것이 꼭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꼭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중요한 것은 영재냐 사회성 부족이냐가 아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해석하느냐에 달렸다. 상징으로써 아이를 바라보는 인식의 한계를 깨고, 그것을 넘어선 기호작용으로써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거쳐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내가 아이의 막대기가 되어 줄 수 있을까?
해피엔딩이 아닌 진행형
하지만 아이는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서도 자랐다. 1학년 때만 해도 친구들과 인사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이젠 가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담임 선생님께 기분 좋은 문자가 왔다. 점심 먹고 친구랑 교실 뒤편에서 알까기를 하고 있다며 동영상도 보내주셨다. 마스크 너머로 신난 눈빛이 즐거워 보였다. 사회성이 서로 부딪혀가면서 생긴다고만 생각했지만, 꼭 그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안다. 머리로써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에 행동이 나오는 아이도 있다. 나와 지지고 볶는 시간 역시 꼭 도태된 시간만은 아니었다. 둘이 나누는 시간이 충분해지니 비로소 그다음으로 한 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을 아우르는 막대기 역할을 꼭 나 혼자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조금 벗어났다. 아이는 다행히 선생님 복이 많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아이를 살펴봐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한다. 지금 만난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이의 일들을 나에게 알려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교실 안에서 선생님만의 ‘막대기’가 되어 주고자 고민하고, 아이들을 연결한다. 언젠가는 아이가 그런 다양한 막대기들을 딛고 자기의 세상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됨을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아직도 진행형이다. 얼마 전에도 학교에 제법 가는 거 같아 방과후 학교를 신청했다가 장렬하게 실패했다. 오랜만에 학교에서 울고 불어서 방과 후 선생님께 소환되었다. 학교에 안 간다고 드러눕는 날도 여전히 많다. 그럴 때는 정해진 방법이 없다. 어떤 날은 억지로 보내고, 어떤 날은 학교를 빼고 둘이 커피숍에 가서 빵이랑 음료를 먹기도 하고, 책방에 들어서 책을 읽기도 한다. 아니면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한다. 그러다 보면 내일 또 밖에 나가겠지. 지금 나의 꿈(?)은 태권도 학원에 보내는 거다. 소박한 꿈을 꾸고, 아이와 조율하면서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시행착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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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모르겠는 큰 아이 키울 때 생각이 나네요. 늘 한 켠 막막했었는데 저 우주를 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문득 알게 되면서 편해졌어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 제 목표였는데 이제 성년이 되어 제가 자주 도와달라고 하네요 ㅎㅎ
모로님의 작은 꿈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시길 선배맘으로 응원할게요.
이 글을 읽다보니 저도 처음 모로님을 꿈지락에서 봤을 때부터, 문탁 게시판의 글을 통해 만나기까지 알지 못한채로 알아가고 있는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시행착오’야말로 진정한 기호작용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