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 ①] 알지 못한 채 아이를 알아가는 법 - 모로

인문약방
2022-01-0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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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독특한 9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장애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천재의 범주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그런 아이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지리도 예민하고, 울음을 달고 사는, 그리고 사회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아이를 키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돌 지나고부터는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여기저기 검사도 많이 받았다. 검사 결과는 지능 상위 1%, 사회성 하위 1%. 한 가지를 좋아하면 몇 년 동안 좋아하는 터라, 지금은 유니코드 문자표에 푹 빠져있다. 아이는 눈 뜨자마자 생각난 듯 나에게 묻는다. “엄마, 에스페란토라는 문자를 아세요? 인공어 중에 하난데요. 제이 위에 이런 삿갓 모양이 그려져 있어요.” 매일 이런 것들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든 게 괴상하게 그려놓은 꼬부랑 글씨 같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최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해도, 사실 나도 힘들다. 거기에 사람들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을 쉽게 알아채지 못해서,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보니,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를 다니기가 힘들다. 보편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 왜 온종일 이상한 세계 여러 나라 문자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왜 똥을 누는 것 같은 당연한 생리 현상을 그토록 무서워하는지..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아이 ‘되기’는 가능하기나 할까.

 

 

 

 

흰 눈 잉꼬 같은 아이를 알아간다는 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결국엔 아이 생각이 났다. 책에 따르면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호과정의 산물이다. 즉, 우리의 사고는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아이는 어떤 식으로 기호작용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 상호작용의 간극이 인간과 재규어만큼 다르다면 어떨까?

 

이 책의 소제목인 ‘알지 못한 채 알아가기’라는 말이 좋았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매일 함께 하는 시간과 다양한 경험들이 쌓여서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똥을 누기가 극도로 두려웠던 이유는 생리 활동은 컴퓨터처럼 분명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더 어릴 때는 불규칙적으로 배가 아픈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음에는 똥을 누는 행위에서의 괄약근 조절 -힘을 주면서 동시에 풀어야 하는 행위- 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왜 생리 현상을 위해 내가 지금 하는 재미있는 놀이 활동을 멈추어야 하는지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이와 나는 수많은 시간 –거의 5년 가까이-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때론 울고, 싸우고, 달래고, 이해시키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받아들였다. 마치 똥이 외계 생물체가 되는 양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이 그토록 지난했다.

 

 

 

루나족의 이야기에서 흰 눈 잉꼬 겁주기 모형이 등장한다. 잉꼬를 쫓아내기 위해서 잉꼬-겁주기라는 허수아비를 제작하는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맹금류랑은 전혀 닮지 않았다. 널빤지 두 개를 십자 모양으로 묶은 후, 빨갛고 파란 줄무늬를 어설프게 그려 넣었는데, 얼핏 보면 아이들이 만들다 만 장난감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맹금류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잉꼬들에게 맹금류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상상하는 데 있다. 잉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추측이 여러 가지 효과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아이는 나에게 흰 눈 잉꼬와 같다. 한글의 원리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읽고 쓸 수 있지만, 생리 작용의 원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가르쳐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 나와 전혀 다른 사고를 하는 존재와의 간극을 시행착오와 추측을 통해서 좁혀나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 그 속에서 갈팡질팡하기

 

 

아이가 어렸을 때는 정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유치원에 갈 5살이 되자, 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을 힘들어하는 터라, 시험 삼아 느티나무 도서관 옆에 있는 발도르프 어린이집의 오후반에 보냈다.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느릿느릿 걸어도 도보로 10분 남짓. 하지만 매일 거기 데려다주는데 30분, 한 시간 이상이 걸린 적도 있었다. 나는 단지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줄 알고, 다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런 줄만 알았다. 선생님도 좋으시고, 아이들도 10명 남짓밖에 안 되는 오후반인 데다가, 일주일에 두어 번이라 여러모로 고민 끝에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다. 발도르프 교육은 기본적으로 책을 없애고 자연 위주는 놀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책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무서운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도전이었다. 아이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좋은 교육 속에 밀어 넣었으니, 그 몇 달은 정말로 전쟁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기관에 실패했다.

 

그리곤 남편 회사 어린이집에 운 좋게 당첨되었다. 나름 유명한 그 어린이집은, 새로 지은 인테리어가 아주 근사했다. 여기도 공부보다는 인성 위주의 교육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처음 몇 달간은 어린이집 밑 맥도날드에서 1분 대기조를 탔고, 그 이후에도 한 달 출석 일수 8일을 겨우 채우면서 다녔다. 나중에 알았는데, 종일 구석에 앉아서 책만 보고 있었던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매일 불려 다니고, 데리고 갔다 왔다, 주차장에 드러눕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렇다면 빠듯하게 공부를 시키는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할까.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지긋지긋해져서, 7살 2학기쯤에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나와 집에서 냄새나게 붙어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코로나 상황이 이어지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를 몇 번 못 갔기 때문에 거의 일 년 반 가까이 둘이 붙어있었다. 나는 미치고 팔짝 뛸 모양새였는데 아이는 ‘자기에겐 코로나가 행운과도 같다’라고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못 가는 것을 얼마나 행복해 하던지...

 

그때야 알았다. 아이는 정말로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다면 이때껏 내가 했던 고단한 노력은 다 헛것이었나? 어린이집이 뭐라고 그 고생을 했나.. 싶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번에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를 그냥 놔두기에도, 그리고 뭔가 하는 것도 매끄럽지 않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구나. 이것과 저것의 혼동 사이에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기호를 해석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도전함으로써 추측하는 길.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다.

 

 

외부와 내부를 아우르는 막대기가 된다는 것

 

이 책에는 퍼스펙티브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생소한 이 단어는 각자의 ‘자기’들 간의 유사성을 발견함으로써 다른 자기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루나족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이름 장난 같은 걸 하는데, 예를 들어 내 이름이 친구 남편의 이름과 같을 때, 나에게 “자기~”라고 부르는 등의 농담을 나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다수의 퍼스펙티브를 아우르는 시야를 찾아낸다. 루나족 신화에서 영웅과 재규어가 지붕을 보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웅은 지붕 위에 올라가 구멍을 막으려고 하지만, 밖에서는 구멍을 찾기가 힘들다. 반면 건물 안에 있는 재규어는 빛이 새어 나오는 부분을 통해 구멍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너무 높이 있어서 막기는 힘들다. 이때 내부에서 외부로 막대기를 끼워 넣음으로써 내부와 외부의 퍼스펙티브를 정렬한다. 막대기를 통해 양쪽이 다 보이게 되는 것이다. 영웅은 구멍을 막은 뒤 문을 닫아 재규어를 가둔다. 막대기를 꽂는 행위가 재규어에게는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베이트슨의 이중기술과도 연결되는데, 두 눈을 예로 들었을 때,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보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사이에 어떤 유사성을 인식하고 차이를 비교하는 이중기술을 발휘함으로써 전체를 포괄하는 인식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시간, 깊이에의 지각이 그 사이에서 창발한다. 사회성 부족과 영재성을 잇는 특징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과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속에 막대기를 찔러넣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을까.

 

 

처음에 아이가 발달상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여러 기관을 찾았고, 거기서 뜻밖의 영재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기뻤다. 아이가 모자란다는 것보다, 넘친다는 말은 얼마나 달콤한 후시딘인가. 고슴도치 엄마는 한동안 이 프레임에 빠져서 아이를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해석 또한 결코 적절하지 못했다. 머리가 좋은 것이 꼭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꼭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 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중요한 것은 영재냐 사회성 부족이냐가 아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고 해석하느냐에 달렸다. 상징으로써 아이를 바라보는 인식의 한계를 깨고, 그것을 넘어선 기호작용으로써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거쳐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내가 아이의 막대기가 되어 줄 수 있을까?

 

 

해피엔딩이 아닌 진행형

 

 

하지만 아이는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서도 자랐다. 1학년 때만 해도 친구들과 인사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이젠 가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오늘만 해도 담임 선생님께 기분 좋은 문자가 왔다. 점심 먹고 친구랑 교실 뒤편에서 알까기를 하고 있다며 동영상도 보내주셨다. 마스크 너머로 신난 눈빛이 즐거워 보였다. 사회성이 서로 부딪혀가면서 생긴다고만 생각했지만, 꼭 그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안다. 머리로써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에 행동이 나오는 아이도 있다. 나와 지지고 볶는 시간 역시 꼭 도태된 시간만은 아니었다. 둘이 나누는 시간이 충분해지니 비로소 그다음으로 한 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을 아우르는 막대기 역할을 꼭 나 혼자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조금 벗어났다. 아이는 다행히 선생님 복이 많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아이를 살펴봐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한다. 지금 만난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아이의 일들을 나에게 알려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교실 안에서 선생님만의 ‘막대기’가 되어 주고자 고민하고, 아이들을 연결한다. 언젠가는 아이가 그런 다양한 막대기들을 딛고 자기의 세상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됨을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아직도 진행형이다. 얼마 전에도 학교에 제법 가는 거 같아 방과후 학교를 신청했다가 장렬하게 실패했다. 오랜만에 학교에서 울고 불어서 방과 후 선생님께 소환되었다. 학교에 안 간다고 드러눕는 날도 여전히 많다. 그럴 때는 정해진 방법이 없다. 어떤 날은 억지로 보내고, 어떤 날은 학교를 빼고 둘이 커피숍에 가서 빵이랑 음료를 먹기도 하고, 책방에 들어서 책을 읽기도 한다. 아니면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한다. 그러다 보면 내일 또 밖에 나가겠지. 지금 나의 꿈(?)은 태권도 학원에 보내는 거다. 소박한 꿈을 꾸고, 아이와 조율하면서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시행착오 중이다.

댓글 3
  • 2022-01-03 09:17

    지금도 모르겠는 큰 아이 키울 때 생각이 나네요. 늘 한 켠 막막했었는데 저 우주를 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문득 알게 되면서 편해졌어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 제 목표였는데 이제 성년이 되어 제가 자주 도와달라고 하네요 ㅎㅎ

    모로님의 작은 꿈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시길 선배맘으로 응원할게요.

  • 2022-01-03 09:26

    이 글을 읽다보니 저도 처음 모로님을 꿈지락에서 봤을 때부터, 문탁 게시판의 글을 통해 만나기까지 알지 못한채로 알아가고 있는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 2022-01-03 10:56

    ‘시행착오’야말로 진정한 기호작용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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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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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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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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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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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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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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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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