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짠글쓰기4]반갑다, 페미니즘

김지연
2021-12-06 09:58
398

페미니즘, 그런 거였어?

 

2020년 겨울, 우리 회사 모(母)그룹의 다른 계열사에서 35살의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2021년 여름, 그녀는 부하 직원에게 막말을 퍼부었다는 짧은 논란을 끝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경질되었다. 갑이 을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문득 내 시선에 다른 문제가 겹쳐 보인다. 남성 임원이 막말 따위(?)로 경질되는 건 본 적이 없다. 폭력이나 성추행 정도는 돼야 문책받는다. 특히 이 문제가 기사화되면서 여성 임원 할당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공정한 평가로 선발하지 않고 특별히 마련한 자리에 사람을 뽑아 올리니 이런 문제가 생긴단다. 그동안 여성을 위한 자리는 특별히(?) 배제되었다는 점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단짠단짠 글쓰기 클래스에서 정희진의 책을 다루던 날이었다. 모두가 사회 문제를 속 시원한 글솜씨로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녀의 글에 홀딱 반해서 왁자지껄 토론하던 중이었다. 학인 한 명이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했다. 아들을 키우다 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불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함께 노는 아이들 사이에 때리는 여아와 맞는 남아의 불공평(?)도 존재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서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데, 소수의 남자들이 역차별 당한다고 푸념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다른 학인의 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당하는 시대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고착된 남녀 구조가 이제 막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불편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특히 페미니즘은 남녀 차별을 넘어 모든 불평등 해소를 위한 이념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공부해야 한다고도 했다. 나도‘페미닌(Feminine: 여성의)’이라는 단어 속에 치우친 성의 특정성이 불편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이 남성에게 치우친 삶에서 고통받았다는 건 잊고 있었다.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금부터 공평하면 그만이라고 간편하게 생각했다.

 

 

페미니즘맹() 탈출 후유증

 

짧지만 강렬했던 깨우침(?) 이후로 전에는 못 느끼던 불편함이 조금 늘었다. 특히 직속 남성 상사의 발언이 거북해졌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로맨스 소설 광팬이다. 종교가 주는 보수성과 로맨스 소설이 주는 감수성 때문일까. 그는 종종 보수적이면서도 성적인 독특한 발언을 한다. 남녀는 때가 되면 당연히 결혼해야 하고, 남성이 연상이어야 정상(?)이며, 부부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아이를 낳는 것이다. 나이 든 독신 여성에게 난자 냉동을 권하거나, 다양한 취미 중 하나인 발레 얘기를 할 때마다 여자 몸매를 과학적으로(?) 묘사하는 건 기본이다. 업무 태도 및 성과를 늘 평가받는 입장 때문일까. 여성이 태반인 우리 부서에서 그런 이야기에 웃음으로 대응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실력은 으뜸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평소 자기 사람을 보듬는 사려 깊음에 높은 위치가 더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의 언행에 상당히 관대하다. 직속 여성 상사 K는 이렇게 말했다.

 

“더한 사람들도 있잖아. 그냥 철없는 애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한 개인의 철없음으로 치부한 채, 들은 얘기를 잊는 것도 방법이다. 함께 있던 후배들에게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어 속상할 뿐이라고 이메일에 몇 문장의 넋두리를 남기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깥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안팎의 온도차... 커도 너무 크다!

 

우리 팀은 올해 약 6개월에 걸쳐 뷰티 케어 사업 방향을 제안했다. 현대 여성이 생각하는 뷰티 케어란 무엇이고, 그들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연구했다. 반갑게도 성형이나 시술로 원하는 외모를 만들려는 여성보다, 자신감 있고 에너지 넘치며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여성이 많았다. 나이도 과거도 개의치 않고 건강한 몸과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여성을 멘토로 삼는 경향도 강했다. 우리 팀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광고 모델을 제안했다. 이혼한 아이 엄마지만 누구보다 일과 가정을 열성적으로 꾸리는 연예인이었다. 자기 관리를 통해 어린 시절 싼티(?)를 벗고 패셔니스타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해당 사업의 최고 경영자 보고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마케팅 실무자가 모델 제안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웹에서 검색해보니 이혼도 했고 전남편의 자질도 좋지 않기 때문이란다. 어차피 우리 회사와 맞지 않으니 사전에 제안을 말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아까웠다. 다양한 뷰티 업계에서 그녀를 모델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녀에게 달라진 여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확신했다. 현재 그녀가 뷰티 마케팅 업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설명했다. 숱한 명품업계에서 그녀에게 옷을 입혀보려 한다는 자료도 보여줬다. 동의는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이 싸움으로 우리 팀이 득 볼 일이 없었기에 우리는 결국 모델 제안을 단념했다.

 

생각할수록 놀랍다. 21세기 첨단 기술 상품을 만드는 일터에서 ‘올바른 여성’과 ‘정상 가족’에 대한 압박을 받다니. 일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여자들의 여성관이 얼마나 멋지게 변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와 가족의 이력이 사람을 평가하는 지표라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 나는 결심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열심히 잘해서 여자 후배들에게 힘을 주는 선배가 돼야지.’ 그런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다른 벽에 부딪혔다.

 

 

여자는 여자의 적? 우리끼리 이러지 말자.

 

뷰티 프로젝트는 여성 팀원 세 명이 진행했다. 리더를 맡은 J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결혼을 앞둔 Y가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자율근무 제도를 시행 중이라 각자 원하는 시간에 출퇴근할 수 있다. 그런데 Y는 혼자 일찍 출근해서 혼자 일찍 퇴근해버린단다. J는 자신이 결혼식 전날까지 야근했던 경험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도 Y를 주시했다. 늘 급히 퇴근하느라 업무에 소홀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따로 불러서 같은 여자끼리 힘든 일을 거들며 좋은 성과를 내보자고 말했다. 네 남자친구가 결혼 준비 때문에 회사 일을 등한시하면 좋겠냐는 질문이 목구멍에 차올랐다. 그리고 잠깐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왜 여자들은 이런 거지?’

 

1~2주 정도 지났을까. 리더인 J가 다시 면담을 요청했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시험관 아기를 준비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자연적으로 임신한 것이다. 몇 년째 유산과 임신 실패로 마음고생이 많던 친구였기에 진심으로 축하했다. 문제는 임신 상태가 불안정하여 의사가 꼼짝하지 말라고 했단 것이었다. 당연히 생명이 회사보다 중요하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워낙 일 욕심이 많은 친구라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고집했다. 결국 복통이 시작되면서 단축근무와 휴가를 신청했다. 결혼과 임신으로 쉬어야 하는 그들의 뒷수습은 내가 막내 사원을 데리고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아 힘든 시기에 또 다른 책임이 더해지니 서러웠다. 신입 시절 이후 처음으로 회사에서 울었다. 회사 밖에서 내 얘기를 들은 여자들은‘나도 여자지만 이래서 여자들과 일하기 어렵다’고 반응했다.

 

문득 지금의 여성 상사 K와 (지금은 퇴사한) 과거의 여성 상사 A가 논쟁하던 술자리가 생각났다. 싱글이기도 한 K는 특정 팀에 육아휴직자가 몰리는 상황은 남은 사람들에게 불공평하다고 했다. 결혼한 유자녀 여성인 A는 K를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몰이해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너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여자가 일하기 힘들다고, 출산과 육아 문제는 무조건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를 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쉴 수 없는 우리 입장은 달랐다. 그들의 출산과 육아가 고통스러운 건 안다. 그러나 남아서 그들의 몫까지 해내는 우리도 힘들다. 이렇게 우리는 여자끼리 누가 더 힘든지 실랑이하고 있었다. 이 대화에서 남자의 존재나 역할에 대한 논의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 구조가 여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로 전이되니 자존심이 상한다. 달라진 세상에 대한 경계심 없이 여성성과 정상 가족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남성 상사 앞에서 가만히 있기가 점점 부끄럽다.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우리 여성들의 조심스러운 움직임도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여성끼리 비난하고 원망하는 상황이 반복되니 마음 아프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답답해도 해답은 있다!

 

남성 상사를 철없는 아이로 보자던 K는 꽤 적극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임원을 코칭하는 인사 전문가와 면담하던 중에 남성 상사의 젠더 감수성 문제를 언급했다. 그녀의 행동에 자극받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출산과 육아로 휴직자가 생기면 조직 구조 문제로 드러내서 구멍 난 업무를 해결할 방법 찾기. 남성 상사의 발언으로 무안해질 때마다 후배들에게 좋은 페미니즘 책 한 권 권하기. 무엇보다 일을 통해 여성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서 알리는 것도 방법이겠다. 우리 회사의 주요 고객은 여성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어 파는 사람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아무리 조사하고 연구해도 말과 글로 여성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뷰티 케어 기기를 연구하는 사업부도 피부 연구에만 집중하느라 피부와 생리주기 간의 상관성은 처음 들어본 것 같았다. 달라진 여성 트렌드라며 X세대 남성들이 작성한 리포트에 코웃음 친 기억도 난다. 여성이 진짜 원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알리는 일은 선후배 및 동료들과 매일 할 수 있는 일이겠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일터 밖에서도 이미 움직이고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은 SNS에 게시물을 올린다. 여성 임원 경질 사건 당일에는 세계 최초 젠더 중립 주연상을 수상한 엠마 왓슨의 사진과 그녀의 수상소감을 게시했다. 뷰티 프로젝트 모델 제안을 포기한 날에는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중 깨끗한 여성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글귀를 올렸다. 통상 한 달에 한두 권의 책을 읽는다. 그중 한 권 정도는 여성 작가나 페미니즘 책으로 정해서 소감을 작성하고 인상 깊은 구절을 촬영해 올리면 어떨까. 몇 명 되지 않아도 내 SNS를 보고 책을 사거나 빌려 읽는 동료들이 종종 있다. 그들이 나를 통해 모든 성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이해하도록 시도해보고 싶다. 그런데 이 일을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쓰기 클래스에서 새로운 이들을 만나 지식을 공부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은 실로 뜻깊다. 그 가치를 알면 알수록 평소 친분이 두텁고 아끼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과도 이렇게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상사지만 사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언니이기도 한 K가 평소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덕에 여성 임원 물망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임원을 목표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조직이 요구하는 기준보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걸 기준으로 삼자고도 했다. 그녀에게 조직이 아닌 우리를 위한 공부 모임을 제안했다. 페미니즘부터 들이대면 이전의 나처럼 불편해하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우리가 연구하는 트렌드나 재테크부터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여성 지식인에게 필요한 주제를 폭넓게 다뤄보자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가한 연말에 시작해서 아무리 바빠도 그 시간은 꼭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너무 좋다! 꼭 하자! 그까짓 것 우리가 못할 리 없잖아?”

 

그녀는 함께 하면 좋을 다른 동료 이름도 댔고, 그간 쌓아온 인맥으로 전문가를 불러도 좋겠다는 아이디어까지 냈다.

 

의외로 적극적인 그녀의 반응에 마음이 설레고 의지가 샘솟는다. 우리가 과연 실행할 수 있을지, 연말에 생각이 바뀌지 않을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최소한 일터에 매여 있기에 할 수 있는 일과 내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은 있지 않은가. 모임이라는 결과를 끝내 얻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지 않으려 한다. 엠마 왓슨과 앤 해서웨이가 차분하고 자신감 있게 페미니즘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는 영상을 자주 찾아봤다. 나도 그들처럼 문제를 문제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힘을 키울 수만 있어도 좋겠다. 그런 힘이 생긴다면 단단한 여성 모임도 결국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 만나서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댓글 2
  • 2021-12-06 19:53

    고구마 먹다가 사이다 한 컵 들이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읽으면서 박수를 치게 되는군요.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 2021-12-13 12:12

    80년대에 시작했던 직장생활의 기억이 떠오르네요. 나름 앞선 지식인이라 자부하던 기자사회에서조차 신문사의 행사에 여기자는 한복을 입고 오라는 사측의 주문에 어이없어했었죠. 그런데 정작 더 황당했던 것은 유일한 여자동기가 정말 한복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거죠. 입고오지 않은게 다행이었다고 해야 하나....수없이 많은 성차별적 언어와 행동거지들 사이에서 매일 싸우고 울고 했던 시기가 고스란히 되살아나네요. 지금은 형식적으로나마 그런 노골적인 차별은 없어졌지만, 오히려 이면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들이 더 큰 문제지요. 자신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무엇인가 행동에 옮기는 김지연님의 실천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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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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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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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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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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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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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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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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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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