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⑥] 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2021-07-2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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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에세이 개요에 대해 조원들끼리 서로 코멘트를 해주는 자리에서 지원이는 백신에 대해 써보라며 자기 관심사를 내게 토스했다. 난 흔쾌히 그 주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내 속에 여러 입장이 혼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신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백신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고 그런 와중에 ‘약사’라는 내 직업은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의무이기도 했다. 더는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에 과학적으로도 좀 더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아스트라제네카에도 화이자에도 문의를 했는데 상당히 모호한 답변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문의 과정에서 나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 의문에 이어 이 사태가 단지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문제로 환원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국이 시행하고 있는 범세계적 백신 정책은 전체주의마냥 한결같고 백신의 개발과 도입과정도 이례적이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윤리와 절차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브라이도티의 논의를 통해서 이 상황을 포스트휴먼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려 한다.

 

 

  유전자 백신이 연 세상

  사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작년에 팬데믹이 시작되고 나서 넷플릭스에서 본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조류독감의 유행을 염려하고 있었고,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책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 가능성도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약사연수교육을 받던 중에 WHO 보고서와 질병 X(1)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코비드-19 유행 몇 달 전인 2019년 9월에 발표되었는데, 첫 번째 질병 X는 인수공통 감염병이면서 RNA 바이러스이고 호흡기를 타깃으로 한 바이러스일 거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료가 이토록 발달한 시대에 이렇게 자세한 예측을 하고도 우리는 왜 이 팬데믹을 막지 못했을까?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아니면 속수무책이었을까?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백신 개발에 대한 리포팅을 길게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바이러스가 유행할지 모르고, 바이러스의 높은 변이력에 대항할 수 있는 백신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 리가 없다. 다큐 속의 젊은 개발자는 ‘빌 게이츠 재단’에서 돈을 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오랜 시도 끝에 펀딩을 받았지만 그 성공이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연수교육에 나온 바이러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동물용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치료제는 바이러스 발견 이후 80년 동안 성공하지 못했고(2), 백신은 개발되었지만 자꾸 변이 하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효과가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백신은 세계 최초의 유전자 백신이다. 일반 백신처럼 약독화한 균주나 감염원의 단백질이 주 성분이 아니라 유전물질(3)이 주성분이다. 또 이번 유전자 백신들은 급하다는 이유로 최소 10년이 걸리는 개발 기간과 혹독한 안전성 및 유효성 검증 과정을 가볍게 뛰어넘었다.(4) 게다가 백신 개발에 각국 정부는 엄청난 돈을 투입하고 있다.(5) 

 

 

  그럼에도 이 백신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저명한 의학저널인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의하면, 가장 먼저 개발되어 상업화된 세 가지 코로나19 백신(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화이자 백신, 모더나 백신)은 “바이러스 전파를 막아주는가?”와 “얼마나 효과가 유지되는가?”라는 항목에서 모두 “모른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즉 백신을 맞았더라도 바이러스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고 거리두기 등의 방역지침을 철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백신 접종률이 높은 영국과 이스라엘에서 변이종이 다시 유행하여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효능과 안전성만이 문제는 아니다. 최근 제약 기업의 신약 개발 방향은 백신과 유전자치료제를 비롯한 바이오 의약품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법정 전염병은 아니지만 대상포진이나 자궁경부암 백신 등 여러 백신들이 개발되고 있고, 유전자 분야는 검진과 치료제 부분에서 약진하고 있다. 이러한 백신들과 유전자 검진은 실제 질병이 걸린 게 아닌데도 그 질병에 대한 공포를 증가시키면서 소비를 유도한다. 유전자 백신의 긴급 승인과 광범위한 적용은 향후 유전자 치료제 허가에 있어 높았던 허들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단백질 백신(노바백스 백신)이 임상 3상을 마치고 곧 시판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유전자 백신이 그렇게 급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혹이 든다. 그런 의혹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와 일본이 저지른 인체 실험이 떠올랐다. 심하게 말해, 제약회사들은 부작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 아래 대규모 임상 실험을 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 아닐까?(6)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표면적으로는 코비드-19 팬데믹과 각국의 백신 정책은 살아있는 인구에 대한 통치(관리)로서 다분히 ‘생명정치’적이다. 하지만 팬데믹 자체가 불러온 수많은 죽음-6월 말 기준으로 누적 395만-은 관리되지 못한 죽음으로서 생명정치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죽음들은 또 어떤가? 원인이나 통계조차 잘 파악되지 않고 있다. 유전자 백신의 긴급 승인 자체가 부작용으로 인한 죽음들을 용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정치에 있어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합작은 이 팬데믹 상황에서 더 긴밀하게 돌아간다. 

 

  브라이도티는 아실 음벰베의 말을 빌어 생명정치의 이면은 죽음정치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죽음의 모습으로부터 생명정치를 너머 죽음정치를 사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 죽음의 모습들은 다양하다. 종교적 근본주의들의 성장으로 여성들과 GLBT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증가, 지구적 금융망 등 새로운 기술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이 일으킨 빈곤, 새로운 전염병(사스, 에볼라, 조류독감, 코비드19 등)과 오래된 전염병(결핵, 말라리아)의 세계적 유행, 환경 재난이나 자연적 재난(기후 위기 등), 정신적 죽음(중독, 식이장애, 탈진, 무관심, 우울 등), 대리전쟁과 난민 등이다. 이 죽음의 모습은 중의적으로 포스트휴먼적이다.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라는 이해의 범위를 넘었고 또 글자 그대로 비인간적/비인도적이다.

 

  생명정치의 이면에 있는 죽음의 모습을 우린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어떤 인구 집단들의 건강한 삶이 다른 이들, 특히 자연의 퇴화된 존재들과 건강하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불가피하게 여기도록 허용한다.”(154쪽) 불가피한 죽음들을 못 본 채 하며 우리가 추구한 건강이 결국엔 우리의 죽음을 불러온 것일까? 어느덧 우리 또한 유전공학적인 데이터 경영과 ‘생물자원 해적행위’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던 것일까? 유전공학 자본주의는 포스트휴먼 곤경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의 유전공학적 구조가 신체들을 생명 정보의 운반자로 축소시켰고, 그런 신체들은 금융 가치로 투자 대상이 되고 자본화되었다. 신체들은 인구 집단 전체를 새롭게 분류하는 자료를 제공했다. 분류 기준은 유전자적 소인과 자기를 조직하는 생명 능력이다. 경제적 성장과 생물학적 성장 사이에 구조적 이종동형이 존재하며, 이러한 상황이 우리 시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권력관계를 포드 시대보다 더 거칠고 더 노골적으로 만든다.(152쪽) 

 

  인위적으로 만든 바이러스 유전자가 인간의 세포핵 속으로 들어와 인간의 몸에 있는 물질로 바이러스의 단백질을 만든다! 이것은 불치의 유전병을 치료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이용한 채소와 곡식(GMO)을 먹고 의약품(인슐린 등)을 써오다 결국 우리 몸이 GMO가 될지도 모를 시점에 와 있다. 우리의 생명은 더 이상 ‘정치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생명’인 ‘비오스’가 아니다. 바이러스와 우리 사이의 종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이를 아우르는 생명 개념은 생명 자체인 ‘조에’다. 죽음의 정치학을 논하려면 생명을 더 이상 비오스가 아닌 조에로서 봐야 한다고 브라이도티는 말한다. 

 

  기술적인 것과 유기체적인 것 사이에 근본적인 분리는 없다는 차원에서 유전자 백신을 맞는 우리가 사이보그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긍정적 포스트휴먼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유전물질이 몸속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우리 주체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과정은 국가적이면서 초국가적이다. 이 자본이 휘두르는 죽음 권력에 우리의 주체성 또한 곤경 속에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판단을 유보하고 있거나 무작정 국가 정책에 따르고 있다. 

 

 

 

  포스트휴먼 윤리학(조에 주체성)

  정부가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면 거리두기 면제, 격리 면제 등 백신 인센티브를 제시하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백신을 맞겠다고 나섰다. 엄마는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이 백신을 맞고 엄마의 백신 접종 여부를 묻자 소외되기 싫어서 결국 백신을 맞았다. 팬데믹이 주는 공포는 관계에서의 소외, 일상에서의 소외, 경제적 소외 등 전방위적으로 작동한다. 한마디로 ‘죽음’과 다름 아니다. 이 죽음을 벗어날 방법은 이 백신들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팬데믹이 예견됐음에도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백신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어떠한 대비도 못한 게 아닐까? 

 

죽음정치적 사유와 조에적 사유를 브라이도티가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곤경을 벗어날 포스트휴먼 (조에) 주체성을 수립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죽음 권력에 저항하는 지점을 포착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실천적으로는 현재의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현재의 비인간 측면인 공포와 폭력을 거부하고 그것을 전환시켜 긍정의 대안을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집단적으로 작업해야 한다.”(167쪽)

 

  그리고 그녀가 얘기하는 포스트휴먼 윤리학의 열쇠는 우선 의혹과 고통이 일으키는 마비 효과들을 넘어 움직이는 것이고 그 의혹과 고통들을 가로지르는 작업이다. 이번 백신 상황을 보면서 내가 놀란  거 역시 마비 효과이다. 유전자 백신을 맞는다는 건 인위적으로 인간 세포에 다른 유전 정보를 도입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밝혀진 게 없지만 GMO 이슈보다 가볍게 다뤄졌다.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이력은 크다. 당연히 많은 수의 인간이 백신으로 급작스럽게 베타형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만들면 다른 형태로 빨리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지금 유행하는 변이형은 델타형이다.) 이것은 어려운 과학적 얘기가 아니다. 

 

 

 

현대 의학이 감염병에 대한 승리를 외친 지(7)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금 감염병들의 창궐을 맞이했다. 여기엔 난개발, 밀집식 공장 축산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의료와 과학이 자본화 되고 권력화 된 이유도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여러 원인들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지만 원인 치료가 아닌 대증치료에 집중한다. 언제나처럼 우린 빠른 치료를 원한다. 물론 나라고 뾰족한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가 이 상황을 그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따르자 안 그러면 인도나 브라질처럼 될 거다 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면 그건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백신 접종률이 높은 영국과 이스라엘이 변이형이 다시 유행하고 있고 다시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는 건 안다. 

 

  물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백신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당장 백신 이외 어떤 뾰족한 수가 없다 해도 이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 볼 수는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브라이도티가 하고 싶은 얘기지 않을까? 그리고 그녀의 이 말을 기억하고 싶다. 

 

‘삶’은 획득된 취향이며, 다른 중독들처럼 중독이고, 결말이 열려 있는 기획이다. 우리는 힘써 작업해야 한다. 삶은 통과해 지나간다. 우리는 삶을 소유하지 않으며, 단지 거기에 거주할 뿐이다.(173)

 

 

 

 

주석

 (1) 질병 X는 인류가 만나지 못한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을 일컬어서 WHO가 명명한 이름이다.

 (2) 고양이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 1개가 이제 막 임상이 끝났다고 한다.

 (3) 코비드19 바이러스의 외피를 덮고 있는 스파이크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게 코딩된 유전물질(DNA 또는 mRNA)이다. 백신을 맞으면 그 유전물질이 우리 세포에 들어가서 스파이크 단백질을 생산해 세포밖으로 내보낸다. 체내의 림프구는 이 단백질을 대상으로 면역반응을 일으키고 항체를 생산한다. 

 (4) 화이자 백신의 경우 mRNA를 우리 세포에 넣기 위해 겉을 싸고 있는 LNP와 첨가제로 들어간 폴리에틸렌글리콜은 독성 때문에 평상시 같으면 절대 허가가 나올 수 없는 물질들이다.

 (5) 미국의 제약회사 모더나에 백신 개발을 위해 미국 정부는 약 2조원을 지급했다.

 (6) 이스라엘을 화이자백신을 대량 확보하는 대가로 실시간으로 접종데이터를 화이자에 제공하기로 했다.

 (7) 소니아 샤의 책 『팬데믹; 바이러스의 위협』에 의하면 1951년 맥팔레인 버넷 경은 서구 사회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요인으로써 감염병의 사실상 퇴치’를 달성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집트의 학자 압델 옴란은 사망의 주요 원인과 양상이 감염병에서 만성질환으로, 조기사망에서 후기사망으로 이행되는 현상을 ‘역학적 전환epidemic logical transition’으로 명명했다.

댓글 2
  • 2021-07-24 10:30

    길드다가 매달 내는 <아젠다>의 사장칼럼에서 문탁 사장님은 이제 다시 코로나 시대의 삶에 대해 숙고하고 토론해볼 때라는 이야기를 꺼냈더군요.

    문탁 2층을 꾸리는 살림회의에서도 사장칼럼에 대해 공감하면서 코로나 시대 우리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마음을 모았어요.

    마침 둥글레님이 이렇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글도 썼고, 또 이번에 일리치 약국이 준비한 월경 프로젝트 기획도 좋았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그래서! 토론회는 인문약방과 함께 준비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려고 해요.^^ 어때요? 괜찮지요?ㅎㅎ

     

    • 2021-07-28 11:01

      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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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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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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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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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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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요요 2023.11.20 |
조회 20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19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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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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