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➃] '진짜' 군인은 없다.

musa
2021-07-1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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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군인은 없다.

- <지.아이.제인>(’97), <MBC 진짜 사나이 95회:여군특집>(’15), <엣지 오브 투모로우>(’14) 여성 군인 재현 분석

 

 

   누구에게나 말하기 싫은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다. 너무 자주 말해서든 말하기 어려워서든. 나에게는 내 직업과 군대가 그렇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쓰고 말하려는 이유는 어떻게든 ‘공부하는 몸’으로,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내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서다. 전쟁, 평화, 폭력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직 ‘내 몸에, 내 생각에, 내 삶에 ‘개념’을 붙여가는 일’(정승연, 세미나책, 193)이 어렵다.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래서 이 글은 딱 그만큼의 에세이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다거나 궁금증에 답을 하는 에세이는 아니다.(문탁샘께서 제목이 길다고 하셔서 바꿨습니다. 원제 : 여성 군인,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재현을 넘어 수행으로)

 

   2006년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난 내 직업이 불편해졌다. ‘너 역시 군사주의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고 일갈하는 페미니즘을 그냥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이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의 견고한 동맹에서 비롯되었다는 페미니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 내 직업 현장에 대해 단순히 불편함을 토로하기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보고 싶어졌다. 

 

전사(戰死) 전사(戰士)

 

   역사적으로 여성은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피보호자 아니면 피해자로 재현되었다.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공병/포병), 부상 장병을 치료하며(의정/간호), 전장에서 밥을 지었지만(병참) 여성은 전투를 ‘지원’했을뿐 전사로 호명되지는 못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환향녀와 전시 강간 피해자, 남편과 자식을 전장에서 잃은 미망인과 어머니 이미지만이 간간이 예술작품의 소재로 다뤄졌다. 전쟁을 겪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승리의 찬란함(또는 패배의 비극성)은 참전자의 몫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목소리만이 역사가 되었다. 페미니즘은 그 역사의 진위를 의심하며 태동했고, 그 역사를 누가 썼는지, 왜 그런 역사가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페미니즘 공부는 내 삶의 현장에 혼란을 주지만, 현실을 살아갈 용기와 에너지도 주고 있다. 

 

한손 팔굽혀펴기는 한때 로망이었다.

 

   2003년 입대를 앞두고 훈련에 ‘적합'한 몸을 만들던 나는 롤 모델이 필요했다. 여성이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보호자나 피해자로 재현되는 것이라면 전투에 참전해 통쾌하게 승리한 여성 서사는 없을까? 영화 <지.아이.제인>은 ‘여성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일 뿐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영화(인 줄 알았)다. 남성들도 60%가 탈락한다는 네이비 씰 특전 훈련을 온갖 고생 끝에 마친 오닐 중위는 우연히 실전에 투입되고 평소 ‘여성은 전장에서 짐일 뿐’이라던 교관의 생명을 살린다. 영화에서는 지옥 훈련 수료보다 교관(남성 주체)의 인정과 무공훈장을 받는 순간이 더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남성화’된 조직에 진출한 소수 여성이 겪는 각종 차별과 폭력, 신체적 열세 극복, 전우애, 전장에서의 승리, 조직의 인정 등 뻔한 클리셰가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오닐 중위는 결국 ‘남성적’ 기준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직 내 지배적인 ‘남성’ 가치를 강화하는 ‘명예 남성’이 되었지만, 나는 오닐 중위에게 푹 빠져 버렸다. 강인한 체력은 군인의 기본 덕목이라고 여겼던 나는 3개월 동안의 몸 만들기를 거쳐 드디어 한손 팔굽혀펴기를 성공한 순간 ‘진짜’ 군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진짜군인은 누구일까?

 

“버틀러는 모방이라는 행위 자체가 원전의 진본성이나 권위를 손상시켜 더이상 원전/모방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가능치 않다는 근거로 설명한다.”(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25)

 

   막상 군에 입대해보니 직접 전투 참전 경험이 있는 현역 군인은 극소수였고, 섹스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투 ‘지원’ 업무에 복무하고 있었다. ‘진짜’, ’원본’은 없었다. 직접 전투에 참전한 군인만이 ‘진짜’ 군인이라는 관념은 허상이었다. 그 관념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다고 여겨져 온 가치나 지배질서, 성차별적 조직 문화, 기회의 불평등에 대한 언급은 뒤로한 채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전투에 적합하지 않으며, 보호의 대상일 뿐이라는 편견과 폄하만을 반복적으로 덧씌워 만든 구성물이었다. 또한 그 관념은 시대와 가치의 변화, 첨단기술과 정보력이 중심이 된 현대전의 성격, 전장의 전 지역화, 징병제 사회의 특수성, 군 복무를 특권이 아닌 박탈로 여기는 인식 변화 역시 담지 못한다. 오닐 중위가 특전 훈련을 무사히 수료하면 해군 내 성차별 규정을 철폐하겠다는 정치권의 밀약은 여성 개인에게 집단 여성 범주를 대표시킨 후 실패하게 만드는 전략의 민낯을 드러내고 과학이라는 진리 외피를 뒤집어 쓰고 견고하게 주장되어온 차별의 허구성과 규정의 인위성을 방증한다. <지.아이.제인>이라는 제목은 한국어로 <군인 영희> 정도로 번역된다. 이는 여성 군인 일반에 ‘너도 오닐 중위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착각을 부추기고 ‘‘진짜’ 군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네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구조적 차별의 책임을 여성 개인에게 돌리는 전통적 재현방식을 반복한다. 모든 여성 군인이 오닐 중위가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다. 

 

   여성 군인들은 군인화 양성 단계에서 ‘여성성'을 버리고 ‘군인’으로 거듭나기를 강요받지만, 막상 일선 부대에 배치되고 나서는 ‘여성’으로서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을 요구받는다. ‘어머니’처럼 병사들을 케어하는 돌봄 인력으로서, 경직된 분위기를 가족같이 부드럽게 조율하는 성차화된 존재로서 재호명된다. 직책과 직능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여성 군인들은 ‘군인’답게 훈련을 받다가 행사 때는 ‘여성’스럽게 꽃다발을 건네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여군특집>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다. ‘톰보이(Tomboy)** 아이돌 엠버는 기초 훈련을 우수하게 받음으로써 ‘남성’ 교관들을 놀라게 하지만 곧이어 ‘유격 교관의 눈빛에 반한 엠버’라든지 ‘바느질하는 천상 여자 엠버’로 소비되면서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 동맹에 충실한 방식으로 재현될 뿐이다. ‘남성화’된 삶의 현장에 적응하기 위한 여성 군인들의 고군분투는 섹스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임을 어쩔 수 없이 용인하고 상명하복과 성별 위계적 조직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현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여성 군인들은 각기 다른 경험과 계급의 층위 속에서 여성성을 버리고 ‘진짜 사나이’(남성군인 모델)가 되려 하거나 성별 분업을 받아들여 여성성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혹은 성차를 드러내지 않는 다소 중립적인 전략이나 더 나아가 자신만의 수행으로 현실적 딜레마를 돌파해보려 하지만 구조적 차별과 일상적인 젠더 폭력에 노출되며 지금도 여전히 ‘죽어 나가는 피해자’로 재현되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규범에 의해 구성되는 동시에 규범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 규범에 비판적이어서 규범에 변화를 주는 관계로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14)

 

   다시 <지.아이.제인>으로 돌아가보자. 정치권은 예상과는 달리 선전하는 오닐 중위에게 여성 동성애자(정확히는 ‘남성적 여성’을 의미하는 부치) 프레임을 씌워 훈련을 포기하게 하지만 실패한다. “이미 여성이 여성적 여성/남성적 여성으로 분리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남녀의 이분법적 구도를 허무는 것이며 젠더 교차적 동일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버틀러에 기대어 희망을 가져 보지만, 영화에서는 남자 친구와의 이성애를 등장시켜 ‘동성애자 아님’을 보증해 주면서 동성애 이슈는 가볍게 소비되고 흩어진다.

 

 

해러웨이의사이보그 버틀러의주체 출구가 있을까?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타임루프를 소재로 외계의 적에 대항하는 지구연합군을 다룬 SF 영화다. 전투가 싫어 공보장교에 지원한 케이지 소령과 전투에 참전한 현역 군인 중 유일하게 승리하여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는 브라타스키 하사가 등장한다. 첨단 워리어 플랫폼 장비인 ‘엑소 수트’와 한 ‘몸’이 된 두 군인은 공통 경험(타임루프에 갇힌다.)을 토대로 소통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전쟁영화와는 달리 성차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두 군인 간의 감정은 이성애인듯 전우애인듯 모호하게 묘사되며 그것이 무엇이든 ‘전쟁 승리’와 극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의 승리가 나에게는 ‘이분법의 미로’에서 출구를 찾은 서사로 읽히기도 하는 이유다. 

 

   오늘도 여성 군인들은 ‘가부장제-자본주의-군사주의’가 출산한 지정학적 안보 불안과 젠더 폭력이라는 이중의 전쟁 경제 속에서, 그 견고한 동맹이 호명 또는 재현한 ‘진짜 사나이’, 어머니’, ‘피해자’, 무엇으로 명명되든 삶의 현장 속에서 버틀러의 ‘주체’가 되는 꿈, 그리하여 ‘법의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물을 남겨 완전한 총체적 일원체계를 위협하는 전복력’을 갖는 꿈을 꾼다.

 

“버틀러의 주체는 그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 부분을 남김으로써 완전한 복종도, 완전한 저항도 아닌 복종을 하는 것이다. 즉 승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주체의 몸은 잔여물로서 구성적 상실 속에 살며 몸의 틀을 잡고 규제하는 동시에 규제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27)

 

* 베티 리어든,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13쪽

** Tomboy is a girl who exhibits characteristics or behaviours considered typical of a boy.(네이버 영어사전) 

 

http://moontaknet.com/?page_id=5254&mod=document&uid=33691

댓글 3
  • 2021-07-16 07:47

    오늘 아침 오랜만에 선선한 대기를 느끼면서 맑은 정신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쓰여진 글에서 뿐만 아니라 쓰이지 않은 행간에서 무사님의 실존적 고민이 느껴집니다.

    한편의 글로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사님을 조금은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글로 만나니 좋네요.

    *언젠가 필름이다에서 무사님과 영화를 같이 보고 싶군요.^^

  • 2021-07-17 12:34

    나와는 별로 연결점이 없다고 생각되던 군인, 그것도 여자 군인ᆢ

    그리고 그것에 연결되는 또 다른 세상을 줌해서 보여주시는 무사님과 무사님의 고민과 사유가 잘 드러나는 멋진 글ᆢ.

    너무 잘읽었어요^^

  • 2021-07-17 18:53

    수행으로 전복력을! 건승을 빕니다!!

    내삶을 돌아보며 진심^^

    한손 팔굽혀펴기도 진심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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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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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꼭 필요할까요 『해피크라시』, 에바 일루즈 · 에드가르 카바나스 지음       나는 ‘나는 솔로(solo)’를 즐겨본다. 이번 기수 ‘영수’는 자기소개에서 자신의 가치관에서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를 어필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영수’는 이제껏 그런 느낌을 주었던 다른 출연자들처럼 큰 이변이 없는 한 틀림없이 매력적으로 어필 될 터였다.  ‘정숙’역시 “평소에 긍정적이세요?”라는 ‘광수’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 당연히 좋은 것아니냐?”고 화답했다. 행복을 위해 긍정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우리 시대의 이런 이야기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에바 일루즈와 에드가르 카바나스의 『해피크라시』를 읽고 나면 무심히 들어오던 ‘행복’과 ‘긍정’이라는 평범한 단어에 갑자기 버퍼링이 걸릴지 모른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 특히 미국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에 주목하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2007)』와 『사랑은 왜 아픈가』(2011) 등을 통해 감정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상호 침투 양상을 날카롭게 분석해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 『해피크라시』(2018)에서는 신자유주의 소비 사회 속의 거대한 ‘행복 추구의 물결’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기에 말이다. 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좋음, good)’을 최고선이라 규정하며 지난하게 우리를 설득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체로 ‘행복(happiness)’은 그저 복된 운수, 즐겁고 기쁜 상태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주관적인 만족과 안녕감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하여 객관적으로 명확히 파악되기 어려운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전 세계가 문화적, 도덕적, 인류학적 편견이나 전제 없이 해맑게(?) 사용하는 ‘무해한’ 언어 중의 하나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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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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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결과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닐 슈빈     닐 슈빈은 2004년,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자로 온 세계의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물고기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는 화석 ‘틱타알릭’이다. 3억 7,500만년 전에 살았던, 지느러미 안에 두 팔을 가진 물고기 ‘틱타알릭’은 수생동물의 육지 전이의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닐 슈빈은 1990년대부터 화석탐사에 나섰는데, 이 시기는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등 분자생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였다. 화석이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보여준다면, 생명체의 배아와 유전자 연구는 화석만으로는 알기 힘든 생명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낸다. 닐 슈빈은 화석과 유전자,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진화의 비밀을 밝히는 진화생물학자이면서 『내 안의 물고기』와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등의 대중적 과학서를 쓴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는 다윈(1809~1882)의 시대로부터 유전자 편집기술로 실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뛰어든 과학자들이 이야기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진화가 일어나는가’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였다. 이 이야기는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1859)에서 단 한 단어만을 바꾼 『종의 기원에 대하여 On the genesis of species』(1871)로 다윈을 비판한 마이바트(1827~1900)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윈은 한 종의 진화는 수많은 중간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했다. 마이바트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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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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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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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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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유교,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 - 『문명들의 대화』 뚜웨이밍   뚜웨이밍(杜維明), 어디서 들었더라   학이당에서 한참 공부할 당시 유학의 흐름을 따라 주자를 거쳐 어찌어찌 왕양명의 『전습록』을 읽게 되었다. 그 때 문탁샘은 양명의 전기문으로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이라는 책을 뽑으셨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절판인 고로 최재묵 교수님이 쓴 『내 마음이 등불이다』로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종종 왕양명이 등장하는 순간마다 문탁샘은 우리가 뚜웨이밍의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계신 듯하다.   “왜, 우리도 읽었잖아. 그 책 왕양명의 전기인데… 그 책 쓴 사람이잖아.” “……?”   그렇게 이름만 익숙한 뚜웨이밍, 아마도 그가 궁금은 한데, 그의 다른 책이 딱히 없어서 이 책, 『문명들의 대화』를 사지 않았나 싶다. 1940년생인 뚜웨이밍은 현대 신유가로 대표되는 지식인이다.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뚱하이(東海)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역사 ·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베이징대학교 고등인문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문명들의 대화』는 2000년 대 초 발행된 책으로 뚜웨이밍의 인터뷰, 강의록, 저널의 기고문 등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글들은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다소 산만하게 구성된 점도 없지 않다. 또 2000년 대 초에 쓰인 책이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제는 철지난 것이 되어버린 면도 좀 있다. 더 최근 자료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학, 새로운 인간학이 될 수 있을까?”(2015년)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을 볼...
진달래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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