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회] ‘기다림’을 찾아서, 수우주식(需于酒食)

봄날
2021-07-26 03:44
478

** 주역공부 4년차. 여전히 해석도 어렵고 뜻을 알아내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나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추동하는 주역은 매력적인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 감동을 함께 나누려 용기내어 글을 쓴다. 봄날이 픽(pick)한 주역의 말들!

 

,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수(需)가 믿음이 있으면 밝게 형통하고 곧으면 길하여,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

 

初九, 需于郊, 利用恒, 无咎

초구는 교외에서 기다린다. 일정함이 이로우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九二, 需于沙, 小有言, 終吉

구이는 모래사장에서 기다림이다. 약간 말이 있으나, 마침내 길할 것이다.

九三, 需于泥, 致寇至

구삼은 진흙에서 기다리니, 도적이 옴을 초래할 것이다.

六四, 需于血, 出自穴

육사는 피에서 기다리나 구덩이로부터 나올 것이다.

九五, 需于酒食, 貞吉

구오는 술과 음식으로 기다리니 바르면 길할 것이다.

上六,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來, 敬之, 終吉

상육은 구덩이에 들어가는데, 불청객 세 사람이 오니, 공경하면 마침내 길할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나는 탁구를 좋아한다. 운동삼아 시작한 것이 십 년이 넘었으니 구력(球歷)으로 치자면 고전 공부보다도 오래된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인 것에 비해, 나의 탁구 실력은 지지부진하다. 나의 탁구가 신통찮은 가장 큰 원인은, 무게 2.7g, 지름 4cm에 불과한 그 작은 공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볍고 작은 공은 나의 기다림의 한계를 시험한다. 그리고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 가볍고 작은 공에 늘 진다. 굳이 위로삼아 말하자면,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같은 운동을 하는 친구들도 대개 빠르고 세게 치는 것보다 기다렸다 치는 것을 어려워한다. 생각과 몸의 조화로운 결합은 의외로 쉽지 않다. 마음은 계속해서 “기다려”를 외치지만, 공보다 먼저 라켓을 휘두르고 나면,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십 년이 넘도록 나는 제대로 그 공을 기다리지 못한다. 탁구라는 운동에서 나는 ‘기다리는 것의 어려움’을 지독하게 느낀다. 나는 왜 그 공을 기다리지 못할까?

 

내가 성질이 급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그저 성격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라는 생각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주위를 돌아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최신 기술은, 효율적, 경제적 차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순삭’해준다. 거대한 유통망이 구현하는 ‘새벽배송’은, 내가 잠든 사이에 집앞까지 재료를 배달해주고, 아침을 차릴 수 있게 한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앉아 잡지책이나 뒤적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은행 풍경은 인터넷 뱅킹으로 대체됐다. 현대에 발맞추는 ‘스마트한 사람’은 병원이고 미용실이고 예약을 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사람이다. 약속한 시각보다 훨씬 일찍 나타나는 것은 할 일 없는 노인이나 루저의 몫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최신 트렌드는 간주, 즉 노래와 노래 사이에 들어가는 연주가 아주 짧다고 한다. 왜냐하면 간주가 긴 노래는 인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 시간을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노래방에서, 키오스크 단말기에 있는 ‘간주점프’라는 기능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이런 집단 조급증은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미덕이 돼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문화적인 코드조차 모두 경제성에 수렴된다.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는 몸으로 바뀌어 간다. 내가 공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사회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기다리다가 남에게 뒤처진다’는 경쟁의식을 나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인간을 말하는 수우주식

그러므로 3천년 전의 세상에서 ‘기다림의 도(道)’를 말하는 수천수괘(水天需卦)는 어쩌면 주역의 그 어떤 괘보다 오늘날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괘일지 모른다. 수천수괘는 하늘에 물이 머물러 있으면서 아직 비가 되지 않고 비의 기운이 차있는 형상을 가진 괘이다. 하늘을 뜻하는 건(乾) 위에 물을 뜻하는 감(坎)이 있으니 구름이 하늘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다. 비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괘. 그 비를 기다리는 시간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먹구름이 얼마큼 끼어있으면 얼마 뒤에 비가 내릴지를 우리는 모른다. 혹 과학기술이 데이터를 모아 수치계산을 하면 얼마 뒤에 비가 얼마큼 내릴 것을 알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 뿐이지, 비가 내리는 시간을 당기거나, 양을 조절할 수는 없다. 자연의 일은 결국 자연 나름의 로직대로,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어야 변화하는 것이니, 비가 오기를 바란다면 비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인간세상에 비유하자면, 수괘의 때는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일 때이다. 새로운 일을 함께 할 ‘동지’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관계맺기’가 중요한 때이기도 하다. 이 관계맺기 기술 중 하나가 ‘기다림’이다. 수괘의 말들은 이런 다양한 사람들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기다려야 동지를 얻을지, 아주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가령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이 아주 멀리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어김없이 수행하면서 기다려야 허물이 없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동지가 있을 때는 그와 얽힌 이러저러한 구설수가 있을지 모르나, 자신이 도모할 일을 위해 꿋꿋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또한 정작 함께 일할 사람이 지척에 있을 때, 의심이나 의중을 떠보려는 일로 갈등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수괘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은 ‘수우주식(需于酒食) 정길(貞吉)’이었다.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동지를 기다리되, 바르면 길하다는 것.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숙제를 함께 풀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 대뜸 끌어들이지 말고, 상대가 찾아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기다리는 인간’의 풍모는 이런 것이다. ‘수우주식(需于酒食) 정길(貞吉)’하는 태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기다리는 신체

내가 다니는 탁구장의 관장은 유니버시아드 대표 출신이다. 평소에는 탁구를 배우려는 수강생들을 가르치느라 공을 배급해주고 수강생의 공을 받아낸다. 그러다 가끔 제대로 된 시합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우리 모두 그 흥미진진한 시합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관장은 신통술이라도 부리는지 상대가 어디로 어떻게 공을 보낼지 미리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상대의 공을 되받아 반격하는데 그 모습은 예술에 가깝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움직이는데 공은 빠르고 힘은 그렇게 강력할 수가 없다. “공이 나한테 올 때 (어찌나 천천히 오는지) 밥을 먹고 나서도 아직 안 올 때가 많다. 그래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수우주식’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구헌 날 기다리지 못하고 너무 빨리 라켓을 휘두르고 마는 나와, 공이 너무 늦게 와서 기다리기가 지루하다는 관장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직 하나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매번 자기 한계를 넘는 고된 훈련과 연습, 수없이 많은 경기의 경험이 수우주식하는 그를 만들어낸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나를 타인에 맞추는 것

그런데 수우주식은 단지 연습에 의해, 기다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기의 필요에 의해 자신의 일의 속도에 맞춰 다른 사람을 강제할 때, 일은 그르치게 된다. 실제로 수우주식은 기다리기는 기다리되 술과 음식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태도를 말한다. 온전히 기다림 자체를 즐겨야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여유로운 모습이다.

 

얼마 전에 필립 로스의 소설 『미국의 목가』를 읽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주인공 스위드는 거대한 부와 명성, 미모의 아내와 사랑스런 딸을 모두 가진 성공한 유태인 이민 3세였다. 그런데 그 딸이 말을 더듬는다. 온갖 치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룬 꿈의 작은 흠집같은 딸의 말 더듬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다. 스위드와 그의 아내는 딸의 말더듬는 버릇을 고치라고 다그친다. 세상에 대한 앎에 눈을 뜬 딸은 그런 잘난 부모의 기대와는 반대로 극단적인 테러를 저지르고 사라진다. 스위드는 도저히 딸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꿈꾸던 목가는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틀 안에서 딸을 기다린다.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 나는 한동안 부모를 부정하려 애썼던 딸의 모습이 겹친다고 느꼈다. 딸을 위해 일찍 다니라는 말을 했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대학을 가라고 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딸은 내 말을 아예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진보정당에 들어갔고 운동권 친구들과 어울렸다. 나를 ‘맘충’으로 여겼고, 현실의 이익에 집착하는 천박한 부모로 몰아세웠다. 대화는 두 세 마디를 이어가지 못하고 충돌로 끝이 났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저 딸이 방긋거리며 다시 다가오기를 바랬다. 시간은 무르익었고 그때의 먹구름 낀 시간을 이제는 웃으며 안주거리 삼는 때가 됐다. 여전히 수상한 철학공부를 하고 있고, 불온해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리지만, 딸은 활기있고, 자주 웃으며, 때려친다던 대학의 졸업반에 다니고 있다. 일단 해피앤딩이다. 무엇이, 어떤 기운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한 일은 별게 없다. 속상하고 눈물이 나도 ‘저 애도 나처럼 속상하고 눈물이 나는 시간을 보내겠거니’ 하며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의 일상을 보낸 것 뿐이다. 내가 강제로 관계를 끊으라고 다그쳤다면 깊어진 딸과의 감정의 골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았을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요체는 믿음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을 하고, 타인의 속도에 나를 맞춰 기다리는 것이 과연 수우주식일까? 수우주식의 태도가 기다리는 시간의 길이만을 의미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괘가 말하는 기다림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랜 노력의 시간, 괴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 기다림에는 ‘시간의 길이’ 즉, 양적인 것만을 생각했을 때는 발견하지 못하는 ‘계산불가능한’ 무엇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가치이다. 집단 조급증은, 기다리는 시간이 효율성에 입각해 순삭되어 가는 과정에서, 믿음을  잃어버려 생긴 부작용이다. 수우주식은 바로 시간의 양(量)을, 훨씬 차원높은 질(質)로 바꾸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결국 탁구장 관장이 게임에서 상대를 여유있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훈련으로 얻어낸,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같은 자기확신은 때로 지나친 자기고집으로 넘어갈 수 있으므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올바르도록 늘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수우주식 정길(需于酒食 貞吉)'에서 말하는 '정길(貞吉)'은 바로 이런 뜻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은 물론, 다른 사물과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나와 다른 존재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절대 똑같은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 가운데에서 생기는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계 맺기가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타협’차원에서 이 차이를 받아 넘긴다. ‘믿음’은 이것보다 훨씬 세심하고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일상은 이 믿음을 키워내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밭의 역할을 한다. 매일매일 기다리는 삶 속에서 믿음을 쌓아올리는 실천이 필요하다.  ‘수우주식 정길’은 바로 ‘비를 기다리는 시간’, ‘믿음을 키워내는 시간’을 되찾으라는 메시지이다.

 

댓글 8
  • 2021-07-26 13:56

    드디어 봄날샘의 주역이야기가 시작되었네요

    시작이 기다림의 괘인 것도 의미심장한듯요^^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비가 올때까지 지낸다고 하죠 

    어쩌면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들이 함께 모여 그 시간과 과정을 공유하는게 기우제였던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기우제는 실패할수 없는 의식이죠

    기우제를 지내면 늘 비가온다!!!

    요즘 저도 기다리는거 잘못해서 괴로움을 스스로만들고 있는데 수우주식하면서 타인의 시간에 맞추기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봄날샘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봅니다^^

     

  • 2021-07-26 14:19

    기다림이라...요즘 듣기 어려운 말이라 더 귀에 잘 들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1-07-26 15:02

    수우주식! 멋진말이군요 기다림 그리고 믿음^^

  • 2021-07-26 15:43

    ‘일정함이 이로우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뭐든 후딱 성과를 내려는 저에겐 이 말도 와닿습니다! 꾸준하게 미미하게 해봐야겠다고 뭘 좀 마음먹은 차에 만난 괘네요!

  • 2021-07-26 18:07

    '타협'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훨씬 더 적극적인 실천이 저의 일상에서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생각해봅니다..

    시크하고 쿨하게 넘기는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곱씹으며 때론

    미움의 감정속으로 때론 복수의 감정속으로

    나를 가두지 않는것..

    음ᆢ나의 감정에 시간을 내어주고 기다려주는것 부터 시작해야 될것 같습니다

    봄날샘~잘 읽었습니다!

  • 2021-07-27 06:37

    요즘은 매우 액티브한 시대라 기다림은 수동적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처음 수괘를 읽을 때 그렇게 읽었었는데, 물론 그런 기다림도 좋았습니다.

    이번 시즌에서 다시 읽은 수괘의 기다림은 그 자체가 액티브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다린다'는 것은 밥을 먹는다와 같은 부류의 행위를 뜻한다면?

    기다림이 주역 최고의 철학을 함축하고 있는 이유가 되겠지요.

    기다림은 그 자체 액티브한 한 일이라는 것, 그 어려운 이야기를 봄날쌤이 잘풀어주셨네요.

    다음 글 기다리게 되네요 ㅎㅎ 

     

  • 2021-07-28 18:24

    최선을 다 하면서 기다리자!

  • 2021-08-05 10:59

    기다림의 괘! 성격습한 저에게 어려운 과제이지만 더 맘속에 넣고,.. 자꾸 뛰쳐나가고싶은저에게, 육아에서도 여러모로 필요한괘인듯싶습니다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다음글도 기대됩니다^^

봄날의 주역이야기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우리 사무실은 한 사람의 후원자 A씨가 거액의 전세 보증금을 빌려준 덕에 월세 없이 5년여를 버텨왔다. 그런데 그 후원자가 그것을 돌려받고 싶어했다. 실은 이런 뉘앙스의 말을 일년 전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월세가 얼마가 되었건 새로운 고정지출을 만드는 건 회사 운영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체 해왔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동네서점’을 지향하며 청년 중심으로 운영되는 서점의 관리자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서점이 0월말로 전세기간이 만료돼요. 조금 더 공간이 크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생각인데...혹시 함께 공간을 얻을 생각이 있으신지요?”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입밖에 낸 적도, B씨와 논의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제안에 끌렸다.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A씨에 대한 부채를 해결하고픈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공간을 함께 나누면 월세의 부담도 덜고, 초기 위험부담도 적어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덜컥 동의를 해버렸고, 하루 이틀 사이에 신축건물 2층 공간을 발견하고, 며칠 사이에 월세계약까지 해치워버렸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수순처럼 나의 결정은 거침 없었다.   택천괘(澤天夬)는 바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가리킨다. ‘결단하다’, ‘결정하다’의 뜻을 가진 쾌(夬)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에 끼는 깍지나, 깍지를 낀 손의 형상에서 나왔다. 활은 쏘아 맞히는 도구이고, 시위를 당긴 화살은 언젠가는 쏘아야 한다. 쾌괘는 목표를 겨누었다가 깍지를 풀어놓는 그 순간의 상황이다. 겨눌 만큼...
봄날 2024.01.08 |
조회 277
봄날의 주역이야기
다섯 달 동안 주역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발표회를 치렀다. 준비하면서 이번엔 좀 색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에세이를 발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퍼포먼스나 전시같은 형식을 택했다. 나도 몇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민화를 이용해 주역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8개의 소성괘를 민화기법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민화로 주역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민화 작품이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태극모양이거나 3획의 검은색 막대그림은 주역을 아는 사람에게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러니까 8개의 소성괘가 가진 물상을 그린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할만한 것이 없다는 아쉬움과 함께 나야말로 소성괘의 물상을 제대로 그려보리라는 욕심도 생겼다.   하늘, 땅, 연못, 번개(우레), 불, 물, 산, 바람의 물상을 가진 소성괘를 가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하늘을 그냥 파랗게, 땅을 그냥 황토색으로 칠하는 것은 소성괘를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산, 번개 등을 형상화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람’을 뜻하는 손괘(巽卦)를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바람은 기체의 움직임 자체이니 육안으로 볼 수는 없고, 불거나 멈추는 데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발생과 소멸 또한 예측할 수 없다. 형체없는 자연물의 형상화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다가 마침 손괘에 배속된 자연물에 나무도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나무에 이는 바람’을 그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바람을 다시 보게 됐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다섯 달 동안 주역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발표회를 치렀다. 준비하면서 이번엔 좀 색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에세이를 발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퍼포먼스나 전시같은 형식을 택했다. 나도 몇 달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민화를 이용해 주역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8개의 소성괘를 민화기법으로 그려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민화로 주역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민화 작품이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태극모양이거나 3획의 검은색 막대그림은 주역을 아는 사람에게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러니까 8개의 소성괘가 가진 물상을 그린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할만한 것이 없다는 아쉬움과 함께 나야말로 소성괘의 물상을 제대로 그려보리라는 욕심도 생겼다.   하늘, 땅, 연못, 번개(우레), 불, 물, 산, 바람의 물상을 가진 소성괘를 가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하늘을 그냥 파랗게, 땅을 그냥 황토색으로 칠하는 것은 소성괘를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산, 번개 등을 형상화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람’을 뜻하는 손괘(巽卦)를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바람은 기체의 움직임 자체이니 육안으로 볼 수는 없고, 불거나 멈추는 데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발생과 소멸 또한 예측할 수 없다. 형체없는 자연물의 형상화 때문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다가 마침 손괘에 배속된 자연물에 나무도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나무에 이는 바람’을 그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바람을 다시 보게 됐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봄날 2023.11.12 |
조회 208
봄날의 주역이야기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쌀벌레가 나타나야 쌀이 상한 것을 안다 십년이 넘도록 함께 웃고 지내던 동아리에 일이 생겼다. 표면적으로는 멤버 중 몇몇의 술이 과해서 벌인 쌈박질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동아리 내에서 묵혀두었던 ‘과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십갑자가 넘은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과,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욕설을 몇 번 주고받던 사람들이 급기야 의자를 집어던지고 주먹다짐을 하고 말았다. 장수하는 동아리로, ‘성격 좋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었는데, 비록 술기운을 빌렸다고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상처가 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십년의 우정은 어디로 가고, 곪을대로 곪아버린 관계만이 드러났다. 그것은 주역의 18번째 괘인 산풍고(山風蠱)괘가 형상화한 ‘벌레먹은 그릇’, 바로 그것이었다.   괘명인 고(蠱)라는 한자는 그릇(皿) 속에 많은 벌레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벌레의 종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이때의 벌레는 쌀에서 생겨나는 바구미 같은 류를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좀 오래된 쌀독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구미처럼, 우리는 벌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쌀이 상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구미가 튀어나온 순간, 일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고, 시선은 쌀에서 벌레로 옮겨간다.     산 아래 머무는 바람이 하는 일 이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텐데, 64괘가 배열된 차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측면이 있다. 산풍고괘는 18번째 괘인데, 16번째 괘는 ‘기쁨’을 나타내는 뇌지예(雷地豫)괘이고, 17번째는 ‘남을 따른다’는 뜻을 가진 택뢰수(澤雷隨)괘이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따르는...
봄날 2023.07.04 |
조회 28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澤)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澤)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봄날 2023.04.22 |
조회 363
봄날의 주역이야기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친구가, 자기가 직접 심어 싹을 틔웠다며 작은 아보카도 화분을 하나 주었다. 단단한 아보카도 씨앗 한가운데가 쩍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싹이 나고 줄기가 한 뼘만 한 길이로 자라나 있었다. 친구의 말로는 아보카도는 싹을 틔우기가 어렵지, 한번 싹이 나오면 쑥쑥 잘 자랄 것이니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다고 한다. 씨앗에서 싹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이 식물은 얼마나 힘든 고난을 견뎌냈을까.   만물의 시작, 수뢰둔괘 주역 64괘의 세 번째인 수뢰둔(水雷屯)괘는 주역에서 시간과 공간이 열린 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와 땅을 뜻하는 곤괘(坤卦)의 다음에 나오는 괘가 바로 둔괘이다. 서괘전에서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다”고 했으니 둔괘는 하늘과 땅이 열리고 난 후 바야흐로 사물들이 생겨나기 이전, 혼돈(chaos)의 세상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우주생성의 드라마 현장이다. 원시지구의 대기상황처럼 둔괘의 상괘는 물이고, 하괘는 우레이다. 천지가 검은 먹구름으로 꽉 차있고 순간순간 그 속에서 ‘번쩍’하며 천둥과 번개가 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때. 둔괘는 크건 작건 모든 시작에서 만나는 고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우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 또 언제 닥칠지 예감하는 것이 어렵고, 실천하는 것이 또 어렵다. 주역의 대표적인 난괘인 둔괘는 그 어려움이 바로 ‘시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다른 난괘와 비교된다. 주역이 말하는 시작의 어려움은 과연 무엇이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판단하기 어려우면...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친구가, 자기가 직접 심어 싹을 틔웠다며 작은 아보카도 화분을 하나 주었다. 단단한 아보카도 씨앗 한가운데가 쩍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싹이 나고 줄기가 한 뼘만 한 길이로 자라나 있었다. 친구의 말로는 아보카도는 싹을 틔우기가 어렵지, 한번 싹이 나오면 쑥쑥 잘 자랄 것이니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다고 한다. 씨앗에서 싹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이 식물은 얼마나 힘든 고난을 견뎌냈을까.   만물의 시작, 수뢰둔괘 주역 64괘의 세 번째인 수뢰둔(水雷屯)괘는 주역에서 시간과 공간이 열린 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와 땅을 뜻하는 곤괘(坤卦)의 다음에 나오는 괘가 바로 둔괘이다. 서괘전에서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다”고 했으니 둔괘는 하늘과 땅이 열리고 난 후 바야흐로 사물들이 생겨나기 이전, 혼돈(chaos)의 세상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우주생성의 드라마 현장이다. 원시지구의 대기상황처럼 둔괘의 상괘는 물이고, 하괘는 우레이다. 천지가 검은 먹구름으로 꽉 차있고 순간순간 그 속에서 ‘번쩍’하며 천둥과 번개가 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때. 둔괘는 크건 작건 모든 시작에서 만나는 고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우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 또 언제 닥칠지 예감하는 것이 어렵고, 실천하는 것이 또 어렵다. 주역의 대표적인 난괘인 둔괘는 그 어려움이 바로 ‘시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다른 난괘와 비교된다. 주역이 말하는 시작의 어려움은 과연 무엇이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판단하기 어려우면...
봄날 2023.02.27 |
조회 382
봄날의 주역이야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 이제는 전세계적인 놀이가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가 이 문장을 말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은 전력질주 하다가 즉시 멈춰야 한다. 이때 앞으로 나가는 관성을 막지 못하고 움직이면 지게 된다. 움직임과 멈춤 사이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이 놀이의 관건이다. 난괘 중의 난괘로 꼽히는 수산건(水山蹇)괘의 상황이 꼭 이렇다. 마구 앞으로 달려 나가도 안되지만, 그저 멈춰 있기만 해도 패한다. 만약 사업을 하거나, 이성을 만나거나, 어떤 큰 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점을 쳐서 수산건괘를 얻었다면, 당장 그 일을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그만큼 수산건괘는 어떤 일을 강행하는 것이 어려운 때임을 강조한다. 이 어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수산건(水山蹇), 앞으로 가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라 주역에서 ‘물’은 험함, 고난의 상징이다. 그래서 주역의 괘 중에 ‘안좋은 괘’ ‘어려운 괘’라고 불리는 괘에는 항상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들어있다. 수산건괘도 상괘가 감괘이다. 위는 물, 아래는 산이 놓여 있는 형상의 수산건괘는 높은 산을 간신히 넘었는데, 다시 물을 만나는 고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앞은 험한 강이고, 뒤는 내가 넘어온 산이 있으니,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   괘의 순서로 볼 때 수산건(水山蹇)괘는 화택규(火澤睽)괘의 다음에 나온다. 주역 64괘를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서 해석하는 서괘전은 “규(睽)는 어긋남이니 어긋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수산건괘(蹇卦)로 받았다”고 말한다. 규는 ‘사팔눈’처럼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반목하는 형상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 이제는 전세계적인 놀이가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가 이 문장을 말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은 전력질주 하다가 즉시 멈춰야 한다. 이때 앞으로 나가는 관성을 막지 못하고 움직이면 지게 된다. 움직임과 멈춤 사이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이 놀이의 관건이다. 난괘 중의 난괘로 꼽히는 수산건(水山蹇)괘의 상황이 꼭 이렇다. 마구 앞으로 달려 나가도 안되지만, 그저 멈춰 있기만 해도 패한다. 만약 사업을 하거나, 이성을 만나거나, 어떤 큰 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점을 쳐서 수산건괘를 얻었다면, 당장 그 일을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그만큼 수산건괘는 어떤 일을 강행하는 것이 어려운 때임을 강조한다. 이 어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수산건(水山蹇), 앞으로 가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라 주역에서 ‘물’은 험함, 고난의 상징이다. 그래서 주역의 괘 중에 ‘안좋은 괘’ ‘어려운 괘’라고 불리는 괘에는 항상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들어있다. 수산건괘도 상괘가 감괘이다. 위는 물, 아래는 산이 놓여 있는 형상의 수산건괘는 높은 산을 간신히 넘었는데, 다시 물을 만나는 고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앞은 험한 강이고, 뒤는 내가 넘어온 산이 있으니,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   괘의 순서로 볼 때 수산건(水山蹇)괘는 화택규(火澤睽)괘의 다음에 나온다. 주역 64괘를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서 해석하는 서괘전은 “규(睽)는 어긋남이니 어긋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수산건괘(蹇卦)로 받았다”고 말한다. 규는 ‘사팔눈’처럼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반목하는 형상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봄날 2022.11.10 |
조회 394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