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4회] 백이숙제, 원망이 없었을까

진달래
2022-02-13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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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 「술이,14」 중

 

백이숙제 이야기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들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맏이인 백이가 아니라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 이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도망을 갔다.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도망을 가, 결국 고죽국 사람들은 중간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고죽국을 나온 두 사람은 서쪽의 서백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백창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막 은(殷)나라의 주(紂)왕을 치러 갈 참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이에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효(孝)라 할 수 없습니다. 신하의 신분으로 군주를 치러 가는 것은 인(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무왕의 곁에 있던 신하들이 그 둘을 죽이려고 했다. 이 때 강태공이 말리며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義人)이다.”

전쟁에 나간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천하의 사람들이 주나라를 따랐지만 백이와 숙제만이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들은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살다 굶어 죽었다.『사기열전』「백이열전」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첫 번째 편인 「백이 열전」 속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이다. 자기들의 뜻을 지키기 위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이후 지조 있고 청렴한 선비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논어』에서는 이들을 일민(逸民/벼슬하지 않은 은자)으로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不降其志 不辱其身)’「미자,8」이라고 칭했으며, 맹자는 이들을 ‘청렴한 성인(聖之淸者)’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사육신인 성삼문도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라는 시조로, 백이숙제를 빗대어 단종에 대한 지조와 충절을 노래한 바 있다.

 

원망하는 백이

 

한편 백이숙제는 ‘원망(怨)’과 관련해서도 유명한데 이는 공자가 백이숙제에 대해 “무엇을 원망했겠는가(又何怨)”라고 한 말에 사마천이 의문을 달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지나간 원한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라고 했고, “인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공자는 백이숙제가 원망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사마천은 “나는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으로 본다.(余悲伯夷之意)”며 그들에게 원망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전거로는 당시 민간에서 돌고 있었던 채미가(採薇歌)를 들었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우·하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徂兮 命之衰矣) 『사기열전』 「백이열전」

 

사람들은 이러한 사마천의 질문이 그가 궁형(宮刑)을 당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사마천은 한창 『사기』를 집필 하던 중, 흉노 정벌에 패한 이릉장군의 편을 들어 한 마디 했다가 한(漢)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죽을 위기에 놓였었다. 당시 그는 세 가지 형벌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었는데 첫째 법에 따라 사형을 당하는 것, 둘째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하는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50만 전이라는 큰돈을 마련할 수 없고, 『사기』를 끝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었다. 죽음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궁형을 택했다.

그러니까 「백이 열전」을 통해 사마천이 이렇게 묻는 듯하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고 하였는데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왜 굶어죽고, 나는 또 왜 궁형을 당했을까? 정말 백이숙제에게 원망이 없었을까?

 

 

원망이 없는 백이

 

공자가 55세가 되던 해, 그는 제자들과 함께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에 갔다. 위 영공(靈公)을 만나 곧 등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영공은 그를 귀인으로 대접해 주기만하고 끝내 등용하지는 않았다. 노나라를 떠난 지 4년이 되던 해, 영공이 죽었다. 영공의 손자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출공(出公)이었다. 아마도 이때 공자와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위나라에서 등용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출공의 아버지, 그러니까 영공의 아들인 괴외, 그는 이전에 영공에 의해 쫓겨나 진(晉)나라에 가 있었다. 출공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공의 아들인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며 위나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 쫓겨났기 때문에 군주의 자리에 올릴 수 없다고 여겼고, 아들인 출공 역시 아버지의 귀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런 위나라의 상황 속에서 제자 염유가 공자의 거취를 궁금해 했다.

 

염유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위나라 임금을 도우실까?”

자공이 말했다. “글쎄, 내가 이제 물어 볼께.”

자공이 들어가 공자께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현인이시다.”

“원망했을까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

자공이 나와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돕지 않으실 것야.”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술이,14」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백이숙제에 대한 공자의 평은 이렇게 위나라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백이는 아버지가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아버지의 명’이라 하여 나라를 떠났다. 또 숙제는 형을 쫓아내고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천륜(天倫)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하여 나라를 떠난다. 이 두 사람의 행동은 효제(孝悌)를 따른 것으로, 공자는 이것을 “인(仁)을 얻고자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나라의 상황과 연결해 보자. 출공과 그의 아버지 괴외는 지금, 서로 왕이 되겠다고 권력다툼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자리를 빼앗으려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귀국을 막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않고, 아들은 아들답지 않다. 공자는 정치는 곧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正名)’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자공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을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무슨 원망이 있었겠는가?”는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했던 일이 인(仁)을 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망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주자는 주에서 원망(怨)을 후회(悔)로 풀었는데, 따라서 이들이 자기가 옳다고 여긴 가치관에 따라 행동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사마천은 왜 그들이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을까? 이는 사마천이 공자와 달리 그들의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이라는 것, 이는 공자와 다른 맥락에서 백이숙제를 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오히려 바르게 살았음에도 굻어 죽을 처지에 놓인 것에 대해 정말 한 번도 후회하지 않고, 누구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사마천은 백이숙제의 마음, 즉 슬픔(悲)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원망이 없을 수야

 

‘지조 있고 청렴한 선비로서의 백이숙제’ 보다는 ‘원망하는 백이숙제’의 모습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아무리 자기의 신념에 따라 선택한 일이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곤궁한 처지에 놓인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겠느냐?”고 말한 공자보다 백이숙제에게 원망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마천의 말이 더 실감나게 느껴진다. 또 사마천의 물음 “백이숙제와 같이 착한 사람이 왜 굶어 죽어야 하는가?”를 보면 어떻게 원망이 없을 수가 있냐고 나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공자가 백이숙제에 대해 한 말을 곱씹어 보니 한편으로 이 말도 이해가 가는 듯하다.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을 정말 열심히 하고 난 뒤, 그 일이 혹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후회 없어!”라고 말 할 때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어떤 일에 여지를 남기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만족함을 느낄 때,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원망을 멀리해야 한다고 했는데 원망이 꼭 나쁘기만 할까? 어떻게 보면 사마천이 쓴 『사기』가 단순한 역사책 이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은 궁형이 오히려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처럼 자식을 가슴에 묻고도 원망을 개인적인 원한으로 남기지 않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힘쓴 분들도 계시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은 ‘원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사마천의 이야기에서도, 공자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인 것 같다. 자신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일은 하지 않는 것, 혹은 옳다고 생각한 일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 원망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원망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댓글 3
  • 2022-02-14 08:55

    어떤 사태를 해석하는 입장에서 원망은 피해갈 수 없는 난제네요^^ 공자에게도 사마천에게도 그리고 우리도^^ ㅋ

  • 2022-02-14 13:11

    삶의 태도라.....? 다른 질문을 해보게 하는 글이네요

  • 2022-02-15 08:29

    백이숙제를 열전의 맨 앞에 배치한 사마천의 공감은 그렇다치고

    공자님의 진퇴를 가늠하기 위해 백이숙제에 대해 물어본 자공을 보건대 공자님도 백이숙제에게 공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듯해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슨 원망이 있으랴!!!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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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4.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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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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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3.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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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91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52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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