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1회] 안자, 사람을 잘 사귄다는 것

진달래
2021-07-2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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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제자들이 아닌 『논어』 속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공자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 작은 궁금증으로 <논어 카메오 열전>을 시작합니다. 

 

 

『논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 혹은 옛날 현인(賢人), 성왕(聖王) 등등이 있다. 공자는 이들에 대한 다양한 평을 논어에 남겼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물평은 대체로 제자들과의 강학(講學) 과정에서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소회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사교성 좋은 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공야장」, 16

 

안평중은 우리가 흔히 안자(晏子)라고 알고 있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영(嬰)이고 자가 평중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500년으로 공자(孔子/기원전 551~기원전 479)보다 50세 정도 많다. 『안자춘추』라는 책이 남아 있는데 안자가 쓴 것은 아니고, 안자의 언행을 모아서 후대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 안자를 소개하면서 “만약 안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를 위해서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할 정도로 나는 안자를 흠모하고 있다.(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고 평했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를 이야기 할 때 관중과 제환공을 예로 드는데 안자와 제경공도 그에 못지않게 본다. 그러니까 안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명망이 높았던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논어』에는 안자에 대해 이렇게 단 한 줄의 평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평도 ‘남과 사귀기를 잘한다.’라니, 지금으로 치면 ‘사교성이 좋았다.’ 뭐 이런 뜻일까? 사마천과 비교하면 공자의 이 한 마디는 너무 박한 평가인 듯 보인다. 혹시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안자가 그의 등용을 막은 적이 있었다는데 그것이 서운했던 건 아닐까?

공자가 30대에 노나라 소공이 당시 권력자였던 세 가문과 맞서다, 쫓겨난 사건이 있었다. 소공이 쫓겨나 제나라로 갈 때 공자도 노나라의 이런 무도한 상황을 한탄하며 제나라로 갔다. 이 때 제나라 군주였던 경공을 만났는데 경공이 공자가 마음에 들어 바로 등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를 안자가 반대했다고 한다. 요지는 공자가 주장하는 예법은 너무 세세하여 다 배울 수도 없고, 제나라의 풍습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경공은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자가 안자의 어떤 면을 보고 이런 평을 남겼는지가 궁금하다. 게다가 그냥 사람을 잘 사귄다가 아니라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지. 『논어집주』를 보면 주자는 정자(程子)의 말을 빌려 “사람은 사귀기를 오래하면 공경이 쇠해지니, 오래되어도 공경함은 사귀기를 잘함이 되는 것이다.(人交久則敬衰 久以能敬所以爲善)”라고 주를 달았다. 이렇게 보니 이 문장의 포인트는 ‘오래되어도 그를 공경하는구나(久而敬之)’인 듯하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안자를 공경했다고 볼 수도 있고 안자가 사람들을 공경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의미상 별 차이가 있진 않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관계 속에서 서로 공경한 태도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니 공자가 안자에게 한 이 말이 달리 보인다. 나는 사람을 잘 사귄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과 잘 지내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사람을 잘 사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키가 작고 생김새가 볼품없었다고 한다

 

대부들의 시대

 

안자와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시대 말기는 ‘하극상의 시대’라고 불릴 만한 때였다.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는 쇠퇴하고 제후국들이 서로 다투며 패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제후국 안에서는 귀족인 대부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실질적인 권력이 제후가 아닌 그들의 집안에서 나왔다. 당시 대부들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안자는 진(晉)나라 대부 숙향과 만났을 때 제나라의 앞날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전씨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전씨는 비록 천하에 큰 덕을 행하지는 못하였지만, 공공의 권력을 사사로이 행사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그들을 좋아합니다.(齊政卒歸田氏。田氏雖無大德,以公權私,有德於民,民愛之)” 『사기』 「제태공세가」

 

제나라의 상황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숙향 역시 진나라가 얼마가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다.

 

“진나라는 현재 쇠하는 시기입니다. 주군은 조세를 많이 거두어 누대나 연못을 만들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서 정사는 마침내 사가(私家)들의 문(門)에서 나오고 있으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소?(晉,季世也。公厚賦為臺池而不恤政,政在私門,其可久乎!)” 『사기』 「진세가」

 

이런 사정은 제나라와 진나라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비슷했다. 『논어』에도 ‘삼환’이라는 세 대부들이 노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나라는 안자의 예상대로 후에 군주의 자리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바뀌게 되고, 진(晉)나라는 대부들의 다툼으로 나라가 망하고 조(趙), 위(魏), 한(韓)의 세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었다.

안자는 영공, 장공, 경공의 세 군주를 모셨다. 이 중 장공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를 당했다. 장공이 최저의 집에서 죽었는데 신하들은 최저가 무서워 장공의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장공의 이복동생을 경공으로 옹립한 후, 최저는 신하들에게 “최씨와 경씨를 돕지 않는 자는 죽는다!(不與崔慶者死)”라고 맹세하도록 시켰다. 이런 일들은 당시 대부였던 최저의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그런 최저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최저는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경봉에게 죽임을 당하고 경봉도 그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최저와 같은 세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군주의 힘이 세진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대부들의 힘이 군주를 넘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최저에게서 또 다른 최저로 넘어 간 것일 뿐이었다.

경공이 재위하던 시기에 제나라에는 고씨, 국씨, 포씨, 전씨와 같은 대부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고, 언제 또 최저가 장공을 시해한 일과 같은 사건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대부들은 이익 앞에서 서로 연합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하면서 힘을 겨루고 있었다. 경공의 재위 기간 중 제나라는 제환공의 시대를 넘볼 정도로 안정된 듯 보였지만 사실 경공의 자리는 늘 불안했다. 그럼에도 경공이 58년 동안 별 탈 없이 군주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안자가 그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되어도 공경한다

 

안자는 경공 즉위 후 48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경공은 당시 대다수 군주들이 그러했듯이 그다지 능력 있는 군주는 아니었다. 『안자춘추』에 보면 그는 사치스러웠고,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사냥하는 것 좋아하는, 한 마디로 놀고먹는 거 좋아하는 군주였다. 그럼에도 제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안자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고 대체로 그의 의견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8년이나 경공의 최측근으로 있었던 안자의 권세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고, 경공과의 관계도 각별하지 않았을까?

경공이 술을 마시다 밤중에 안자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안자는 경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복(公服)으로 갈아입고 경공을 문에서 맞았다. 그리고는 이웃나라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나라 안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인지 물었다. 경공이 그저 좋은 술과 음악이 있어서 함께 즐기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안자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리를 깔고 술그릇을 마련해 드리는 일은 따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감히 그런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夫布薦席,陳簠簋者,有人,臣不敢與焉)” 『안자춘추』

 

어느 날, 경공이 좀 추웠는지 곁에 있던 안자에게 옷을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안자는 자기는 수발을 드는 신하가 아니라서 가져다 드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경공의 입장에서 보자면 군신관계를 떠나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부탁을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면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안자는 공적인 관계 외에 경공과의 자리를 피했다. 사람이 오래 함께 지내다보면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친하다고 여기지만 안자는 경공과 오랫동안 함께 했음에 군신의 예를 넘지 않았다. 안자는 오래된 사람과의 사이에서 공경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자가 이렇듯 군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평소 생활에서 드러난다. 안자는 당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늘 가난했다. 그는 자기의 녹봉을 집안사람들과 나누어 썼고, 아내에게 비단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밥도 늘 모자란 듯이 먹었다고 한다. 이에 경공이 그의 녹봉을 올려 주려고 할 때 안자는 집안 식구들과 나누어 쓰기에 모자라지 않다며 거절했다. 안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 지위에도 연연하지 않았는데 경공이 무리한 일을 시키면 바로 그만두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안자를 보통의 대부들은 대부분 불편해했다. 그러나 재물이나 지위와 같은 것으로 매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안자는 백성들에도 신망이 높았다. 안자가 저잣거리의 허름한 집에 사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 경공이 안자에게 새로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안자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경공은 안자가 사신으로 다른 나라에 가서 없는 틈을 타, 주변의 집을 헐고 큰 집을 지었다. 안자가 돌아와 이것을 보고 다시 그 큰 집을 헐어 땅을 원래 살던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런 안자였기 때문에 최저는 장공을 시해 했을 때 그의 집에 찾아와 장공의 시신에 예를 다하고 간 안자를 죽이지 못했다. 제나라의 다른 대부들도 그를 탐탁히 여기지는 않았지만 내치지는 못했다. 경공도 안자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공경했다’는 것은 이런 안자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사귀기를 잘한다

 

이천 선생이 말하였다. “근래 세상이 천박하여 서로 즐기며 친압하는 것을 허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규각이 없음을 서로 즐기고 사랑하는 것인 양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이 하면서 어찌 능히 관계를 오래 지속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오래 지속시키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공경으로 해야 한다. 군신붕우의 관계가 모두 의당 경을 위주로 해야 하는 것이다.(伊川先生曰 近世淺薄 以相歡狎爲相與 以無圭角爲相歡愛 如此者安能久 若要久 須是恭敬 君臣朋友 皆當以敬爲主也)” 『소학』, 「광명륜」

 

이렇게 보니 공자가 안자에 대해 평한 “남과 잘 사귄다.”는 것이 단순히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또 공자는 사람들과 사귐에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안자에 대한 평에 주를 달았던 송대의 정이천(程子)도 사람들과의 사귐에 있어서 공경함이 없다면 그 관계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거기에 ‘규각이 없다’는 것은 서로 두루뭉술하게 지내는 것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를 이른다. 당대의 사람들이 서로 즐겁게 지내는 것만을 좋아하여 허물없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과 조금이라고 불편한 일이 생기는 것을 꺼려해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귐이 예의를 차리는 것이고, 이것이 ‘경(敬)’의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을 수 있으려면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敬)’을 ‘집중’이라는 의미로 보면 그저 거리를 두는 것으로 ‘잘 사귄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불편한 상황까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조심하고, 때로는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하면서도 사귐의 깊이를 넘지 못하고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인 듯하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이 듣기 싫은 말까지 해가며 조언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잘 사귀는 것’인지 늘 헷갈린다.

한편, 안자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람을 잘 사귀는 것은 내가 누구와 어떻게 사귀느냐 이전에 자기 삶에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 것 같다. 공경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 자기를 낮추고 늘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자리가 올라가거나 돈이 많아지거나 하면 교만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반드시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만 그럴까? 평소에도 우리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가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에 무조건 수긍하는 것이 겸손한 태도일까? 자기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나 일관된 태도를 잃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다른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안자에 대한 공자의 평이 너무 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사마천의 칭송에 버금가는 문장인 듯하다. 그나저나 ‘남과 잘 사귄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댓글 7
  • 2021-07-24 07:35

    논어 글쓰기 출발을 경축합니다~~~~~짝짝짝

    '오래'의 내용인즉슨 敬의 효과다~~ 이 말씀^^?  敬의 태도는 집중에서 드러난다는 것이고^^

    사람과 사귐뿐 아니라^^ 논어와 오래한 진달래님이 집중했던 시간도 있네요^^

    <논어 카메오 열전>에서 진달래님과 논어의 오랜 사귐의 향연을 기대하겠습니다~~~ 화이팅^^

  • 2021-07-24 08:21

    와...시작했군요.

    재밌을 것 같아요. 두근두근 기다릴게요^^

  • 2021-07-24 09:12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논어 속 등장인물의 이야기와 지금 우리의 고민을 잘 엮은 진달래샘의 이야기!!

    쏙쏙 들어오네요~ㅎㅎㅎ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만땅입니다~~^^

  • 2021-07-24 10:51

    주연을 넘어 조연까지!

    이런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가 숨어있는 보물같은 논어네요.

    다음 인물은 누구일까 기다려집니다^^ 

  • 2021-07-25 07:49

    맞아요!! 사람과 잘 사귄다는 일 넘 어려운 일이에요!!

  • 2021-07-26 07:01

    그러게요 '경'의 태도로 사람을 사귀는 건 정말 쉽지 않네요.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조건 수긍하는 것도 아니고...

    새삼 안자가 대단해보입니다..!

  • 2021-07-29 07:10

    사람 사는 일이 사귐이 처음이자 끝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군요

    쭈욱 힘있게 글써주세요^^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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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24.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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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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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407
논어 카메오 열전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93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56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공자께서 계씨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 집 뜰에서 팔일무(천자 앞에서 추는 춤)를 추니 이런 일까지 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팔일, 1」   공자가 살던 당시에 노(魯)나라에는 삼환(三桓)이라고 부르는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 환공(桓公/前712~前694)의 후손들로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 집안을 이른다. 맹(孟), 숙(叔), 계(季)는 형제들의 순서를 말하는 것으로 맹은 맏이, 숙은 둘째, 계는 막내의 뜻이다. 어찌 보면 한 집안 사람들인 이들은 때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도와가며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공자 당대의 군주였던 소공(昭公/前542~前510)은 계씨를 정벌하려다 오히려 삼환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러한 상황을 도(道)에 어긋난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진 것도 이렇듯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서라고 생각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 그래서 공자는 정치는 무릇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논어』에 등장하는 삼환은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팔일무(八佾舞)는 천자가 연회를 베풀 때 추는 춤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춤의 종류나 춤을 추는 무희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 흔히 팔일무는 여덟 명씩 여덟 줄을 맞추어 총 64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래로 무희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제후는 육일무(六佾舞), 대부는 사일무(四佾舞)를 출 수 있었다. 계씨는 대부이므로 예(禮)에 맞게 하려면 사일무를 추어야 했다....
진달래 202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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