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시즌1 에세이#2_그릇된 욕망의 날갯짓

수수
2021-05-02 15:12
222

그릇된 욕망의 날갯짓

 

 

글 : 수수

 

 

 

 

 

 

 

 

 

 

 

 

 

1. 누가 니나를 죽였나

 

금요일 저녁이다. 오늘도 문탁 2층에 간다. 띠우님, 청량리님, 토토로님, 재하군 모두 모여 있다. 오늘 영화는 벌써 상영 중이다. 내가 조금 늦었나? 아무도 내가 들어 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영화에 몰두해 있다.

영화는 '블랙스완'의 주인공 니나의 죽음을 둘러싼 취조가 진행 중이었다. 형사는 용의자들에게 차례로 질문한다. 먼저 니나의 엄마이다. 무언가 억울함이 가득한 니나의 엄마. 울먹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제가 니나를 죽였다구요? 정말 억울해요. 니나는, 니나는 제 삶의 이유였어요. 니나가 없는 지금, 전 숨쉬기조차 힘들다구요. 니나를 위해 난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그런 내가 니나를 죽였다니, 자식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건가요? 니나는 다섯 살부터 발레리나를 꿈꾸었어요. 제가 강요한 적은 없어요. 집에 있던 제 옛날 사진과 발레슈즈를 보더니 관심을 보였죠. 그때부터 니나의 삶은 제 삶이었어요. 저는 니나 때문에 발레를 포기했지만 니나에게서 또 다른 저를 봤어요. 저보다 나은 딸의 모습을 원했죠. 나는 기회를 잃었지만 니나는 모두의 환호를 받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랐어요. 모든 것을 따라다니며 함께 했고, 니나가 좌절할 때나 아파할 때 저는 더 아팠어요. 그렇게 힘들게 그 자리까지 갔는데, 몹쓸 단장 때문에 니나가 죽은 거예요. 단장은 니나를 흑조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죠. 그래서 니나가 미쳐서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요. 옆에서 지켜 보는 것도 힘들었죠. 그 역할을 맡으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니나는 듣지 않았어요. 난 정말 니나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오~ 나의 착한 딸 니나. 흑흑흑. 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죠?"

 

엄마의 지목을 받은 단장이 불려 왔다. 그는 팔짱을 끼고 긴 다리를 꼬며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음, 니나의 죽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니요. 니나의 연기는 정말 완벽했어요. 모두에게 기립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었죠. 제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니나가 처음부터 그렇게 완벽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천만에요. 니나는 반쪽이었어요. 그 나머지 반쪽을 끌어내고 살려준 게 바로 접니다. 니나는 베스와 달랐어요. 순진하고 딱딱했죠.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어린 아이에 불과했어요. 자신을 억제하느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죠. 니나의 어두운 욕망을 끌어내느라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면 정말 모두 나에게 고마워 할 걸요. 니나의 예술혼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구요. 전 제 역할에 충실했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뻤습니다. 그런데 니나가 죽다니, 슬프긴 하지만 니나는 마지막 순간에 황홀해 했어요. 진정한 예술은 그런 겁니다."

 

이번엔 니나와 라이벌 관계였던 릴리가 나왔다.

"니나는 불쌍한 친구였죠. 니나 엄마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정말 황당했죠. 숨 막혀서 어떻게 살까 싶었어요. 영화 '미져리' 아세요? 그 영화 주인공이 떠오르더라구요. 니나랑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니나가 주인공을 맡아서 스트레스도 받고, 내가 말실수한 것도 있어서 하루 같이 놀아준 게 다예요. 약을 좀 주긴 했지만 니나가 원했으니까 줬죠. 그날은 남자들이랑 잘 놀았는데 다음날 저한테 이상한 말을 하더라구요. 가끔 제정신이 아닌거 같긴 했지만,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친구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네? 저랑 뭐 이상한 소문이 있다구요? 천만에요. 오히려 단장이랑 무슨 일이 있었을 걸요?"

이때 죽은 니나가 나타난다. 입을 열고 애절한 눈빛을 보낸다. 니나가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영화가 끊어진다. 안 돼, 니나 얘기를 들어야 해. 소리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순간 함께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스르르 사라진다.

 

 

 

2.이제 니나를 놓아주자

 

정말이지 황당한 꿈이다. 에세이 생각을 하다가 잠깐 잠들었더니 꿈에서까지 블랙스완이 나를 괴롭힌다. 그것도 라쇼몽과 뒤얽혀서 난리도 아니다. 니나가 죽은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청량리샘의 말을 기억하지 말았어야 했다. 에세이를 쓰기 위해 블랙스완을 세 번 보았다. 그러는 동안 3주가 지나갔다. 그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 달라졌다. 이제는 니나를 보내줘야 할 것 같다.

니나는 왜 죽었을까. 누가 죽인 걸까. (죽은 게 아니라 갑자기 살아날 수도 있겠지만 난 니나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절실해지고 난 에세이를 무사히 끝낼 수 있다.) 내 꿈에 등장한 용의자는 세 명이다. 난 우선 마음 속에서 릴리를 제외한다. 니나에게 자극이 되고 자아 분열을 가속화하긴 했지만 주요 용의자는 아니다.

 

첫번째 원인은 니나에게 자신의 욕망을 주입시킨 니나의 엄마이다. 정말 흔하고 흔한 이야기이다. 지금도 한 학급에서 최소한 3분의 1 정도는 니나와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어른이 되며, 부모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늘 긴장하고 노력한다. 'sweet girl'이란 목소리가 영화 내내 공포스럽게 귓가에 울렸다.

두번째는 단장으로 대변되는 '예술지상주의'가 니나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백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마음 속 흑조를 끌어내야 한다고 끊임없이 단장은 니나에게 요구하고 니나를 다스린다. 둘의 모습을 보면 요즘 화제가 되는 '가스라이팅'이 떠오른다. 니나의 흑조 연기는 아름다웠지만, 과연 니나는 자신의 본성을 끌어낸 것일까 단장의 욕망을 따라간 것일까. 역에 몰입하면서 니나의 피부는 점점 흑조로 변해간다. 나중에는 까만 깃털이 살을 뚫고 나온다. 니나의 마음 속 왕자님은 단장이었다. 단장의 의도대로 단장을 사랑하게 되고, 단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릴리와 단장의 밀회 장면(이 장면은 니나의 환영이었던 것 같다)을 보고 나서 폭발한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백조의 호수'의 각본이었고, 역할에 충실한 단장에게 니나는 빠져들고, 백조와 같이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니나는 한 번도 자신의 욕망대로 살지 못했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마지막에 "It was perfect"라며 황홀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지만 이것 또한 엄마와 단장의 욕망에 대한 대리 충족에 불과하다.

 

 

3. 놓아주려 했던 니나의 반격

 

글을 쓸 기간이 짧았다면 나의 에세이는 2번 내용에서 그럭저럭 만들어졌을 것이다. 유치한 1번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에 의해 만들어진 불쌍한 니나의 삶과,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적당하게 끝맺음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1주, 2주가 지나며 서서히 나의 마음에서 다른 이야기들이 올라왔다. 블랙스완을 처음 볼 무렵, 띠우샘이 둥글레샘의 책(인문약방)을 선물로 주었다. 그 글 시작 부분에 '약사가 되기 싫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술이 하고 싶었지만 약사가 되길 원하는 어머니 때문에 그 길로 갔다는 이야기, 약대에 가니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약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니나가 착한 딸이 되기 위해 발레리나의 삶을 살고, 둥글레샘이 어머니의 바람을 외면하지 못해 약사의 삶을 살았듯이, 나도 혹시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내 머릿속에서 갑자기 격렬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의문이었다.

 

나는 왜 교사가 되었나. 지금 보면 남들 앞에 서는 것도 정말 싫어하고, 누군가의 삶에 간섭하는 것에도 소질이 없는데. 종이 치면 움직이고, 똑같은 내용을 계속 말해야 하는 삶을 왜 살고 있을까. 사명감 비슷한 것 때문일까?

 

어릴 때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주변 모든 친구들이 비슷한 형편이었으니까. 탄광촌의 삶들은 모두 엇비슷했고, 똑같은 집의 모양만큼이나 형편도 달라 봤자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은 높았고, 자식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골에서 조금은 영리했던 나와 오빠는 개천의 작은 이무기들이 되어 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이란 걸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도시 노동자인 부모님의 삶을 보며 조금씩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때 처음으로 강남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우리 나라의 빈부 격차를 실감했다. 사회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와 문화 충격으로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듯한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종종 글 쓰는 일에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현학적인 말놀음에 빠진 가짜 문학인들에게 일찌감치 질려 버렸다. '글은 타고나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대학 4학년 때 동화작가에 관심이 생겨 잠시 머뭇대긴 했다. 몇 편의 글을 쓰고 평가를 받기도 하고, 직업으로 도전해 볼까 싶었지만 나는 그 길을 피했다. 글을 쓰는 진정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고, 잘 쓸 자신도 없었다. 세상 경험을 더 하고 다시 쓰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뒤늦은 방황을 마친 뒤, 나는 왜 교사가 되었을까. 어릴 때부터의 꿈이긴 했지만 이 꿈이 정말 나의 욕망이었을까. 남들보다 못 배우고 가난했던 부모의 바람을 품고, 나도 모르게 그들의 목적이 되어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게 노력한 건 맞는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니나 엄마처럼 표면적인 강요를 하진 않았지만, 나는 착한 건 어리석은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스스로 '착한 딸'이 되려고 한 것일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아직도 나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욕망이란 것의 경계는 모호해서 '누구의 욕망'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환경과 사회 경제적 영향을 모두 무시할 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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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

만약 니나가 흑조역을 맡지 않았다면, 토토로님이 블랙스완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재하군이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에세이 발표를 1주일 연기하지 않았다면, 띠우샘이 나에게 '인문약방'을 선물하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문탁네트워크에 접속하지 않았다면, 난 나의 삶을 이렇게 깊게 들여다보고 3주 동안이나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이 누구의 욕망으로 빚어진 것인지, 억눌린 욕망이 있었는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10년, 20년이 지나 내 삶이 어떤 욕망으로 굴러가는지 그때 가서야 헤맸을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지금 이렇게 나를 붙잡고, 꿈속에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삶이 허상은 아닌지, 내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누군가를 속이게 되는 건 아닌지 또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흑조의 날갯짓은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제목이 '그릇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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