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후기 : 상덕과 하덕

토용
2022-05-0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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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81장 중 1~37장이 도경(道經), 38~81장이 덕경(德經)이다. 왕필 주석본은 덕경이 뒤에 있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백서노자본은 덕경이 앞에 있다. 아직 50장까지 밖에 안 읽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도경과 덕경이 내용상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덕경의 부분에도 도경에 나온 내용들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38장은 덕을 논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덕을 상등의 덕(上德)과 하등의 덕(下德)으로 구분하고 있다. 왕필은 덕을 얻음(得)이라고 했다. 항상 얻을 뿐 잃어버림이 없고 이로울 뿐 해가 없기 때문에 덕이라고 한다. 덕은 도에 의해 얻어진, 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자 도의 작용이다.

상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얻기 위해 작위하지 않는다. 도로써 덕을 얻고 무(無)를 써서 덕을 다한다. 반면 하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얻기 위해 일부러 작위한다. 즉 상덕을 지닌 사람은 무위를 하고 하덕을 지닌 사람은 유위를 한다.

 

재밌는 것은 이 유위를 하는 하덕의 범주에 인(仁), 의(義), 예(禮)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노자의 유가비판이 엿보인다. 상덕의 무위를 못하기 때문에 인, 의, 예가 생겨나는 것이며, 예는 혼란스러워지는 징조라고 한다.

무위할 수 없어서 인위적으로 널리 베풀어야 하고, 널리 베풀 수 없어서 정직을 귀하게 여기며, 정직할 수 없어서 일부러 공경하는 척 꾸미게 되는 것이다. 즉 인을 잃어버려서 의가 있고, 의를 잃어버려서 예가 있는 것이니 결국 무위를 못하여 유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본을 중시하는, 도에 합치하는 무위의 삶을 지향하면 그 속에 인, 의, 예는 저절로 바르게 된다. 결국 도를 따르는 삶은 억지로 인, 의, 예를 할 필요가 없다.

 

이 장은 덕을 논하고 있지만 중심내용은 무위의 강조이다. 원문만 놓고 보면 무위를 못해서 유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유위를 하자고 주장하는 유가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런데 왕필은 이 장에 굉장히 긴 주석을 달고 있다. 여울아샘은 노자의 원문이 왕필의 유가적 해석에 들어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왕필은 주석에서 인, 의, 예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원문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나는 왕필의 주석이 유가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인, 의, 예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인, 의, 예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인을 밝히면서 삶의 태도를 바꿔야 자연스럽게 진정한 인, 의, 예가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장들의 내용은 앞서 나온 얘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형태라도 될 수 있는 물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비우라고 한다. 도가 그러하듯이 무위의 삶을 살라고 한다. 온나라 백성이 전쟁에 동원되던 시기에 욕심부리지 말고 전쟁하지 말라고 한다. 명성과 재물이 귀한 것이 아니라고, 멈춰야할 때를 아는 지혜를 가지라고 말한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생존법이다.

 

몇 번의 세미나를 하다보니 처음 1장을 읽을 때처럼 막연하지는 않다. 노자 원문만 따로 마음가는 대로 읽는 재미도 있고, 왕필의 주석을 따라 읽는 맛도 있다. 물론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아 헤맬 때도 있다. 그럴 땐 뒤에 또 나오겠지 하면서 넘어간다. 노자라는 텍스트의 특징 때문일까? 몰라도 희한하게 덜 신경쓰인다.^^

 

다음 주는 51~60장까지. 『도의 논쟁자들』 3장 1. 노자의 도가. 발제 없이 메모 올립니다.

 

댓글 2
  • 2022-05-05 19:31

    상덕과 하덕이라. 매우 흥미로워요.

    유가에서 추구하는 것들을 하덕으로 만들어 버린 건가요. 오호~ 도덕경, 대단한데..

     

  • 2022-05-10 23:04

    희한하게 덜 신경쓰인다는 언급이 내 마음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

    왠지 자유롭고 가벼워진 느낌으로 노자를 읽는다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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