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기 3회차 후기

여울아
2020-09-14 11:04
249

 

중국고대사와 십팔사략을 같이 보면서 다루는 내용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이번엔 후기를 요약정리로 해보았어요^^

 

십팔사략으로는 <전국시대>의 인물 중심으로 진나라 상앙, 연나라 합종책 소진, 사군자 중 제나라 맹상군과 조나라 평원군, 그리고 진시황과 그의 사람들 여불위와 이사를 살펴봤다. 역사 기록이란 주로 뛰어난 인재와 그를 알아본 군주나 군자의 이야기로 남는다.

 

이와 달리 고고학적인 기반의 연구에서는 지리/지형적 여건과 주거지 유적으로 역사를 쓴다. 중국고대사 6장부터 8장까지는 특히 발굴된 청동기(용기)의 명문에서 <서주시대> 주왕조의 제도와 사회적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이 명문들은 주왕조가 웨이하 유역에 확고히 자리를 잡은 뒤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상과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주의 갑골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량이 아주 적다. 이 명문의 주제는 상나라 조상과 죽은 왕들을 위한 의례용 제물에 대한 점복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나라의 정인들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이들의 문장 양식과 서체 등이 안양의 갑골과는 다르기 때문에 주나라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이 안양이라는 주요 도시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주는 웨이하 평원 여러 곳에서 네트워크 방식으로 연계망을 형성했다. 특히 청동기와 달리 토기 문화는 그 특성상 일상과 밀접했기 때문에 지역색을 뚜렷이 보인다. 그리고 서구의 봉건주의와 달리 주 왕실은 통치 기간 말기까지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지역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지역적 요소를 띠면서도 주가 상당한 통치력을 가진 국가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의후측궤라는 청동기 명문에는 봉국을 세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 왕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봉건 관행을 통해 주 왕조가 혈연관계를 내세워 잠재적 위협이 되면서 주요 교통로가 될 수 있는 곳에 봉국을 세우고 주를 방어하는데 효율적인 연계망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엔 혈통이 약해지면 자연스럽게 주왕과 지역 통치자 간의 연대가 약화되었다. 발굴된 유적에 의하면 주왕조 4대 소왕때 양쯔강 중류까지 세력이 확장되었다.

 

조상숭배는 주가 국가적 기반을 조성하고, 주왕과 그 후손인 지역 통치자들이 정치적, 종교적인 연방체제로 묶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의 통치기구는 왕실 정인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 달리 주는 행정부와 같은 실무 관리들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주가 상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식민지를 운영했고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민간 행정을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서주 중기까지 관료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점차 왕실 권력이 쇠약해지면서 더 이상 주 왕은 토지를 하사할 수 없었고, 종족의 분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토지 소유권 분쟁과 생산물 강탈 사고 등이 빈번해지면서 극심한 경쟁과 사회적 갈등이 명문에 기록되어 있다. 서주의 문식성(읽고쓰기)은 청동기에 명문을 남길 수 있는 집단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확대되었고, <역경> <서경> <시경>은 공자 시대까지 전해졌다. 주의 몰락은 유왕이 포사가 웃게 하기 위해 봉화를 시도 때도 없이 올리다가 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선왕에서 유왕에 이르는 세대교체 과정에서 기득권 및 고참 세력들이 유왕과 그 지지자들과 벌인 격렬한 정치적 투쟁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6장, 7장을 근거로 서주시대(1045~771 B.C.)에서 공자의 춘추시대(770~481 B.C.)로의 이행은 상고와 상고 이후로 구분하는 학술적 의미뿐 아니라 황하 사회가 위대한 제국을 탄생시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춘추시대의 시작은 평왕이 낙양으로 주나라 수도를 옮긴 때부터이며, 이를 두고 동주시대의 시작이라고 본다. 동주시대는 514년간 지속되었고,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된다. 춘추시대는 정치적 군사적 갈등상황과 동쪽의 신생국가들이 공고해지는 기회가 만들어진다. 특히 춘추시대의 사회적 제도는 “현”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군현제”의 시작은 춘추시대부터인 것이다.) 현의 성격과 그 정치적 위상은 역사와 정치 지리적 맥락을 통해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더 이상 친척들에게 봉국을 주는 대신 지역 관리를 내려보낸 것이다. 초기 현들은 모두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대부분 새로이 정복된 토지와 인구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은 국가와 최고통치자에게 직접 통제를 받아야 하는 유보된 토지 단위였다. 이때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농업생산량이 증가하고 전쟁에서의 살상력이 증대되었다. 종족을 대신해서 “사”라고 불리는 하급 지배층이 증가하였고, 춘추시대 말기에는 전체 관직 중 22%에 달했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춘추시대의 격렬한 정치적 분쟁이 서로 다른 관료 가문들을 몰락시켰으며, 이들의 영토는 현으로 전환되는 등 고도의 자기 파괴적 과정으로 전통적인 종족 시스템에 치명타를 주었다고 평가한다. 이를 배경으로 출현한 사(士) 계급은 자신의 종족 집단이 아닌 국가나 권력자의 업무에 자신의 생존이 달렸다고 규정했으며, 공자가 좋은 예이다.

이외 또 다른 변화는 법의 관행과 체계가 성문 법전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종족 기반의 법적 시스템이 붕괴됨에 따라 국가는 새로 편입한 사람들을 “국인(國人)”이라 칭하며 새로운 법적 시스템의 보호와 통제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법의 성문화는 이들이 종족의 구성원이 되지 않더라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종족 우두머리와 구성원들은 정치적 계약, 충성맹세 등으로 관계를 보장받기를 원했다.(허우마 출토 맹서 석판) 춘추시대는 중국(화하) 국가의 개념이 형성되어 확고해진 결정적 시기로서, 융족과 적족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얻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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