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인간과 신화(10장까지 숙제)

여울아
2020-05-29 17:27
494

제9장 철인(哲人)

 

풍우란은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동양의 사상은 과학적, 논리적, 언어적 측면에서 철학적 사유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 인간과 신화>의 저자, 크릴은 공자철학이 윤리적 합리적 면모를 갖추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만 그의 사상이 쉽게 포착되지 못한 이유로 후기 유가들(한대 동중서 등)이 보편성을 상실하고 지나친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 빠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 이어져 신플라토니즘이라는 신비주의로 빠진 서양 철학사 역시 오히려 초기보다 더 현실과 멀어졌다고 평가한다.

공자철학의 근간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맞아 상고 시대의 반동적 부활을 주장했다거나 공자 이전 사상가들의 영향력 아래 공자가 운 좋게 계승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크릴은 종교적 측면과 그의 철학의 중심 개념인 “도”를 중심으로 공자 철학의 독창성과 중국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공자는 전통적 종교관에서 중시했던 귀신, 제사, 인신희생, 조상에 대해 적당히 거리를 둠으로써 합리성을 담보했다고 평가한다. 가령 공자가 중병을 앓고 있을 때조차 “내 오랜 기도는 끝났다”며, 공자에게 기도란 말보다 행동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천(天)은 구복신앙의 주재자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존재로 해석된다. 특히 공자 이전에는 조상신들이 군주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평화와 전쟁까지 주관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공자는 거의 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평가한다.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세습 신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질이라고 언명한다.(154p) 이로써 통치자의 자격은 개인의 능력과 덕망에 달렸다고 보았고, 이로 인해 윤리적 행동이 크게 촉진되었다고 평한다. 그는 종교적 신앙은 있었지만 그의 관심사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보다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몰두했다.

 

둘째, 공자철학에서 “도”는 개인과 국가, 천하가 모두 따르는 행동방식이다. 가령 천하에 도가 있다고 말할 때 이때 도는 마땅히 그래야 할 방법이나 도덕적 원칙이 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란 불의를 행하지 말라는 단조로운 도덕률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때로는 위험한 행동을 요구하는 원리의 집합체이다. 이것을 크릴은 협동적인(공동체적) 세계관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가족 중시의 문화에서 협동과 사회화를 숙달하고 그 결과로 유능한 시민이나 관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공자 이전에도 이렇듯 가(족)와 국가간의 유사성을 발견했으나 공자에게는 개혁적인 힘이 포함되었다고 평가한다. 공자는 이 둘의 유사성이 구성원의 순종 방식이 아니라 동등한 조직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상하 복종관계는 있지만, 자식도 나이 들면 부모가 되는 것처럼 전제적, 고정적인 구조가 아니라 대체로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또 주체자의 협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적)원칙에 충성한다는 측면에서 민주적인 요건을 갖추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한없는 낙관주의는 교육, 경험, 능력으로 평가하되 그의 평등사상에 기반이 된다. 저자는 공자철학을 담고 있는 <논어>를 준거로 하여, 그가 판단 유보적이며(闕文), 교조적이지도 않은 점(기필이 없다)에서도 민주적이라고 주장한다.

 

크릴은 공자철학을 타협의 철학이라고 정의한다. 절대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협동을 위한 타협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원칙에 따르는 것과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에게 너무 많은 책임이 떠넘겨지고 이를 위해 개인은 수양을 강화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 부단히 나아가했다.

댓글 6
  • 2020-05-30 10:44

    11장 儒

    ‘儒(유)’는 본래 학식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유가의 외부에서 부르기 시작한 용어였다. 공자시대에는 ‘유’가 유가를 지칭하는 통용어가 아니었지만, 기원전 3세기경에는 유가들이 자랑스럽게 사용하게 된다.
    유가에서는 공자 사후 유악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한비자는 유가가 8파로 나뉘었다고 했다. 제자들은 흩어져 군주나 관리의 교사가 되었고, 공자의 손자 자사도 대신을 지냈다고 한다.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 군주들은 정치기술을 익힌 사람들을 등용하려 했고, 특히 철학자들을 우대하였다. 군주들 사이의 그런 관심은 순수한 지적 이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중국 철학은 대체로 인간적인 관심사 및 윤리적, 정치적인 문제에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주가 올바른 철학을 터득하기만 하면 전 중국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유가들 중에서도 맹자나 순자처럼 학문에 큰 성취를 이룬 사람도 있었지만, 순자가 ‘속유(俗儒)’라고 지칭하며 비난하는 유가들도 많았다. 순자는 그들에 대해 학문이 천박하고 잡스러우며, 옷 모양이나 행동이 속된 사람들과 다를 바 없고, 어리석은 자를 속여 가며 생활방편을 얻기 위하여 선왕을 논하지만 군주의 총신과 가신들의 식객 노릇을 한다고 말한다.
    유가들 중에 교사나 정치가로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 속유들은 다른 집안의 제사를 주관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 2020-06-01 20:44

    10장 개혁가

    1. 플라톤과 공자
    - 플라톤과 공자는 비슷한 시기에 정치학을 다룬 유명한 인물들이다.
    - 비슷한 점도 많지만, 시대적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국가의 규모, 정치적 경험이 달랐다.

    2. 공자의 시대적 조건
    - 인간의 행복과 존엄이 위협받던 시대에 공자는 이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 공자가 과거를 가져왔다고 해서 복고라고 볼 수는 없다. 이미 그 당시에 과거를 모방하는 관행이 있어왔다. 공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개변시키려는 자세를 취했다. 또 공자는 전통이라고 무조건 따르기보단 취사선택하여 따랐다. 그는 상고제왕을 그냥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가지고 왔다.
    - 주공이 통치의 정통성을 정의와 온정에서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후에 모든 군주의 의무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지 않더라도, 이러한 배경이 공자에게 이론적으로 받침이 되었다.

    3. 공자의 이상
    - 공자는 봉건제를 옹오하지 않았다. 공자는 모든 백성이 평화와 완전 및 풍요를 향유할 수 있는 국가를 최선의 국가로 생각했다. 또한 사해 안의 모든 사람을 형제라고 여겼기 때문에, 협동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공자의 교육론은 혁명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하고 그중 어떤 평민들은 군자로 만들려는 노력은 세습적인 귀적질서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공자는 인간상호간에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도덕을 꼽았다. 누구나 도덕적으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고,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가문이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물론 그는 백성에게 정치를 맡기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대중이 내린 판단의 정확성을 신용하지 않았기에 교육시켜야한다고 생각했다.
    - "세습귀족의 전제정치 대신 가장 유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으며,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여 생활하는 일탈의 세계 대신, 각자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협동사회가 구현되는 것을 염원하였다."(196)

    4. 공자의 이상 실천방법
    - 왕권을 차지하고 있는 세습귀족을 통해 공작했다.
    - 유덕한 군주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유덕한 군주 찾기에 세계의 운명을 걸 수 없었기에, 군주의 지위를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것으로 격하시켰다. 따라서 덕과 능력을 기초로 한 관리 선발 및 승진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공자는 대신에게 높은 도덕적 책임을 요구했다.
    - "공직을 맡으려는 사람은 도덕과 정치의 원칙에 대한 철저한 교육으로 무장되어야 하며, 그런 교육에 의해 훈도되었다는 증거를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양심과 여론의 힘으로 위정자가 '도'의 범위에서 일탈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203)

    5. 민주주의와 비교
    (생략)

  • 2020-06-01 20:54

    제4장 전기

    공자의 가계는 확실치 않다. 공자는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현재 산둥성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취푸시 부근이다. 관행에 따라 그의 출생연대를 기원전 551년으로 잡고 있고, 대체로 정확한 것 같다.
    공자가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으며, 제자 자공은 공자에게 '일정한 선생'이 없었다고 하였지만 반드시 공자가 모든 것을 독학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젊은 시절 말단 벼슬아치로서 초보적인 교육을 습득하였던 것 같다.
    공자는 청년들의 출신이 아무리 빈천해도 능력만 있으면 그들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하였고, 모든 청년은 그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가질 때까지 존중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공자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야심가였으며, 세습받은 것이 없기에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공자는 천성적으로 아첨할 줄 몰랐으며, 오히려 친구들이 갖은 고생 끝에 공자에게 호감을 갖도록 권력자의 마음을 돌려놓고 회견을 주선해 놓으면, 이 기회를 권력자의 잘못과 무절제를 지적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은 듯하다. 공자의 성격은 정치 실무에서 성공하기에는 부적당하였으며, 오히려 교사나 철학자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공자는 현실적인 출세길에서 실패한 것을 비통해 하였지만 그 덕분에 학문을 즐길 수 있었다. 관청에서는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무능력하였지만,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책은 그의 사상 형성에 배경은 되었지만, 결코 유일한 원천은 아니었다. 그는 정치란 전체 백성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아무리 찬란하게 보이는 묘방도 이것을 보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목표는 관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공공복리를 배신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헌신적인 최고 인격자들이 정치를 계속 운영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공자가 적임자이며 그는 그 자리를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새로운 정부 관리가 될 자격은 면학과 자기수양뿐임을 강조하면서, 제자들을 냉혹하게 몰아댔으며, 그들이 자신의 원칙을 배반할 경우에는 나태함을 꾸짖고, 어리석으을 조롱하였으며, 경멸하는 말을 퍼부었다.
    공자는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려는 자세만 갖추었다면 뜻을 가진 학생은 모두 받아들였음을 강조하였고, 일단 공자의 문하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이 대등하였으며, 다만 구별이 있었다면 학식과 덕망의 높고 낮음에 의한 것뿐이었다. 학생들이 그를 찾아간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매력적인 성격때문이다. 그는 교사로서 학문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의 진지한 지적 관심에 호소하는 힘을 가졌다. 그 시대의 어떤 교사도 그처럼 문학, 역사 및 철학에 대해 수준 높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할 사람은 없었다.
    공자는 지조있는 척하면서도 부와 육체적인 쾕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거듭 비난하였으며, 무도한 나하에서 관직을 갖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단언하였다. "물질적인 보답을 염두에 두지 않고 3년 동안 공부하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한탄한 것이 논어에 보인다.
    공자의 비난을 받은 귀족들이 그의 제자들을 기꺼이 등용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은 약간 의와라고 하겠다. 그러나 건전한 도덕교육을 받은 신하를 등용하는 일에 군주들이 매력을 느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자는 멍청이와 게으름뱅이를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문도들은 선발된 정예분자였다. 그들의 기지는 사부와 대화하거나 자기들끼리 토론함으로써 닦였으며, 정신은 역사와 시, 예의 학습으로 무장되었다. 계강자가 정치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공자는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것부터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답한 일도 있었다.
    <논어>에는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선생께서는 왜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정치에 기여할 수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그 질문을 회피한 대목이 ㅇ보이는데, 공자는 제자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난처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계강자는 공자의 생각에 관용을 보였고 흥미조차 느꼈지만, 동시에 과격한 생각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정도의 능력도 충분히 갖춘 그를 무언가 불안하게 바라보았음에 틀림없다. 공자는 중곡문화의 최고 거장으로서는 크게 성공하였지만, 만약 그 때 실제적인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겼다면 그 일을 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공자가 외유할 때 그와 함께 다닌 증거가 명백한 제자는 자로와 안회 두 사람뿐이다. 공자는 무력보다 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백성을 관대하게 다스릴 것을 지지하였으며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즐겼던 귀족무사들을 비난하였다.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묻자, 정말 좋은 정치는 백성들을 잘 보살피기 때문에 그 백성들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백성들도 그 지배 아래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 공자의 대답이었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자로가 답변하지 못했다고 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왜 그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은 지식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일념 때문에 먹는 것도 잊을 지경이며,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기뻐서 근심도 잊은 채 나이를 먹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유의 사람이라고 말이다."
    공자는 67세가 되어 돌아갈 친구들과 제자들이 있는 노로 돌아갔다.
    공자 말년 자로가 그를 위해 귀신에게 기도할 것을 청하자 공자는 "나는 내 방식의 기도를 이미 오래전에 마쳤다."고 함. 기원전 479년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은 자기 인생의 황금기이자 절정기에 공자의 곁을 3년간 지켰다.

  • 2020-06-01 22:41

    재잘님의 4장은 지난 숙제글에 취합해놓았습니다. 취합하실 때 포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2020-06-02 09:39

    제 8장 학 인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함을 내가 속으로 노팽에게 견주노라
    <논어> 술이편 7장 처음에 나오는 이 문장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지금까지도 중국학계에서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과연 공자는 책을 저술하고 편찬했을까? 아니면 공자가 스스로를 전수자이지 창작자는 아니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일까?
    공자가 왕성한 저술가였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캉유웨이를 들 수 있다. 그는 공자가 자신의 말을 믿게 하기 위해 모든 초기 경전을 저술하고 공자 이전부터 내려오던 중국 문헌까지 편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릴은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공자를 정치나 정책의 노리갯감으로 왜곡시킨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크릴은 이 논의의 근거를 찾기 위해 공자시대와 그에 가까운 시기의 초기 자료들을 중심으로 <사기>, <시경>, <서경>, <춘추> 그리고 <맹자>에 이르기까지 자료들을 분석한다.
    크릴은 공자가 시경이나 서경을 편찬하거나 창작했다는 말들에 대한 근거를 찾아내는 일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자시대에는 아직 이런 종류의 공문서가 책으로 묶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맹자>에서는 공자가 춘추를 저술했으며 이것이 완성되고 난신과 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 문장이 있다. 그러나 현재 내려오는 <춘추>는 두려워할 만큼 숨은 뜻을 내포하지 않는다. 크릴은 <춘추>>는 단순한 노나라 연대기일 뿐이라고 말하며 맹자가 말한 춘추와 지금의 춘추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이 밖에 <예기>나 <역경> 역시도 공자가 편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크릴은 공자가 저술한 책으로 추측되는 책들을 검토하면서 결국 공자는 어는 책도 저술하거나 편찬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만 독창성이 강했던 공자가 문헌의 본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인용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2020-06-0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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