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인간과 신화 (마지막까지) 숙제

동은
2020-06-07 02:00
265

16장 공자와 중화민국

 

 중화민국 헌법과 중국이 공화국이 되었다는 것 모두 유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후스는 근대 정통유교가 고정적인 유교의 민주적인 정신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쑨원은 이 민주주의적 정신을 충분히 인식했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다. 레너드 쉬스롄(전직 외교부 장관)은 쑨원 철학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청조의 수준 높은 비평운동도 쑨 박사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그들은 공자로의 복귀를 원했다."

 쑨원은 연설을 할 때 여러번 공자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면서 경의를 표했다.  쑨원은 스스로 서구에서 차용한 것이 많다고 인정했지만 단순히 수입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쑨원은 <삼민주의라는 유명한 저술에서 중국이 세계에서 정당한 지위를 회복하려면 ‘중국 고대의 도덕을 부활시키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선언한 후, 유가적인 덕목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을 열거했다. 중국 고대 철학을 부활시키기 위해 후세 유가들이 만든 경전의 하나인 <대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고대 정치철학 가운데 이런 것이야말로국보로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쑨원이 이런 주장을 한 배후에는 중국이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는 비원도 분명히 깔려 있지만, 그것을 애국지사의 공허한 허세나 중국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한 거다. 

중국 헌법은 서구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는 3권분립에 따르지 않고 쑨원이 고안한 5권 분립을 기초로 구성되었다. 쑨원은 각종 민주주의 헌법 및 그 헌법들을 연구한 끝에, 감찰과 고시 두 가지 기능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했다. 이 두 가지 기능은 황제의 간섭을 비교적 덜 받은 중국 관리들이 유교의 후원 아래 수행해온 바로 그 기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가 썩 좋았기 때문에 쑨원은 이 기능을 독립적인 권력으로 만들어 5원 가운데2원을 할당했다. 

 앞으로 중국인들이 공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미래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자를 어떻게 생각하든 앞으로 상당기간동안 중국인은 계속 공자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후기

 이 책은 개괄적이나마 그의 사상이 여러 문명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어떤 형식으로 수행해왔는가를 추적해보았다. 이런 사실들을 되돌아볼 때, 그의 영향력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지속된 이유 공자의 관심은 사회철학 및 정치 철학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조직을 독재체제와 민주체제의 두가지 형으로 나누어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효과적으로 진정한 문정치는 구현되기 어려운 정치현실인 것, 이것을 영속시키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이에 비해 독제정치는 잘 성장한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1) 의무를 명료하게 규정한다(민주정치에비해서) 2) 민주정치에는 국가의 철학이 없다 정부의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도 개인의 의무가 될 수 있으며, 양심만이 의무라는 것을 판단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큰 싸움은 악에 대한 극적인 투쟁이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권태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을 공자는 인식했던 것 같다. 사회를 인도하기 위해 어떤 변하지 않는 표준을 만드는 사람은 위험한 모험을 하는 것임을 공자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 그것은 창의성을 질식시키며 2) 그것을 만든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은 해가 된다. 3) 그것에 대한 비판 때문에 국민의 신뢰가 파괴되면 국민은 방향을 상실한 채 완전히 방치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공자는 절대적인 권위는 어떤 것도 요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도를 확충시킬 수 있지만 도는 인간을 확충시킬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적인 생활방식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공자는 근대 민주주의에서 이따금 연상되는 것보다 더 큰 열정과 열의를 갖고 그것을 주장했다는 점뿐이다. 공자는 인간을 신뢰했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성실한 존재라고 믿었다.

 

댓글 4
  • 2020-06-07 16:42

    15장 유교와 서구민주주의

    유교는 서구민주주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을까?
    17,8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 철학이 발달할 무렵 유교가 소개되었고, 이후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명확하게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유럽에 중국문화를 소개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이 보낸 유교에 대한 정보는 신유교였다. 신유교는 불교의 요소가 많이 가미된 형이상학적 철학체계로 당시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정통유교가 아니었다. 마테오리치는 “신유교는 공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며, 이후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것을 논쟁하여 한학파(漢學派)가 형성된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지식인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유학으로부터 공자의 도덕철학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들은 공자 개인의 사상과 초기의 순수한 유교개념을 유럽에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18세기 계몽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공자의 사상은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그것이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전목적을 위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했으며, 중국의 정치가 전제정치의 특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세기 말 이후 중국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사라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중국철학이 혁명 이후 민주주의 철학의 성장에 기여한 사실은 무시되었다.
    혁명 자체에 대한 원리와 인간 평등의 원리에 중국 사상이 끼친 영향을 보자.
    혁명파의 국민회의가 혁명을 “신성하고도 불가결할 권리이자 의무”라고 선언한 것은 <논어> <맹자>에 명확하게 나온다. 평등에 대해서 보면, 1789년 인권선언 제1조는 “인간은 권리면에서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항상 그 권리를 계속 향유한다. 그러므로 시민간의 구분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경우에 한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1696년 예수회 선교사 콩트가 “귀족계급은 결코 세습되지 않고 신분상 상하 차별도 없으며, 다만 각자가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개인의 인격과 재능만을 근거로 관리를 선임해야 한다는 원리, 즉 ‘민주정치 이론’에 프랑스 혁명이 공헌하였던 시대에는 이것이 적어도 중국정치의 원리라는 것은 이미 상식화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세심한 연구가 필요하다.

  • 2020-06-08 17:34

    제 14 장 승리
    기원전 2세기 한(漢)의 황제가 유교를 공인하였다. 일반 백성들이 유교를 지지하였고, 장기간에 걸쳐 유교의 공인을 군주에게 요구하였다. 국가란 모험에 찬 협동체이므로 교육은 보편적으로 보급되어야하고, 전체 국민가운데에 가장 유능하고 덕망 있다고 인정된 사람을 뽑아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는 공자의 정치론이 있었다. 이와 상반한 것이 법가의 이론이다. 법가는 군주가 만사를 지시하고 독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백성은 아무것도 이해할 필요도 없이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교육도 필요 없고 단지 법령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쟁점은 명료하다 치적을 위해서 민심을 얻을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은 그것이 필요 없다는 전체주의적인 입장을 택하였다. 그는 자기혼자서 거대한 제국을 충분히 통치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철저하게 법가사상을 신봉하지도 않았던 만큼 전적으로 반 유교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자기를 비난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는 정도라 하겠다. 모든 종류의 학자들을 등용하였고 유가서적을 금지한 이후에도 그들을 곁에 두었다.
    진시황이 사망하자 유약하고, 유약한 아들에 이어 농민 출신의 진섭이 반란으로 초왕(楚王)이 되었다. 진섭은 반란에 가담한 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으나 살해되었다.
    혁명은 계속되었고 이 무렵에 전제주의적인 진의 정치는 혼란에 빠졌지만, 비교적 민주적인 통치를 수창(首唱)한 사람도 이미 떠났다. 그러나 두 원리간의 투쟁은 계속 되었다.

    다음 실질적이 주도권은 항우에게 넘어갔다. 전투에는 탁월했으나 극히 횡포하였다. 그와 대조되 사람은 평민 출신 한 고조였다. 처음에는 항우가 한고조보다 훨씬 위망도 높았으며, 거느린 군대로 많았고 뛰어난 장수였다. 반면에 한고조는 어떻게 하면 협력자와 백성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았기에 더 현명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이를 각 지역에서 한 명씩 뽑아 등용해 백성들을 대변했다. 백성들에게 정치상의 발언권을 준 것이다.
    둡스는 “ 고조의 즉위는 자의적이고 전제적인 법가적 왕권관념에 대한 유가적 관념의 승리, 즉 황제권력은 제한되어 백성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고 정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관념의
    승리였다.“ 고 했다. 그러나 법가적 관행이 실제 정치에 계속 이용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 세력이 점차 중대한 데에는 유가들이 궁정의례를 보존하여 왔다는 것이다. 농부출신 고조조차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들에게 의존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가 가혹하고 전제적인 지배와는 달리 비교적 온화하고 민주적인 정치를 지지하였다는 사실이다.

    역대 중국황제 가운데 공자가 가장 의기투합한다고 생각한 한 문제가 등장한다. 그는 세금을 감면하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킨다. 황제나 정부에 대한 비판을 처벌하는 법률을 폐기한다.

    다음으로 한 무제가 등장한다. 그의 치세는 유교 사상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가 유교를 공인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지지한 것에 비견된다. 무제는 고전에 조예가 깊었고 그가 내린 조서는 유가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백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예악과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역경≫과 ≪논어≫를 인용하였다. 그의 치세는 고전, 특히 유가경전의 재발견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유가들은 골칫거리였다. 박해보다는 그의 책략은 훨씬 더 교묘하고 효과적으로 치세를 하였다.
    ≪춘추≫의 학자로 유명한 동중서가 한 무제를 비판하여도 곁에 두었다. 그런 한 무제는 공손홍을 좋아했는데 그가 실제로는 상당한 법가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유가라는 사실에 더 가치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한 무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행동을 가장 이타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처럼 주장하였다. 만연한 원성을 해소하기 위해 다수의 유가를 관료로 임명하고 국가 보조를 받도록 지원했다.
    ≪예기≫는 유가경전 가운데 가장 방대한 것의 하나로서 주로 의례상의 관행, 즉 ‘예’에 관한 논설을 모은 것이다. 이 가운데 몇 편은 공자를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 자료로 간주되어왔다.

    ≪사기≫는 사마담.사마천 부자에 의해 저술되었는데, 두 사람은 모두 무제의 관리였다. 중국 최초의 대서사이기 때문에, 중국의 교육과정에서 경전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공자전기를 저술하였는가는 모르지만, 공자전기가 문헌을 많이 이용하였다.

    한 무제의 치세에서 유교가 겪은 일들은 후세까지도 그 영향을 미쳤다. 유교는 때대로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정치에 끼친 유교의 영향은 시대에 따라 강도가 달랐지만, 그 영향은 구석구석 스며들었고, 대체로 민주주의라고 할 만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치는 오로지 덕망과 교양만을 근거로 선발한 국내 제일급의 유능한 사람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공자의 주장은 시험제도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이 한 대 이후 점차 정비되었다. 이 시험제도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관계에 대거 진출하였다. 이 제도의 기초가 유교철학과 윤리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이상을 공유한 집단을 형성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일부는 매 세대마다 공직을 획득하였다. 이는 어느 정도 민주정치의 방향으로 나간 증거인데, 절대 군주정치 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 2020-06-08 20:03

    저는 이번엔 정리가 없네요. 에세이 주제만 올립니다.
    에세이는 말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목요일 북앤톡 피드백에서 빠꾸먹어서 시간이 짧지만... 최대한 써보도록 할게요

  • 2020-06-08 21:09

    12장. 傳設의 발전
    공자 사후에 유가의 영향을 받아 묵가라는 학파가 등장한다. 처음에 묵가는 유가로부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유가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묵자는 유가의 운명론이나 지나치게 옛것을 무조건 모방했다는 점. 그리고 호사스러운 장례 관습을 비판했다. 또한 사유에 대한 원칙은 제시했지만 진리의 고정된 척도는 제시하지 않으며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도록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의 여지를 허용하는 공자와 달리 묵자는 아무도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반박할 수 없는 권위주의적 체계를 세웠다.
    묵가는 옛 성왕에 대한 설화 역시 급속히 증가하면서 상고시대에도 왕위는 세습이 아닌 덕과 능력을 기초로 선출하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가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학자들은 세습 귀족들이 본래 유능하고 덕망 있는 학자들이 차지할 자리를 찬탈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B.C 314 연나라 왕이 대신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큰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에서도 나라의 혼란을 우려하며 왕위의 세습적 계승이 국가의 안정을 위한 최고의 방법임을 역설한 고문관들에 의해 실행하지 못했다. 유가들은 자신의 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군주는 유교교육으로 적절하게 교양을 쌓은 세습군주보다 오히려 더 자의적이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덕자에게 제위를 선양하는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그저 먼 옛날 역사로만 위치시키려고 했다.
    맹자도 연왕의 왕위 양도를 비판하며 왕위계승자 외에 다른 사람에게 국가를 양도하는 것은 하늘만이 가진 권리라고 선언했다. 맹자는 공자 사후 100년 후 태어났다. 그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백성이며 따라서 백성의 복리를 실현하지 못하는 군주를 바꾸는 것은 백성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엄격하게 주장하는 공자와 달리 맹자는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도덕적인 면이나 지적인 부분에서 약간씩 후퇴했다. 그리고 <맹자>에서는 공자가 높은 관직생활을 했다거나 봉건제도의 옹호자였다는 곡해를 하는데 기여했다.
    도가나 법가에 의한 유가의 왜곡은 더욱 심해졌다. 도가서의 대표 서적인 <노자>와 <장자>에서처럼 도가는 유가의 묵가를 비판하며 개인에게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면서 순수한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도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정치나 학문같이 인위적인 것들은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도가사상에서 도가의 성인은 자신과 우주가 일체라고 여겼기 때문에 전체주의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공자의 방식은 부지런히 공부하고 직선적으로 생각하는, 너무나 힘든 과정이었으나 공자사후 다들 좀 더 쉬운 방법들을 제시하며 지식을 얻는 지름길이 개발되었다. 그 예로 만물이 음양의 원리로 구성되며 숫자로 우주의 신비를 풀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역경>이다. 크릴은 <역경>중 십익을 공자가 저술했다는 주장에 대해 여려 증거를 제시하며 공자가 저술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공자는 점치는 행위를 비판하기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 <좌전>이나 <공자가어>를 통해서도 크릴은 공자사상에 대한 왜곡이 어떻게 진행되어져 왔는지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유가의 높은 지적 전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순자이다. 순자는 공자의 교육에서 ‘예’와 ‘의’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인간은 가야할 방향을 엄격하게 지도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교육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타고난 도덕적 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학문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순자는 권위주의적인 체계로 유교를 발전시켰으며 이후 법가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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